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가 사랑한 수식
오가와 요코 지음, 김난주 옮김 / 이레 / 200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제목에 나오는 것처럼 이 책은 수학 박사의 얘기고, 따라서 수학적인 얘기가 조금 나온다. 많이 나왔다면 때려치웠을지도 모르지만, 그렇진 않다. 오히려 여기 나오는 수학 얘기들을 듣고 있으니 다시금 수학을 공부하고픈 욕구가 생기기까지 한다.


사실 난 수학을 못하는 편은 아니었다. 아니, 수학이 전략과목이기까지 했었는데, 막상 학력고사-그땐 수능이 아니라 학력고사였다-에서는 와장창 틀리는 바람에 내 발등을 찍었던 가슴아픈 기억이 있다. 대학에 간 후 우리 과 애들한테 수학 점수를 일일이 물어봤는데, 내가 물어본 스물세명 중 나만큼 못본 애는 하나도 없었다. 시험이 끝난 뒤 내가 수학을 망친 이유가 뭘까를 생각해 봤다. 이유는 한가지, 수학은 암기과목이 아님에도 난 수학을 깡그리 외워버린 것. ‘이 상황에서는 이 공식’이라는 걸 이해하지 않고 외웠고, 문제를 하도 많이 풀다보니 나중에는 문제만 보면 답을 찍을 정도가 되었다. 기존 문제의 형식을 살짝만 변형시킨 학력고사에서 전혀 힘을 쓰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소설에서 박사는 묻는다. 1부터 10까지를 더하면 얼마냐고. 이십여년이 지났지만 내 머리에는 n(n+1)/2라는 공식이 곧바로 떠오른다. 하지만 박사는 1부터 10까지를 하나씩 더한 아이의 노력을 칭찬한 뒤, 이 공식에 이르는 과정을 구슬을 예로 들면서 차분하게 가르쳐 준다. 우리나라 애들이 중고등학교 때는 수학을 잘해도 대학에 가면 못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게 다 나처럼 원리를 이해하기보다는 공식만 암기해서 문제풀이에만 능숙한 귀결이 아니겠는가.


<메멘토>의 주인공처럼 박사는 80분밖에 기억이 지속되지 않는데, 저자는 박사와 박사를 돌보는 파출부, 그리고 그녀의 아이 사이에 싹트는 우정을 잔잔하게 그려낸다. 책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 파출부가 식용유를 사러 나갔다. 그녀는 아이와 박사 둘만 남기고 가는 게 영 불안했는데, 갔다와보니 박사가 피를 흘리는 아이를 안고 있다. 사과를 깍다가 베었다는 거다. ‘역시 맡기는 게 아니었다’고 자책을 하는데, 집에 오니까 아이의 기분이 안좋다.

“아파서 그러니?” “아니” “그럼 왜?” 이 대목에서 난 망측한 상상을 했다. 박사가 변태라서 아이를 강제로....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엄마가 박사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야. 박사님에게 나를 안심하고 맡길 수 있을가 하고 잠시라도 의심한 엄마를 용서할 수 없어서야”

내 상상력은 왜 그런 쪽으로만 발달하는 걸까.


한편의 수채화처럼 아름다운 소설이긴 하지만, 마지막 결말은 좀 밋밋했다. 나를 울게 만들만한 뭔가를 기대했건만, 좀 미흡했다고 할까. 어찌되었건 이 책을 내게 추천해 주신 어느 미녀분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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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yo12 2004-09-12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보는 내내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인가요?
그게 생각났었어요. 그리고 얼마전에 읽었던 몇몇 수학자들의 이야기하구요.
참 차분해서 좋은 느낌이었습니다. ㅋㅋ
그런데 저 일등이죠? ^.~

비로그인 2004-09-12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능으로 바뀌고 난 후, 98년부터 수학이 쉬워지기 시작하면서 저는 꽤나 득을 봤다지요. 오죽 수학을 못했으면 '수학의 아메바'라고 스스로 규정지을 정도였는데,... 정석에 나온 기본 예제 해답을 달달 외우는 무식한 방법이 수능에서 통하더군요. 심지어 시험지에 나와있는 도형을 자로 재서 답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정답이더라는..;;;

마냐 2004-09-12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이 책도 알라딘에서 광풍 불고 있는 바로 그 책이군요....아, 맘만 바쁘네요.

