* 난생 처음 시사회에 가봤다. 개봉까지 사흘이나 남았는데 먼저 보니 뿌듯하기 그지 없다. 이런 기회를 마련해 준 내 친구 김지영에게 감사드린다.


오늘 오후, 판결이 났다. 박지만이 낸 영화 <그때 그사람들>의 상영금지가처분 신청에서 법원은 영화의 앞과 뒤에 들어가는 다큐 필름을 삭제하고 상영하라는 결론을 내렸다. 다큐 필름이 들어가면 영화를 사실로 혼동할 수 있다나? 어이없는 일이다. <화씨 911>에서 보듯 미국에서는 현재 얘기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 우리는 죽은 지 26년이 지난 박정희 얘기도 맘놓고 못한다니 말이다. 이게 다 박근혜의 정치적 파워일텐데, 그녀에게는 박정희가 아버지에 불과하겠지만, 우리 국민들에게 박정희는 우리나라를 18년간 통치한, 그래서 우리 현대사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공인이다. 박정희의 공과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일 수 있고, 그 해석에 대한 심판도 국민의 몫이다.


예컨대 이인화가 쓴 <인간의 길>은 박정희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했다는 식으로 그를 일방적으로 미화.찬양했는데, 그래서 그런지 독자들은 그 작품을 외면했고, 모든 것을 바쳐 박정희의 일대기를 쓰겠다던 이인화는 겨우 3권까지만 쓰고 포기하고 만다. 박정희를 찬양하는 숫자가 훨씬 많은 현실에서, 이 영화가 박정희를 왜곡되게 표현했다면 역시 관객의 심판을 받을 터, 그런 의미에서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냄으로써 심판의 기회를 박탈하는 행위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침해일 것이다. 다행시 상영 결정이 나긴 했지만, 앞뒤가 다 잘려 우스운 영화가 되어 버렸다. 처음에 들어갔을 부마항쟁 필름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말해줘 초반 도입부로 적절했고, 장례식장 풍경을 다룬 마지막 다큐는 영화에 웅장함을 부여하는 동시에 독재자의 죽음에 통곡함으로써 외신 기자들을 놀라게 했던 우리 사회의 후진성을 보여줄 터였다.


내가 보기에 이 영화의 초점은 박정희가 아니라 김재규다. 10.26을 일으킴으로써 역사의 물줄기를 바꿀 수도 있었던 그는 거사 후 갈팡질팡하며 줏대없는 행동을 일삼다 비참한 최후를 맞는데, 이 영화는 그런 그를 마음껏 조롱한다. 거사 직후 그가 육군본부 대신 자신의 텃밭인 중앙정보부로 갔다면 사태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것이라는 게 학자들 대부분의 견해건만, 그에게는 거사 후의 구체적 계획이란 게 존재하지 않았다. 김재규를 민주투사로 미화하는 사람도 있지만, 난 거기에 찬성할 수 없다.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네 어쩌고 하는 말은 멋있게 보이려고 감옥에 들어가 생각한 것일 터, 김재규는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아닌, 순전히 차지철 경호실장과의 사적인 감정에서 홧김에 일을 쳤다는 것이 거사 전후의 행적을 지켜본 사람들의 견해이기도 하다.


그렇다 해도 나는 김재규가 이 땅의 민주화에 공헌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걸핏하면 탱크로 깔아뭉개자는 차지철과 “4.19 때 발포한 최인규가 사형당한 것은 그가 내무장관이었기 때문이다. 대통령인 내가 발포명령을 내리면 어쩔 거냐”고 말했다는 박정희의 기세로 보아 10.26이 없었다면 부마항쟁에서 수천의 희생자가 발생했을 것이고, 칠레의 독재자 피노체트가 80이 넘어서까지 권력을 놓지 않는 것에서 보듯 스스로 물러나는 독재나는 없는 법, 어쩌면 박정희가 지금까지도 철권통치를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니 90년대 학번은 물론이고 00학번도 대학생활을 반독재 투쟁에 바쳐야 했지 않았을까?


앞뒤가 잘려 영 어색하고, 내용도 썩 재미있지는 않지만, “십이육이 뭐냐”는 내 질문에 “12.6”이라고 쓴 모 대학생에게 좋은 현대사 공부가 될 수 있을테고, 공과에 대해 논란이 많은 박정희에 대해 생각해 볼 계기를 마련해 준 뜻깊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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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초의시종 2005-02-01 0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 마태님이 보신 것도 앞뒤 잘린 버전인건가요? 명색이 시사회면 그냥 좀 틀지. 판결나고 나서 상영한 건가요? 암튼 이 판결 때문에 이 영화 볼지 말지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00학번까지 반독재 투쟁이라니 끔찍해요...... 그래서 제가 피노체트가 치매에 걸렸더라도 재판을 하자고 하는 거랍니다. 이미 미쳤었는데요, 뭘.

