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차에서 내려 버스를 타러 가는데

앞에 가는 젊은 애가 피우던 담배를 도로에다 확 던진다.

혀를 끌끌 찼다.

저런 애가 커서 뭐가 될까, 저러니 길거리 담배를 뭐라고 그러지, 저런 애들도 자기는 매너있게 담배피운다고 하겠지 등등의 욕을 하면서.

버스에 올라타고 보니 그자가 노약자석에 앉아 있다.

다시 혀를 끌끌 찼다.

하나를 알면 열을 안다더니, 노약자석에 지가 왜 앉아?

근데. 반전이 생겼다.

그 애가 날 보더니 자리를 양보해준다.

미, 미친 거 아냐? 난 아직 그럴 나이가 아닌데.

그런 표정을 지었더니만 그가 내 팔을 가리킨다.

“팔도 아프신데...”

안그래도 오늘 철심을 빼는 수술을 해서 큼지막한 보조기가 내 팔에 붙어 있었다.

그게 안쓰러워 자리를 양보해 준 것.

앉지는 않았지만 그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다.

내가 앉지 않자 그는 뒤이어 탄 여성에게 자리를 양보했는데

나보다 어릴 것 같은 그 여성은 때아닌 자리양보에 당황해 버렸다.

“앉아도 돼요?”란 그녀의 말에 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아는 건 아니다.


2. 무심코 집어든 무료신문에 오늘 실시된 수능문제가 나와있다.

버스 안에 그냥 서있기가 무료해 수능의 언어영역을 풀기 시작했다.

이호철의 <나상> 일부가 지문으로 나와있고

그 아래 객관식 문제가 4개다.

신중하게 답을 체크한 뒤 정답을 맞춰봤다.

이럴 수가. 4문제를 다 틀렸다.

최근 10여년간 그래도 1년에 50-100권 정도의 책을 읽어 왔는데

이게 뭔가?

책을 읽으면 언어영역을 더 잘 풀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내가 이상한 건가?

기분이 상해 수능 문제가 나온 무료신문을 구겨서 버려버렸다.


3. 유전학 강의를 하던 중 내가 학생들한테 한 얘기.

“전 말을 참 못해요. 어려서부터 그랬는데 커서도 그래요.

근데 다른 교수들은 정말 말을 잘하더군요.

회의 때마다 감탄해요.

어쩜 저렇게 별 의미도 없는 말을 저리도 오래 하는 걸까.

20초면 할 말을 5분, 10분씩 하는 분들을 보면 부러워 죽겠어요.“

비꼬는 게 아니라 진짜로 부럽다.

글은 그래도 좀 자신이 있는데, 말할 기회가 생기면 그저 무섭다.

강의로 먹고사는 사람이 이러고 앉았다.

그래도 위안이 되는 건, 날이 갈수록 애드립 실력이 나아진다는 사실.

오늘도 하는 말마다 빵빵 터지는데,

그러다보니 이 학교에 처음 부임했을 때가 생각났다.

웃기려는 생각에 웃긴 말들을 미리 적어놓고 수업 중간중간에 애들한테 해줬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것들은 별 효과를 얻지 못했고,

학생들은 내가 불쌍해 보였는지 격려의 박수를 쳐주기까지 했다.

대신 내가 즉흥적으로 한 말들은 오히려 더 많은 웃음을 몰고왔으니,

역시 상황에 맞는 유머가 가장 웃기는 유머다.

말로 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건 글로 하는 유머인데

그건 글에는 애드립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언젠가는 말과 글 모두에서 웃기는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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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18 22: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1-19 06: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blanca 2010-11-18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글로써 빵빵 벌써 저 몇 번이나 터졌어요. 저도 말을 제대로 하려고 하면 항상 엉키고 고유명사가 떠오르지 않아서 빈티 그득 난답니다. 저기 그게 뭐더라, 그러니까 그 뭐시기 하면서 헤매다 끝나곤 한답니다.^^;; 마태우스님 학생들한테 재미있는 강의로 유명할 것 같은데요...

마태우스 2010-11-19 06:41   좋아요 0 | URL
제가 날이 갈수록 느끼는 게요
내용이 좋으면서 웃겨야 애들이 좋아하더군요
작년 말에야 그걸 깨달았답니다.
그전까진 웃기는 데 주력했다는....
"저기 뭐더라" 이런 말, 저도 해요. 근데 그러니까 나이가 많아 보이더라구요. ^^

세실 2010-11-18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님 말씀 하시는거 참 재미있어요~~~
학생들이 빵빵 터지는건 당연해요.
"어머 세실님~~~" 하는 말투, 아 그립다^*^

마태우스 2010-11-19 06:42   좋아요 0 | URL
저도 "어머 세실님!"이라고 말하던 때가 그리워요!

Mephistopheles 2010-11-18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상한걸요. 글로 빵빵 터져서 몇 번 웃어본 저로써는....

마태우스 2010-11-19 06:43   좋아요 0 | URL
잉 제 글이 빵빵 터진 적이 있나요?
너무 관대하신 메피님께 감사...

