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취미는 수다다. 독서, 테니스, 알콜도 취미의 일종이지만, 수다야말로 나를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 특성일 것이다. 옛날에는 남자는 과묵해야 한다느니, 침묵은 금이라느니 하는 말들이 이 세계를 지배했지만, 지금이야 어디 그런가. 내 주변에 여자들이 많다면, 그건 아마도 내 화려한 언변 때문일 것이다. 내 스스로 낸 통계에 의하면 남들은 500단어로 하루를 버티는데, 난 무려 2,000단어를 쓴다. '황홀하다' '시나브로' '공수레공수거' 같은 말을 일상 용어로 쓰는 사람이 나 말고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수다맨의 특성은 전화도 많이 건다는 거다. 오죽했으면 휴대폰 회사에서 나한테 "사업하시냐?"고 묻기까지 했겠는가. 전화비? 당근 많이 나온다. 스피드011 최우수고객이 된 것도 열심히 전화질을 한 덕분이다. 기본료만 겨우 내는 사람도 있지만, 내 요금은 언제나 상상을 초월한다. 난 그걸 이렇게 합리화한다. "전화하지 말고 만나서 술이라도 먹어봐. 돈이 훨씬 더들지" 이렇게도 말한다. "전화는 둘간의 관계를 좋게 하는 기구, 인간관계의 개선에 드는 돈은 아까운 게 아니다" 하지만.... 지난달 요금은 해도해도 너무하는 수준이라, 충격을 안받을 수가 없었다. 주위의 권유로 난 일정요금을 내면 무제한 통화가 가능한 전화기를 하나 장만했고, 그 전화를 발신전용으로 쓰고 있다. 본전을 빼기위해 난 말로 할 수 있는 것도 굳이 전화로 하고, 평소 연락을 잘 안했던 가족들, 조카들, 친구들에게 여기저기 전화를 걸고 있다. 누군가가 내게 전화를 하면 이렇게 말한다. "끊어봐! 내가 바로 전화할게!"
내가 이렇게 전화에 집착하는 것은 어쩌면 어린 시절의 경험에서 비롯되었을 수도 있다. 호랑이같이 무서운 아버님 탓에 난 거의 전화를 하지 못했다. 내가 전화기를 들고 있는 걸 볼 때마다 아버지는 "뭔 전화를 그렇게 하냐!"고 화를 내셨다. 아버님이 전화를 하시려고 수화기를 들었는데 내가 전화를 하고 있으면 "끊어라!"라며 소리를 치셨다. 그래서 우리 가족들은 아버님이 계실 때 전화벨이 울리면 공포에 질리곤 했다. '제발 내 전화가 아니기를' 하면서. 전화를 받는 사람은-그나마도 금방 끊어야 했지만-"허구헌날 전화질이야!"라는 아버님의 역성을 온몸으로 맞아야 했으니까. 전화요금을 보실 때마다 화를 내셨던 걸 보면, 아버님은 필경 전화에 대한 안좋은 추억이 있으셨나보다.
나만이 피해자는 아니었다. 나보다 훨씬 전화를 좋아하셨던 어머님이야말로 진정한 피해자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전화를 들고 있는 모습도 보아 넘기지 못했다. 전화를 걸다 걸려서 아버님이 화를 낸 적은 내가 기억하는 것만도 수십번이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3년이 되었다. 어머니와 난 같은 집에 살지만, 서로간의 대화는 별로 없다. 얘기하고 많지만, 서로 바빠서다. 난 주로 술을 먹고 늦게 들어오고, 어쩌다 일찍 들어온 날이면 어머님은 항상 전화를 하고 계신다. 집으로 오는 전화는 전부 어머님 건데, 혼자 집에 있으면 전화벨이 어찌나 많이 울리는지 정신병에 걸릴 지경이다. 밖에서 일이 있어 어머님에게 연락을 할 때면, 집 전화는 언제나 통화중이다 (통화하실 땐 휴대폰은 절대 안받는다). 엄마한테 이랬다. "통화중 대기 하면 안돼?" 어머님의 말씀, "왜 내 기쁨을 뺐으려고 하냐?" 요즘은 나도 전화질을 할 때가 많아져, 늦은 밤이면 서로 전화를 하면서 "잘 왔냐"고 손을 흔들며 인사를 대신한다. 그런 어머님이신데, 하고픈 전화도 제대로 못하면서 어떻게 30년을 버텼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 둘은 그러니까 그간 전화를 못했던 한을 풀고 있는 건 아닐까. 평소에는 어머님이 그러시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만, 배가 아파서 몸을 뒤척이던 어제는, 전화만 하는 어머님이 조금은 야속했다.
* 나랑 전화를 하던 친구와 나눈 대화다(불경스런 말이지만...이해해 주세요).
친구: 니가 지금 이렇게 전화 오래하는 거 알면 아버님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시겠다?
나: 유머는 아닌데, 그럴까봐 화장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