2004-09-12 18: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미완성 2004-09-12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생각하면,
이런 생각도 떠오르고 저런 생각도 떠오르고 마음이 착잡심란합니다.
소재의 특이함을 인정해서 별 넷을 줬었는데, 마태님도 그러시네요.
아무튼 추천이어요! 헤헤ㅡ

마태우스 2004-09-12 1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멍든사과님/어머나 저랑 같은 별넷을! 게다가 추천까지!! 감사합니다.
속삭이신 분/그러게 말입니다. 님도 그러셨다니 얼마나 반가운지 모릅니다.
마냐님/알라딘 비공식 선정 책이지요 하하.
평범한 여대생님/제가 아는분 중에 수학을 외워서 성공한 사람은 '유시민'입니다. 수학 정석을 통째로 외웠다더군요. 님까지 이제 두분입니다.^^
소요님/앗 저는 <모리와 함께..>를 안읽어서요... 님도 전에 이거 리뷰 쓰셨었지요?? 그거 봤습니다.

부리 2004-09-12 1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야, 이건 도저히 추천 못하겠다!! 차라리 날 죽여라!

비로그인 2004-09-12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리님이다! ㅎㅎ

노부후사 2004-09-12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사회통계 분야를 보고 있으면 수학 공부 안 한 걸 후회하고 있죠. 좀 슬퍼요.

호랑녀 2004-09-12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빌려드렸더니 우리학교 처녀선생님, 다시 대학원 가서 수학 전공하겠다고 방방~ 뜨더라는...ㅠㅠ(훌륭한 선생님이라고 판단되는 분이라, 애써 진정시켰습니다)

LAYLA 2004-09-14 0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휴 외워서 하시다니 존경스러워요 ㅠ_ㅠ
저도 수학은 영 .............................-┏ 두렵습니다.
이젠 외어서 되지 않아요 ; _ ;

노바리 2004-09-16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외우는 건 잘 못해요. 원리를 알고 루트를 알아야 자연스럽게 외워지는데...
그래서 수학은 무슨 공식이든 일일히 증명해 보고, 그 공식이 왜 성립되는지 이해를 한 후에라야 다음장으로 넘겼어요. 그래야 자연스럽게 외워지고 써먹을 수 있었으니까. 문제를 푸는 과정도 쭈욱 기록을 해놓고요. 정석 예제의 경우 내 거랑 정석의 풀이과정 대조해 본 다음에 뭐가 다른지, 어디에서 달라지는지 확인하고. 덕분에 다른 사람들보다 시간이 항상 더 걸렸는데, 그래도 재미있었어요. 난이도가 높든 안 높든 성적도 일정했고요. (으흐흐 *잘난척*모드)
수학에서 방정식/부등식이나 함수 같은 건 대단히 철학적이고 심오한 듯 느껴져요. 도형 나오는 기하학은 우주의 비밀을 살짝 알려주는 것같고, 그래서 논리적인 글쓰기로 논쟁할 때엔 1.2.3... 번호를 붙여 단계적으로 사고를 확장해가며 정리글을 쓰곤 하는데, 중간 논쟁정리 잘 한다 소리 듣는 건 그때 수학 공부했던 방식이 알게모르게 꽤 도움을 주어서가 아닐까, 싶어요. 하지만 역시나, 제도권 교육 하에선 이런 맛을 경험하기가 힘들죠. 그렇게 공부하단 도무지 속도를 못 따라잡기 십상이고... 지금도, 과정을 꼼꼼히 살펴가며 공부했던 부분은 생각이 나지만, 나중에 속도따라가기 힘들어 무작정 외웠던 부분들은 하나도 생각이 안 난답니다.

하이드 2004-11-03 15: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결말이 참 맘에 들었는데, 막 눈물 강요하는 책 혹은 감성적이기만 한 책 별로 안 좋아하거든요. 수학하고는 참 안 친했는데, 이 책을 보니 다시 수학 보고 싶어질 정도였어요. 수학, 철학, 과학, 토론 , 미술등의 과목은 제가 이나라에서 공부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성향으로 볼때 참 친할 수도 있었던 과목들인데 말이지요. 전 1부터 10까지 더하는 식을 루트가 얘기했을때 박사의 반응을 보고 울컥 했답니다. 고등학교때 미술 선생님이 저의 작품(?) 을 발로 걷어차며, 국민학생도 이것보다는 낫겠다고 온 반 아이들 앞에서 버럭 하시던 생각도 문득 나고, 그 중년의 미술선생, 아이들 성추행으로 말 많은 선생이였지요. 아무튼. 이 책, 수학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겠지요. 사랑에 대한 배려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