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사가 귀찮아서 영화보기를 미루다 이번주가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극장을 찾았다. <가문의 영광> 외에는 영화에서 그다지 재미를 못본 김정은이지만, 생각보다 사람이 많아서 안심이었다. 유머를 가장 잘 소화해 내는 그녀의 능력을 십분 발휘한 영화라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절찬리에 방영되는 <파리의 연인> 탓도 없진 않으리라. 어찌되었건 안봤으면 두고두고 후회할 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1) 김정은 vs 오승현
오승현의 프로필을 보니 <킬러들의 수다>에 나왔단다. 그러고보니 신하균의 저격대상으로 나왔던 임산부가 그녀인가보다. 그때보다는 이번 영화에서의 역-인기 절정의 연예인 역-이 훨씬 더 잘 어울렸던 것 같다. 우아하고 몽환적인 매력을 지닌 그녀가 남자를 본격적으로 꼬신다면 흔들리지 않을 남자가 얼마나 될까? 한명 있다. ‘일편단심’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건 나! 오승현이 아무리 우아미를 뽐내도 난 톡톡 튀고 귀여운 김정은이 좋다. 우리나라 배우들 중 다음 대사를 소화해낼 수 있는 여배우가 얼마나 되겠는가?
“그 새끼 후장에다 삽을 꽂아가지고...”
2) 바퀴벌레
오승현이 김상경에게 끌리게 된 멘트,
김상경: 여자들은 보통 바퀴벌레 싫어하지 않나?
오승현: 당연히 싫지요
김상경: 근데 왜 웃으면서 얘기해요?
‘바퀴벌레’를 ‘기생충’으로 바꿔서 작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충을 한 마리 손에 감고 다니면서.
3) 김상경
이 영화에서 그가 참 멋지게 나온다는 건 인정한다. 하지만 그건 외형상으로 그렇다는 거지, 실제로는 아주 나쁜 녀석이었다. 그는 갑자기 다가온 오승현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고, 그로 인해 7년간 사귄 김정은을 아주 힘들게 한다. 근데 영화의 전개는 김상경이 별로 나쁘지 않은 사람으로, 김정은에게 자립심을 키워주는 남자로 진행되고, 근사한 집에서 프로포즈를 하는 마지막 장면은 그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착각마저 들게 해준다. 하지만 그건 아니다. 그는 이쁜 여자의 접근에 헤벌래 좋아가지고 김정은을 홀대하는 나쁜 사람인 것이다.
폭탄주를 마시는데 김상경이 이런다.
김상경: 다영씨(오승현 분) 이런 거 먹을 수 있겠어요?
김정은: 먹을 수 있냐니. 먹은 나는 뭐냐?
이쁘고 우아한 사람은 스테이크나 썰어야 한다는 편견을 드러낸 대사다.
김상경이 김정은한테 “다영씨한테 너무한 거 아니냐”면서 하는 대사.
김상경: 당하는 사람 감정도 생각해 줘야지!
김정은: 그럼 내 감정은?
자기가 오승현을 뿌리치지 못하고 김정은을 힘들게 하는 게 나쁜 짓이라는 대 대한 오리엔테이션이 전혀 없는 말.
김상경은 오히려 김정은을 다그친다.
“니가 7년간 나만 바라보는 거 말고 한 게 뭐있어?... 스스로 당당하길 바래”
이게 다른 여자에게 한눈을 파는 남자가 할 말인가? 영화에서는 김상경이 김정은을 선택하는 걸로 결말이 나지만, 현실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십중팔구는 김상경이 오승현에게 채이고 나서 김정은에게 다시 돌아가는 것으로 끝났을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여자는 남자를 받아주고. 난 그러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사랑은 떠나면 끝이고, 싫다는 사람을 구태여 붙잡을 필요가 없다. 그리고 한번 싫다고 떠나간 사람은 다시 배신하기 마련이다. 김정은은 “당신이 뭐래도 7년 동안 곁에 있던 사람은 나야”라고 말하지만, 사랑이 떠나가는 데 있어서는 연애의 기간이 별 도움이 안된다. 내가 너무 냉소적인가?
김정은은 이런다. “딴 사람한테 그렇게 친절하면서 왜 나한테만 그래?”
이런 사람은 의외로 많다. 나 또한 그런 놈의 하나로, 다른 사람의 평판을 생각해 친절하게 대함으로써 정작 잘해야 할 사람에게 그렇지 못하다. 사실 인간이 쏟을 수 있는 친절이란 한계가 있기 마련인데, 어떻게 모든 사람에게 잘하겠는가. 겉보기엔 좋아 보이지만, 막상 애인이 되면 그런 점 때문에 힘들어한다. 친절한 사람을 조심하자.
4) 친구
김정은은 자기 친구들과 한집에서 같이 사는데, 그렇게 사는 모습이 참 부러웠다. 이기적인 면은 하나도 없으면서 친구의 슬픔을 함께 해 주는 친구들, 그건 영화에서만 가능한 게 아닌지 모르겠다. 같이 살다보면 갈등이 쌓이기 마련이고, 그러다 평생 안보게 된 친구도 있지 않은가. 내게도 “결혼하지 말고 셋이서 같이 살아요”라고 말한 여자 둘이 있지만, 내가 선뜻 그들의 제안에 응하지 않는 것도 그러다 좋은 친구를 잃을까봐서다. 게을러서 이불도 안개고 샤워도 잘 안하는 나와 누가 같이 살고 싶겠는가? 친구는 너무 가까워서는 안되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어찌되었건 정말 재미있게 웃으면서 봤던 영화이며, 이 영화가 관객은 많이 들지 않았을지라도 <불어라 봄바람>의 실패는 충분히 만회한 작품이 아닐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