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때 만난 친구 중 의령이 고향인 애가 있었다. ‘의령’이란 말을 듣자마자 난 “아, 그 우순경!”이란 말을 했는데, 그 친구는 그런 말을 하도 들어서 지겹다면서, 의령이 우순경 사건으로만 기억되는 게 속이 상한단다. 우순경 사건은 1982년, 술을 먹고 뭔가에 불만을 품은 우순경이 총을 들고 나와 보이는 족족 총으로 쏴죽인, 그래서 56명의 사망자를 낸 보기드문 사건이다. 당시 모든 일간지는 그 사건을 1면 톱으로 게재했고 뉴스에서도 오래도록 보도를 했었으니, 그때의 기억을 간직한 사람이라면 의령이란 지명에 반사적으로 우순경을 떠올릴거다.




그보다 훨씬 전에 일어난 여수.순천 반란사건, 일명 여순반란사건도 여수와 순천의 이미지를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우리 교실 조교 선생 하나가 고향이 여수여서, 그녀를 보자마자 내가 한 말이 “그럼 여순 반란사건이 일어났던 그곳이네요”였다. 움베르토 에꼬에 의하면 사람들이 자기 이름을 들으면 백이면 백 모두 “그럼 메아리세요?”라고 농담을 하고, 자신의 재치에 스스로 감탄하지만, 에꼬 자신은 그 말을 너무 많이 들어서 지겨워 죽겠단다. 우순경이 대표상품인 의령 사람들이나 여순사건으로 상징되는 여수.순천 사람들 모두 그런 지겨운 질문에 부닥쳤으리라.




최근 밀양에서 사건이 터졌다. 믿어지지 않는 사건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남자가 친구에게 전화를 했는데 전화가 잘못 걸려 여중생이 받았다. 이야기를 하다가 “우리 한번 만나볼까”에 합의를 했는데, 여중생은 거기서 성폭행을 당한다. 소문을 내겠다는 남자의 말에 여중생은 할수없이 자기 언니를 데리고 나가고, 언니와 같이 성폭행을 당한다. 거기서 그친 게 아니라 자기 친구들까지 데리고 나가 단체로 성폭행을 당하기도 했는데, 그런 상습적인 성폭행에 밀양의 3개 고등학교 41명이 연루되었다고 하니 규모가 크기도 하다. 더 웃기는 건 밀양의 고등학교가 그 3개 뿐이라니, ‘밀양 애들이 원래 그래’라고 말한 어느 밀양 사람의 말이 틀린 건 아니다. 생xx 실험실에 근무하는 조교 선생의 고향이 마침 밀양이라, 그녀는 이 사건이 앞으로 밀양을 대표할 상징물이 될까봐 걱정을 한다. 하지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우순경 사건은 단독범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사건이고, 여순사건은 분단의 상처를 상징하는 보기드문 사건이지만, 밀양 사건은 연루자가 많고 황당하긴 해도 그 두 사건에 필적하지 못하며, 신문 1면에 실리지도 못했으니까.




대도시에 살던 사람은 어떤 엽기적인 사건이 일어나도 그걸로 자기 고향이 상징되지 않지만, 조그만 도시의 사람은 그런 일들로 자기 고향이 상징된다. 거창 둔마리에 있는 벽화가 거창을 상징하고, 호두과자가 천안을 상징하는 것처럼, 이왕 기억되는 거니 좀 좋은 이미지로 각인되면 좋으련만, 그게 맘대로 되지 않으니 문제다. 그 조교 선생은 내년 1월 1일, 밀양에서 결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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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마녀 2004-12-08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꼬는 정말 그런 얘기 지겹겠군요. 아직도 사람들이 에꼬에게 그런 농담을 할 지 궁금해집니다. 제가 에꼬라면 한마디 해줄텐데요. 썰렁하다고...

미완성 2004-12-08 1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산사람이라 그러면 꼭 다른 지방 사람들은 매끼마다 회를 챙겨먹는 줄 착각하기도 하더라고요;;;; 험험. 하지만 어떤 때는 그게 그래요. 처음 만난 사람과 너무너무 할 얘기가 없는데, 어디 사냐? 는 질문으로 시작해서 그 지방, 혹은 그 '구', '동' 얘기로 시간을 때울 때가 있지요. 전 그런 시간이 너무 괴로워요. 묻는 입장에서나 답하는 입장에서나..ㅜ_ㅜ 그런 이유때문에 지역 이미지를 억지로 활용하는 경우도 많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로드무비 2004-12-08 1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그 사건이 일어난 곳이 밀양인지 몰랐어요.

충격적이군요.

2004-12-08 15: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부리 2004-12-08 1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사건이 좀 깨죠??

사과님/저도 그런 시간이 괴롭습니다. 언제 우리 그런 얘기나 실컷 해보죠^^

마녀님/그러게요. 왜 성이 '에꼬'여서...제 이름도 좀 특이하다보니 '못사는 사람'이란 소리를 지겹게 들었답니다^^

호랑녀 2004-12-08 1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서슬퍼렇던 5공 시절, 서울로 대학을 왔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잘 지내던 동기가 저를 피합니다. 이유인즉슨, 광주 애들은 다 빨갱이라구... 그녀는 장군의 딸이었습니다.

2004-12-08 19: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LAYLA 2004-12-08 1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제가 사는 곳은 불고기 불고기 ....-0-;; 지역 이미지가 불고기 입니다..흐흐 그래서 고기집이 줄지어 있구요 남학생들 알바로 '불맨'이 가장 많구요 여학생들 알바론 '식당도우미'가 가장 많습니다 . 밀양은 왠지....불량의 이미지가..^^; 똥개도 그랬구요 ㅎ

니르바나 2004-12-08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이런 걸 다 기억하는 분이 있을지 모르지만 '강진 갈갈이사건'이란게 있었지요.

따져보면 의령이나 밀양이나 강진이나 산자수명하여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아름다운 고장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험한 사건을 그 지명과 연관하여 기억하게 하는 것은 그만큼 사람과 땅이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앞으로는 단편소설'큰바위 얼굴'처럼 그 지역의 아름다운 풍속과 자연이 인간과 연결되는 풍토가 마련되었으면 좋겠다는 니르바나의 이야기입니다.

하이드 2004-12-09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정말 대한민국에서 유명세도 탄 흔한 이름에 흔한 성이라서 다들 누구야 사랑해 광고 봤다는 얘기를 몇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해요. 그 전에는 제 주변에도 있는데, 그런 소리 맨날 들었어요. ㅎㅎ

니르바나 2004-12-09 0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맞습니다. 새벽별님

지금이야 살인사건이 비일비재하지만 그 시절만해도 보도통제의 이유에선지

살인사건 자체가 드물었지요. 그래서 더 선정적으로 보도가 되었지요.

참고로 저는 강진을 남도 문화유산답사 일번지로 알고 있습니다.

LAYLA 2004-12-09 0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해보니......유명한 지명이 많지만 가장 무서운건 역시 화성,,,,-┏

sweetrain 2004-12-09 0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하이드님 이름이 선영이시군요`~~!

플라시보 2004-12-09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지하철 방화사건때문에 한참 그 얘기를 들었습니다.

하이드 2004-12-10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칫. 근데, 정말 그때가 언젠데, 아직도 사람들이 그 때 얘기해서 참 깝깝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