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라딘 덕분에 옛친구를 만났다. 그 반가움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였는데, 알라딘이 없었으면 난 지금 뭘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어젠 주간 서재지수 베스트 30 안에 들었다고 상품권까지 줬으니, 재활이고 뭐고, 앞으로 더 충성해야겠다 (진작 알았다면 더 열심히 썼을 텐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다시 만난 내 친구가 메일을 보내왔다.
[음 많이 바쁘지 않게 보이는데, 제 머리속의 교수님이라고 하면 항상 학문을 위해 정진하고, 하루 24시간이 부족한....머..그런..식이 아닐까란 생각이..^^;]
이 글을 읽고 느끼는 게 많았다. 친구의 말이 전적으로 옳기 때문이다. 다른 교수들은 다들 바쁘게 사는데, 난 뭐란 말인가. 어제 나의 궤적을 보자.
9시 24분, 출근
--10시 40분; 알라딘 서재 방문, 코멘트에 답달기, 다른 분들 글 읽고 코멘트하기
--1시: 알라딘에 글썼다...
1-2시: 애들하고 점심
2시부터--: 알라딘에 글썼다
3시: 논문쓰기 시작, 참고문헌 뒤적임
4시: 술마시러 출발, 청주로...
자, 이게 과연 인간의 삶이란 말인가. 아니다. 이래선 안된다. 그래, 논문을 쓰자. 하지만...내 서재를 찾아주시는 분들을 외면해선 안되는데... 맘 속에서 천사와 악마가 싸우기 시작했다.
악마: 일 해, 일! 2월 말까지 쓰기로 한 논문, 아직도 안썼잖아? 그거 말고도 두편이 더 밀려있고.
천사: 아니야. 서재에 글 쓰고, 남는 시간에 논문을 쓰렴. 시간이 모자라면 술을 먹지마.
악마: 안돼! 술은 계속 마셔야 해. 서재를 포기해!
천사: 서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해! 서재는, 너의 자존심이야! 막말로, 논문이 밥먹여 주냐?
읽는 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논문을 안쓰면 어떤 일이 생기는지 얘기해 보겠다. 내가 이 학교에 온 건 99년인데, 외환위기 직후라서 그런지 교수임용 조건이 좀 내려갔다. 박사학위가 있으면 바로 조교수를 줬지만, 그땐 무조건 전임강사부터 시작을 했고-2000년부터 원래대로 돌아갔으니 나만 억울하다-기간도 2년이 아니라 3년이었다. 게다가 조건이 하나 더 붙었는데, 임용 후 1년이 지난 뒤 연구업적을 심사해 재임용 여부를 결정한다는 거다. 가자마자 무슨 수로 논문 세 개를 쓰겠는가? 논문 때문에 잠을 못이루는 삶이 시작되었다. 실험을 하고 논문을 쓰기에 6개월은 너무 부족했다 (사실은...꼭 그런 것도 아니지만...)
같이 임용된 친구는 "모교에 전화해서 이름 넣어달라고 해"라고 말했지만, 젊은 사람이 벌써부터 그러면 되겠는가? 게다가 난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잘 못하는지라, 어떻게든 되겠지라면서 시간만 죽였다. 어찌어찌해서 논문 2개는 만들었지만, 하나가 모자랐다. 다음 해가 되자 난 초조해졌다. "그래, 담에 더 좋은 논문 써서 은혜를 갚고, 선생님께 찾아가자!"
그렇게 마음을 먹자 모든 걱정이 사라졌다. 그날 밤은 아주 잘 잤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심복에게서 전화가 왔다. 다른 대학에 발령을 받은 내 친구가 전날 학교를 찾아왔단다.
나: 왜 왔데요?
심복: 논문점수 모자란다고, 이름 넣어달래요!
이럴 수가. 내가 먼저 갔어야 했는데... 논문 공장이라고 할만큼 많은 논문을 쓰는 모교지만, 나까지 가서 이름을 넣어 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결국 난 모교에 가지 못했고, 심복을 통해 내가 논문 때문에 괴로워한다는 걸 안 지도교수가 전화를 했을 때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라고 대답을 했다.
옆방 사람에게 찾아가 고민을 털어놓았더니, "에이, 엄살도. 재임용에 논문점수가 안돼서 떨어진 사람은 하나도 없어!"라고 대답한다. 그래, 설마 잘리기야 하겠냐고 맘편히 살았다. 결국 난 같이 임용된 사람들 중 유일하게 "재임용 유예!" 판정을 받고 말았으며, 남보다 오래 전임강사로 남아 있어야 했다.
2년 전, 2차 위기가 왔다. 8월이 재임용 심사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논문점수가 부족했다. 여기저기를 다니며 실험을 하고 그랬지만, 능력이 부족한 내가 여러 편의 논문을 쓴다는 건 벅찬 일이었다. 이번에는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학교를 찾아갔고, 한번만 봐달라고 빌었다. 학교에서는 곧 나갈 논문 두 개에 내 이름을 넣어 주었다. 정말 어이없는 것은, 내가 착각을 했다는 거였다. 내 재임용 심사는 2005년이었는데 2002년으로 잘못 안 것. 너무 미안해서 학교에 말도 못했다. 시간을 번 나는 다시 술을 마시고 놀았다.
멀게만 느껴졌던 2005년이 목전에 다가왔다. 올해부턴 실험을 열심히 하려고 계획도 멋지게 짜 놨지만, 아직 시작도 안하고 있다. 논문이라도 쓰면 좋은데, 하루에 두세줄 쓰면 퇴근시간이다. 3차 위기로 불리는 내년을 내가 과연 무사히 넘길 수 있을까? 내가 알라딘 폐인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가 그 해답이 되지 않을까 싶다. 진우맘님은 일을 못하시겠다고 하고, 앤티크님을 비롯한 몇몇 분들은 재활에 들어갔다. 맨날 술먹고 놀긴 해도, 맘 한구석에서는 잘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웅크리고 있다. 난 주장하련다. 호환, 마마보다 더 무서운 게 바로 알라딘 서재라고. 알라딘 서재를 1급 마약으로 분류해야 한다고 말이다. 그렇게 멋진 서재를 만들어 사람들과 소통하게 해버리면, 정말이지 일은 어떻게 한단 말인가? 2005년까진 앞으로 여덟달, 시간은 계속 간다. 째각째각째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