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은 아니지만"이라고 말을 시작하는 사람은 대개 엄청난 자랑을 해댄다. "비난하는 건 아니지만" "생색내는 건 아니지만" 역시 마찬가지다. 그 말은 그러니까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결코 자랑은 아니지만, 난 배려심이 있는 편이다. 공자에 의하면 그런 마음이 있는 것과 직접 행하는 것은 다른 거라는데, 난 실천도 잘한다^^ 하지만 그게 어려울 때가 있다.

카트에 짐을 싣고가면 평지에서는 편하지만, 계단에서는 쥐약이다. 그때 누군가 한명이 밑을 잡아주면 굉장히 편해지는데, 그래서 난 누가 카트로 짐을 옮기거나 할머니가 무거운 짐을 들고 갈 때면 도와드리는 편이다. 어느날인가 젊은 여자가 겁나게 큰 바퀴가방을 들고 힘겹게 기차역 계단을 오른다. 망설이다가 다가가서 말했다. "제가 들어드릴까요?" 여자는 잠시 날 바라보다가 됐다고 했고, 난 굉장히 무안했다. 마치 내가 작업이라도 건 것처럼 되버렸지 않는가. 그 뒤부터 난 젊은 여자가 아무리 큰 짐을 들고 가도 신경도 안쓴다.

운전을 하던 중 옆에 있는 차가 깜빡이를 켜면, 대개는 악셀레이터를 밟으며 못끼어들게 막는다. 차가 잘 빠질 때야 그럴 수 있지만, 엄청나게 밀려서 한 대가 끼어드는 게 별 영향이 없을 때 그러는 건 도무지 이해가 안간다. 아니, 그럴 땐 정도가 더 심해진다. 늘 안타까웠다. 왜 그렇게 마음의 여유가 없을까. 한번은 택시 앞으로 끼어들었더니 그 인간이 2킬로를 따라오면서 내게 욕을 한다. 급히 끼어든 것도 아닌데, 전조등을 켜고 난리를 치는 걸 보면서 딱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 나만이라도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자. 난 누군가 깜빡이만 켜면 무조건 내 앞으로 끼워 줬다. 뒷차가 왜그러냐고 내게 빵빵거릴 지라도, 이 세상에는 자기 앞으로 끼여드는 걸 즐기는 사람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어느날, 어떤 아주머니가 깜빡이를 켜고 계속 못들어오기에 내 앞으로 끼워 줬다. 그런데 일이 잘못되어 내가 우회전을 할 일이 생겼는데, 마침 그 아주머니가 내 옆에 있다. 난 깜빡이를 켜고 그 차 앞으로 끼어들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그 아주머니는 맹렬한 액셀 소리를 내면서 내 차를 가로막는다. 되로 받고 말로 주다니, 이런 걸 보면 '잘 끼워주기 운동'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싶다.

소풍을 가면 갈 때는 좋지만 올 때는 힘들다. 내가 간 곳은 주로 서오능이였는데, 거기서 올 때면 꽤 오랫동안 찻길을 걸어야 했다. 차가 지나갈 때마다 우리는 "태워줘요!"라고 손을 들었지만, 차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쌩쌩 달렸다. 커서 운전을 하게 되면 이런 경우 꼭 태워줘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내가 차를 갖게 된 이후 그 생각을 실천하려고 노력을 했고, 그런 적이 몇 번 있다. 술에 취한 여학생과 그 수행원들을 집까지 실어다 줬고-중간에 여학생과 수행하던 남자애가 오버이트를 동시에 하는 바람에, 두명의 등을 두드려 주기도...-택시가 파업하던 날 어떤 할아버지를 집까지 태워다 줬다. 날 자가용 영업하는 사람으로 알았는지, 할어버지 옆에 서 있던 아저씨가 내게 "잘 모셔!"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비가 많이 오는 날 조폭처럼 생긴 남자 네명을 화양리까지 태워준 적도 있다. 하지만 세상이 워낙 무서운 곳이라 여자를 태운다는 건 역시 어렵다. 아이를 안고 우산도 없이 택시를 기다리던 아주머니를 태우려 했지만 고개를 저었는데, 젊은 여자였다면 아마 쳐다도 안봤을 것이다. 지금은 택시도 워낙 많아졌고, 택시마다 장사가 안된다고 아우성이니, 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거의 없을 것 같지만.

우리에겐 남을 배려할 여유가 없다는 걸 느낄 때가 많다. 아버님을 휠체어에 싣고 병원에 갈 때면, 우리가 들어갈 수 있게 병원의 유리문을 붙잡아 주는 사람을 찾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럴 때면 우리 사회의 각박함에 치를 떨고, 원래 있던 배려심마저 잃기 십상이다. 하지만 그래선 안된다. 뭔가 아쉬운 게 있었다면 자신이라도 남에게 베푸는 게 우리 사회를 밝게 만드는 지름길이 아니겠는가? 나처럼 말이다^^
(닭살 많이 돋았겠어요. 죄송...맨날 자학만 하다보니, 저 자신을 사랑하기로 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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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eetmagic 2004-06-26 1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갑자기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던 어제 어떤 아저씨의 배려로 집까지 비 한방울 안 맞고 왔습니다. 버스 안에서 아가씨 아가씨....비도 많이 오는데....하실땐 영락없는 ** 같더니 -.-;; 우산 잘 얻어쓰고 오니까 수호천사 같더군요 ^^ 친절한 사람들에 대한 쓸데없는 경계심을 버려야 겠다는 생각했습니다. 그 분 덕분에 " 아...학교에 우산 4개나 있는데 멍청이 ! 깜박이 !! 녹색치매 !!"하는 자학 멘트를 생략할 수 있었거든요 ^^

stella.K 2004-06-26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제일 안되는게 버스에서 가방 받아주는 거예요. 예전엔 그런 일도 곧잘 했는데, 사람들이 안 하니까 저도 자연 안 하게되더라구요.