Mephistopheles 2010-11-19 10:42   좋아요 0 | URL
아이고..제가 무슨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르 왕도 아닌데..관대하다고 하시다니...ㅋㅋ

울보 2010-11-19 0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오랜만이네요,
아직도 팔에,,
많이 좋아지셨지요,
음 전 마태우스님 글 말솜씨는 들어보지 못했으니 모르겠고,,글을 좋아요,
재미도 있고 ,,
즐거워지기도 하고 행복해지기도 해요,
마태우스님 내년에는 그 재미있는 글 많이 많이 써주실거지요,,,

마태우스 2010-11-19 06:43   좋아요 0 | URL
그리 생각해주심 감사.
틈날 때마다 열심히 하려고 합니다.
올해 하반기는 팔부상 땜시 망했죠 머.

조선인 2010-11-20 0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도 팔이 다 나으려면 더 있어야 하나 봐요. 겨울 되면 더 아프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마태우스 2010-11-19 20:37   좋아요 0 | URL
걱정해주셔서 감사. 하지만 핀도 뺏으니 2주만 더 보조기 차면 된답니다. 엄지손가락이 구부러지지 않는 게 걱정돼요

다락방 2010-11-19 0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주 수요일자 경향신문, 마태우스님의 칼럼을 생각나게 하는 페이퍼네요. 그 칼럼 역시 감탄하며 읽었는데요!

유머는 시기 적절 해야죠. 때와 장소를 가려야 하고. 정말 멋진 칼럼이었어요! :)

마태우스 2010-11-19 20:37   좋아요 0 | URL
부끄럽습니다. 사실 다락방님이 여기 쓰시는 글이 더 예술인데....

BRINY 2010-11-19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요즘 수능언어영역 진짜로 어려워요.
팔 부상 오래 가네요. 조심하세요. 날씨가 추워지먄 15년전에 철심받았던 발목이 시큰거립답니다. 에고고...

마태우스 2010-11-19 20:37   좋아요 0 | URL
위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근데 님도 철심 박았었군요! 에고고....

깐따삐야 2010-11-19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자리를 먼저 양보하고 나중에 꽁초 던지는 것을 보셨으면 다른 글이 나왔을까요? ^^
2. 저도 외국어영역 좀 풀어봐야겠습니다!
3. 암기식 유머로 용쓰는 동료가 있었는데 그래도 뚱하니 앉아서 재미없니, 재미있네, 하는 사람보단 훨 좋았다는. 젊은 아해들 웃기기는 진짜 어려워요. 노력하는 마태님을 본받아야겠어요.

마태우스 2010-11-19 20:39   좋아요 0 | URL
1번에 대해선, 정말 좋은 지적입니다. 아마 그랬다면 다른 글이 나왔겠지요^^ 2. 브리니님이 그러는데 요즘 수능 어렵대요. 3. 뭐든지 노력하는 자세가 좋죠. 제가 원래 주장하는 건 이거였어요. 모든 사람이 다 웃길 필요는 없다, 웃어주는 것만 해도 이 사회를 즐겁게 만든다.

진현근 2010-11-19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아이들 가르치지만 실속 없이 웃기는 사람보다는 뭔가 의미를 남기며 웃기는 사람을 더 좋아하는 것 같더군요. 그런데 선생님이 쓴 글을 읽어보면 무지 웃긴데 그 웃긴게 몇 개월 지나도 기억이 나요. 어찌나 정곡을 찌르며 웃기시는지. 제 아내에게 선생님이 쓴 글 이야기 해주면 빵빵 터집니다. 그래서 선생님을 좋아합니다.

마태우스 2010-11-19 20:50   좋아요 0 | URL
앗 전 사실 실업는 유머 잘하는데^^ 제 글 좋아하신다니 황송한걸요. 암튼 제가 님의 가족에게 웃음을 준다니, 사는 보람이 샘솟습니다^^

무스탕 2010-11-19 2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워지기 전에 맨 손 드러내는거 마무리 지으셔야 하는데 말입니다..
꽤 오랜시간 고생하셨어요. 어여 이쁘게 마무리 되시길.. :)

글구, 마태님의 글은 늘 즐거워요♡

비로그인 2010-11-20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간결하게 할 말을 하시는 재주. 부럽습니다.
저도 수능문제 풀어봐야 겠습니다. 마태님을 원망하지는 않을게요.하핫

sooninara 2010-11-23 0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마태님 글 읽으면서 항상 웃는답니다.
말도 청산유수는 아니지만 잘하시면서 겸손은...^^
수술은 잘 되신거죠? 빨리 철심 빼시고 테니스 치시게 회복되시길...

2010-12-02 01: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을백작 2010-12-30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글을 읽다보니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띄우게 됩니다
마태우스님 글에는 마력이 있는 것 같아요 ㅎㅎ
근데..학생이 버스자리를 양보한 것이...





굳이 팔때문만은 아닐 수도..

..아..아니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