마태우스 2005-02-01 0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종님/네, 법원 판결이 나면서부터 바로 효력이 나타난다고 하더군요. 원래는 가리고 튼다고 해놓고 아예 잘랐던데요. 헤헤, 00학번 얘기는 그냥 해본 소리고, 박정희가 살아있으면 지금 90살이 조금 안되었을텐데, 설마 지금까지 해먹었을까요. 뭐, 그가 아니라도 후계자 군인이 했을테니 반독재 투쟁을 해야 하는 건 마찬가지였을테죠^^

로렌초의시종 2005-02-01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나저나 시사회에 다녀오셨다니 정말 부러워요. 비록 표현의 자유는 없는 나라지만, 유명한 사람은 있잖아요? ㅎㅎ 아는 분이 언제한번 데려다주신다고 약속은 하셨는데......(시사회만의 분위기가 좋데요. 그 분 말씀으로는.)

노부후사 2005-02-01 0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인화 학동은 자신의 필생의 역작이 될 것이라 자부하던 대하역사구라소설 <인간의 길> 쓰기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예전에 이상문학상 수상할 때, <중앙일보> 인터뷰를 보면, 그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다 죽거든, <혁명의 길>, <나의 조국>이란 제호로 나머지 7권을 채워넣을 것이라 하더군요. 지금도 열심히 자료수합에 몰두하고 있다 합니다. 그러고 보니 윤종찬이 감독하는 <청연>의 시나리오를 이인화 학동이 쓴다고 해서 밥맛이 떨어져 버린 기억이 나는군요.

모과양 2005-02-01 0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아침 신문에서 봤습니다.  덕분에 영화 저도 보고 싶어졌어요.

드팀전 2005-02-01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는 사실 별 관심없었는데...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엄청난 홍보효과가 있었던 것 같아요.이 효과를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나 나올지 진짜 궁금해지는군요.
제갈량은 죽어서도 사마의를 몰아냈다더니...죽은 박정희가 아직도 헌법에서 보장한 표현의 자유를 몰아내는군요.정말 유령이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2005-02-01 10: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체리마루 2005-02-01 1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저도 보고 싶어요. 박정희라는 인물은 참 시대적인 평가가 극과극으로 나뉘는거 같네요. 블랙코미디라는데 그냥 무삭제판으로 상영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작은위로 2005-02-01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이지, 우리나라는 웃기다니깐요~ 쳇, 아, 좋겠어요. 마태님.
-_-그런데, DVD로 나와도 짤릴까요? 흠, 그럴지도....

마태우스 2005-02-01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은위로님/우리나라 웃긴 거 맞습니다. 그게 다, 이 영화가 정치권의 음모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은 탓입니다.
새콤한귤님/코메디라지만 별로 웃기지는 않아요. 그래도 무삭제판이 훨씬 나을 것 같은데....
드팀전님/그게 다 박근혜의 힘 아니겠습니까. 김재규가 오히려 더 명예훼손을 많이 당하는데, 아무 말 못하잖아요.
모과양님/멋진 그림이군요. 호홋.
에피님/아 그렇군요. 아직도 자료 모으고 있다니 놀랍습니다. 이런 식으로 가다간 환갑 전에 완성이나 할 수 있을지요
로렌초님/시사회장 생각보다 별루에요. 시간도 잘 안지키고....무대인사도 여배우 대신 잘 모르는 배우-민대령-와 투자자가 와서 하더군요. 다른 관에는 이쁜 여배우가 갔을텐데 우리 관은....(총 7관에서 시사회를 했답니다)

하얀마녀 2005-02-01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 때 김재규가 마사오 박을 쏘지 않았다면 수많은 사람이 희생됐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본문도 좋지만 드팀전님 코멘트에도 추천하고 싶네요. 왜 코멘트엔 추천을 못하지...

진/우맘 2005-02-02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대사 공부....끄덕끄덕.
한강 읽은 직후에는 그 숫자로 된 '사태'들이 다 구별이 되어 무지무지 뿌듯했는데....지금은 이다지도 까마득하다니....ㅠㅠ

마태우스 2005-02-02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녀님/그러게요. 저도 제 코멘트를 보고 감탄한 적이 여러번 있거든요^^
진우맘님/우리 같이 늙어가는 처지잖아요^^

하루(春) 2005-02-02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사회라 하지 않으셨나요? 시사회는 삭제 전 상태로 상영하는 것 아닌가요? 공짜표를 받으셨나? 암튼.. 서울중앙지법이 미워요. 어제 뉴스에 네티즌들도 들고 일어났다던데... 저도 들고 일어날까 봐요. 화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