superfrog 2004-06-26 1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엄청 착하시네요.. 저도 신호등 없는 건널목에서 길건너는 사람, 차선 바꾸는 사람 다 양보합니다.. 대신 먼저가려고 얌체같은 짓하는 사람은 상향등 켜고 빵빵거리며 야단쳐 줍니다..예전에 한번 그러다 앞유리가 스윽 내려지더니 살찐 조폭팔이 툭, 밖으로 나와서 간담이 서늘한 적이 있었어요.. 그래도 열심히 야단쳐 주면서 다니고 있어요..^^

바람꽃 2004-06-26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운전배운지 얼마 안된 저는 옥해대는 사람무서워 오늘도 버스타고 다닌답니다. 살도 빼고 기름값도 아낀다고 자위하면서. 님 같은 분들 많으면 저도 차 갖고 다닐 용기가 날텐데. 그래서 저도 남편과 나갈때는 웬만하면 양보해 주라고 가르칩니다. 마누라 생각하라고.

로렌초의시종 2004-06-26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닭살이 돋은 게 아니라 그동안 막연히 구현해왔던 마태우스님의 이미지에 대한 확신을 얻을 수 있어서 좋았답니다~ 역시 친절하세요~^^

머털이 2004-06-26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려는 다른 사람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제 주변에서 봤을 때 겸손한 사람이 남을 배려할 줄도 알더군요. 겸손과 배려, 타인에 대한 관심... 살면서 계속 잃지 말아야 할 것들입니다.

starrysky 2004-06-26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짝짝짝!! 멋져요~ 특별히 '착한 알라디너 상'을 드리겠어요~ ^-^
마음은 있어도 왠지 실천하기 어려운 게 보통인데 대단하십니다. 존경!

플라시보 2004-06-26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글을 읽으면서 안타까웠던 것은 님의 친절을 젊은 여자들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저 역시 비가 오는날 누가 우산을 씌워준다고 해도, 무거운 짐을 들어준다고 해도, 차를 세워서 어디까지 가냐며 태워주겠다고 해도 남자들이 배푸는 친절에는 고맙지만 사양한다고 말을 합니다. 행여나 이 사람이 나에게 도와주는척 하면서 해코지를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도저히 떨칠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남자보다 힘으로 치면 약한 여자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죠. (거기다 젊다는 것 역시 더욱 나쁜 해코지를 가능케 하는 악조건으로 밖에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도움을 주겠다는 것을 거절하는 것은 상당히 미안한 일이지만 나쁜일이 생기는 것 보다는 차라리 미안하고 만다는 생각을 하죠. 친절을 친절로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이 슬플 따름입니다.

groove 2004-06-26 1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와, 플라시보님말이 정답인것같아요 저도 배려해주겠다는사람도없지만 만약생긴다해도 한번쯤 의심할거같으니까요 흑 슬픈현실!

호랑녀 2004-06-26 1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호의를 베풀다 사고가 나면 호의를 베푼 사람이 다 물어주어야 한다는 얘길 듣고는, 그 다음부터 호의를 베풀지 않게 됩니다.
다른 사람이 호의를 베풀 때도 오히려 불편하더군요.
참... 저라는 인간이... 불쌍하게 되어버렸습니다. ㅠㅠ

마냐 2004-06-27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흑....배려와 호의를 의심과 불신의 눈으로 바라봐야 하는 제가, 그리고 플라시보님이, 정말 모든게 슬픈 시대입니다.

부리 2004-06-28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냐님/님의 배려에 늘 감사드립니다.
호랑녀님/사회가 점점 각박해지는 거죠 뭐.
플라시보님/감사합니다. 님의 격려는 언제나 큰 힘이 됩니다.
그루브님/몇몇 미꾸라지들 때문에 여성에게 배려를 보일 수 없다는 게 안타까워요.
스타리님/감사합니다. 상품은 mp3 선택할래요.
머털이님/사실 제가 좋은 이미지를 보이려고 노력해서 그렇지, 글에 쓴거만큼 좋은 놈은 아니어요. 제 안에는 몇개의 제가 있는 것 같아요.
로렌초의시종님/닭살을 안느끼셨다니 감사드려요. 님은 언제나 절 좋게만 보시는 것 같네요.
바람꽃님/운전할 때 여성에게 더 폭력적인 남자들을 보면 이해가 잘 안가요. 여자가 끼어들었다고 흥분해가지고 그러는 걸 보면 정말 딱해 보이더군요.
금붕어님/와, 님과 저는 알라딘의 착한 어린이들이네요^^ 조폭팔보다 더 무서운 건 조폭발... 썰렁했지요?^^
스윗매직님/안돼요! 님같은 미녀는 늘 조심해야 한답니다. 그땐 운이 좋았던 거에요.
스텔라09님/가방 받아주고 하는 거, 정말 오래된 일이네요. 그때의 추억이 아스란히....

클리오 2004-06-30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이제 마태우스님의 서재에서 부리 님이 답글을 달아주시나요? ^^

마태우스 2004-06-30 1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클리오님/자아가 분열되어 있어서 좋은 점은, 다른 분이 관심을 보이지 않는 글에 저희들끼리 말싸움을 할 수 있다는 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