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때 LP 판을 열심히 사던 때가 있었다. 생일 선물로 가장 받고싶은 선물이 LP 판이었을 정도로 LP 모으기에 열심이던 시절, 그때에 비하면 CD를 한 장도 안사는 지금은 가요계를 떠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집에 CD 플레이어가 없는 것도 이유가 되었지만, 가요계가 댄스 위주로 재편되면서 가요계에 흥미를 잃어버렸다는 게 더 큰 이유가 아닐까 싶다. 발라드를 멋드러지게 부르는 가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그렇게 가요계를 떠난 나에게도 피부로 느껴지는 변화가 있으니, 그건 바로 리메이크 앨범의 급증이다. 성시경은 '제주도의 푸른밤'을 담은 앨범으로 불황 속에서도 5만장을 넘겼고, 이수영은 5.5집에서 '광화문 연가'를 부르는 등 유명 가수치고 리메이크를 안부르는 가수가 없을 정도다. 다음은 네이버에서 찾은 리메이크 앨범들이다.
-JK 김동욱의 리메이크 앨범 <메모리스 인 헤븐>도 벌써 2만장이나 팔리는 등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레드 레인(적우·赤雨)의 음반에는 김현식의 ‘기다리겠소’, 이기찬의 ‘널 잊을 수 있게’, 신중현의 ‘미련’을 리메이크해 수록했다.
-스물 세 살 남예지는‘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을 비롯, 5번 ‘그댄 왠지 달라요'를 ....
-서영은은 콘서트를 마친 후 올여름께 리메이크 음반을 선보인다.
이렇게 리메이크 붐이 일어나게 된 이유가 뭘까? 성시경의 말이다.
"이번 앨범은 내 정체성을 찾는 계기가 됐어요. 이제는 대중적 인기에 연연하기보다는 내가 가고 싶은 길을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명곡들이 가지고 있는 ‘뭔가’를 담은, 내 색깔을 더 담은 노래를 해보자는 각오를 다지게 됐어요"
하지만 사람들은 성시경의 이런 숭고한 동기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같지는 않다. 팬들은 말한다. '불황 속에서 이미 검증된 곡으로 위험 부담을 줄이려는 발상'이라고. MBC 음악캠프의 박현호 PD는 이렇게 말한다.
"실력파 가수들이 왜 리메이크 앨범 제작에 열을 올리는지 아세요? 제작사들이 작곡비 등을 줄이고 돈을 적게 투자하며 수익을 올리려고 하니 그런거죠." 그는 이렇게 된 이유를 인터넷을 통해 다운로드를 받는 게 가능해진 풍토로 돌렸다. 하긴 그렇다. 좋아하는 노래들로만 CD를 만들 수 있게 된 지금, 굳이 판을 사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니까 가수들이 리메이크를 하는 건, 불황의 늪에 빠진 가요계에서 먹고살아 보자는 처절한 몸부림일지도 모른다. TV에 나가서 원하지도 않는 개그를 하는 것처럼.
이유야 어쨌든, 난 리메이크에 대해 부정적이다. "지금 가수들의 리메이크에는, 리메이크에 필수적이어야 할 원곡의 재해석이 없어서 그렇다" 라고 말하면 매우 있어 보이겠지만, 불행히도 난 재해석이 뭔지도 잘 모른다. 내가 리메이크를 싫어하는 건 그저 나의 보수성 때문이다. 내가 젊은 시절 좋아했던 노래들을 지금의 가수들이 망쳐놓는다는 기분이랄까. 남예지가 아무리 톡톡튀고 발랄해도 이은하의 카리스마를 능가하지 못할 것 같고, 성시경이 아무리 노래를 잘한다 해도 최성원이 부른 <제주도 푸른밤>의 애절한 감정을 선사하진 못할 것이다. <그댄 왠지 달라요>를 박주연처럼 달콤하게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또 있을까? 공일오비가 다시 부른 <슬픈 인연>에는 나미한테서 느껴지는 끈끈한 슬픔이 없다.
다시 말하지만, 이건 순전히 나의 보수성 때문이다. 조관우가 리메이크한 <꽃밭에서>를 긍정하는 이유가 정훈희의 원곡을 들어본 적이 없어서이듯, 난 언제나 처음 부르는 가수의 노래를 좋아할 뿐이다. <사랑하기 때문에>도 조용필의 버전을 훨씬 더 좋아하듯이. 영화를 보면 언제나 "속편이 더 재미있다"고 말하는 나지만, 가요에 있어서는 이렇듯 보수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