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느낀 게 아니겠지만, 더위가 한풀 꺾였다. 만나는 사람들은 “어디 다녀왔냐”고 묻는다. 이렇다하게 어딜 간 적이 없는 난 “글쎄요, 갔다왔다고 할 수도 없고..”라는 애매한 답변을 살인미소와 함께 내뱉곤 한다. 못갔다고 하지 않고 아리송하게 말하는 것은 한군데도 안갔다온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리라. 그렇긴 해도, 솔직히 난 휴가 때 놀러가는 걸 그다지 즐겨하지 않는다. 왜? 얼핏 떠오르는 이유를 적어본다.
첫째, 사람 많은 게 싫다!
국토에 비해 지나치게 사람이 많은 우리나라, 그들이 다 몰려가는 여름 휴가지는 피서가 아니라 고생길이다. 차는 밀리고, 요금은 바가지에 밥 한끼 먹으려면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던 기억은 나로 하여금 어딘가를 가는 걸 저어하게 만든다.
둘째, 가족이 없으니까
가장들 중 정말 좋아서 피서를 가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궁금하다. 평소 일하느라 스트레스를 받았으니, 집에서 선풍기라도 쐬면서 쉬고 싶기도 할거다. 하지만 휴가만을 기다려온 가족들의 성화에 못이기는 체하고 피서지로 떠나는 게 아닐까? 가족이라고는 너무 바빠 얼굴을 볼 수가 없는 어머님밖에 없는 내가 휴가를 갈 필요가 뭐가 있담? 참, 그러고보니 지난주에 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어머니 동네 친구분을 모시고 미사리에 있는 유명한 음식점에서 한정식을 먹고 왔다. 좀 약한가?
셋째, 휴가의 참뜻은
휴가는 평소 열심히 일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 같은 존재다. 하지만 난 휴가를 떳떳이 갈만큼 열심히 일하지도 않을뿐더러, 평소에도 알아서 잘 논다. 내가 휴가를 간다면 사람들이 속으로 이럴 거다. “아니 그렇게 놀고 또 놀아? 질렸다!” 그걸 잘 아는데다 양심까지 있으니 휴가를 따로 가고 싶지가 않다.
넷째, 사심이 없으니까
위의 세가지 이유에도 불구하고 내가 20대였다면 어디론가 여행을 간다고 스케줄을 짜고 난리가 아니었을거다. 평소 사귀던 여자와 어찌어찌 한번 해보려고, 그게 아니면 찜해 두었던 여인과 확실한 사이가 되보고픈 욕망에서. 너울대는 파도를 보며 모래사장에 앉아있는 두 남녀, 여자가 메마른 목소리로 말한다. “밤 되니까 춥네” 난 가방에서 석달간 안빨은 잠바를 벗어준다. “입어. 그런데 좀 가려울 거야” 여인, “당신이란 사람, 참 자상하네” 나, “뭘 이정도 가지고 그러나. 하하” 여인, “날 어떻게 생각해?” 나, “뭘 어떻게 생각해. 세상에서 제일 이쁜 여인이라고 생각하지” 여인, “어머, 그래? 음....(침묵)....우리 심심한데 뽀뽀나 할까?”
바다는 이런 말도 안되는 시나리오를 가능하게 해주는 곳이다. 젊은 애들이 죽어라고 바다로 가는 건 바다가 주는 이런 힘 때문이다. 그게 아니라면 집에 수돗물 잘 나오는데 뭐하러 그 먼길을 가겠는가. 하지만 사심을 완전히 없앤 나는 그저 집구석에서 조용히 벤지 털이나 쓰다듬고 있을 뿐이다. 털이 잘려 부드러운 맛은 덜하지만 말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올 여름은 조용히 보냈다. 하지만 여름의 끝자락도 놓쳐버린 이번주, 난 전에 말한 부부동반 여행을 2박3일로 간다. 더위가 물러갔으니 사람도 별로 없을테고, 오래 전부터 친했던 친구들이니 집에 있는 것처럼 맘 편하게 다녀올 수 있으리라. 재미있어야 할텐데... 벤지가 집에서 탄압 받을 생각을 하니 마음이 아프다. CCTV를 설치해놓고 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