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테니스가 재미없어졌다. 테니스 자체에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는 뜻은 아니다. 테니스가 너무 안돼 파트너에게, 그리고 상대방에게 민폐를 끼치는 게 싫었고, 나 스스로에게도 실망을 하게 됐다는 의미다. 사람들은 내게 말했다.

“레슨을 받아라.”

테니스를 2-3년 치고 말 게 아니라면 레슨을 받는 게 옳다. 더구나 난 “저 사람 혹시 장애인인가?”라는 말을 들을만큼 폼이 엉망인 터였고, 갈수록 못치게 된 것도 그래서였다. 하지만 집 근처에는 레슨을 받을 곳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동물병원에 가다가 전봇대에 매달린 ‘테니스 레슨 수강생 모집’이란 문구를 봤다. 장소도 우리 집과 무척 가까운 곳, 전화를 걸었더니 주 4회고 한달에 19만원이란다. 좀 비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내 안의 악마는 “선수할 것도 아닌데, 그냥 이대로 쳐도 어디가서 대접 받잖아? 그 돈으로 술이나 마셔”라며 날 유혹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중 내 글에 달린 석경님의 댓글을 봤다.

“님이 쓰신 황당한 글(자살을 부추기는 사회) 그게 그렇게 폼납니까. 안습입니다. 노무현의 가치 조차 인정 못하는 우리 사회의 대표 주자시네요..테니스 열심히 치세요. 개그달인님”


이 댓글을 보자마자 깨달았다. 내가 갈 길은 테니스라는 걸. 난 코치에게 전화를 걸어 “내달 1일부터 치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 뒤부터 난 새벽 5시 40분이면 라켓을 들고 코트로 가고, 땀에 젖은 모습으로 돌아와 출근 준비를 한다.


레슨 첫날, 시험삼아 몇 개를 쳐보고 난 뒤 코치가 말했다.

“슬라이스 배워 볼래요?”

위에서 말한 것처럼 내 폼은 정말 엉망이지만, 특히 엉망인 건 백핸드였다. 제대로 배우기도 전에 하산을 한 탓에 어설프게 공을 넘기거나 백핸드로 오는 것도 다리를 빨리 움직여 포핸드로 치곤 했다. 슬라이스는 백핸드로 오는 공을 깎아 침으로써 스핀을 주는 타법인데, 공이 잘 아웃이 안되고 상대가 받기도 까다로워 아마츄어들이 애용한다. 나도 슬라이스를 칠 줄 알면 좋겠다,는 게 내 오랜 숙원이었는데, 코치가 그런 말을 하니 얼마나 기뻤겠는가?


다음날부터 슬라이스 특훈이 시작되었다. 오랜 세월 개폼으로 게임을 해온 탓에 내 나쁜 습관은 쉽사리 고쳐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코치는 내가 칠 때마다 “그렇죠.” “오케이” 같은 말을 할 뿐 별다른 지적을 하지 않았다. ‘뭐야, 내가 잘 치고 있는 거야?’라는 오해가 쌓여 갔다. 하지만 어제 처음으로 내가 친 슬라이스가 네트 위 2센티 높이로 날아가 코트를 뱀처럼 휘감았을 때, 코치의 입에서 이 말이 나왔다.

“나이스!”

그 코치는 “그렇죠”나 “오케이”는 “에이, 그럼 안돼!”를 의미했고, 정말 잘 치면 “나이스”라고 하는 독특한 레슨관을 가지고 있었다. 어제 감을 잡은 난 오늘 코치가 던져주는 대부분의 공을 멋지게 깎아 코트 반대편으로 보냈다. 그 궤적이 어찌나 아름답던지 내가 친 공을 바라보다 넋을 잃을 정도. 이제 난 더 이상 백핸드 쪽으로 오는 공을 무서워하지 않아도 된다. 백핸드로 오는 걸 무리하게 포핸드로 칠 필요도 없어졌다. 마음속으로 되뇌인다. ‘이제 누구든 백핸드로 공을 보내기만 해봐라. 1초에 3번 회전하는 슬라이스로 응수해 주마.’ 이번 일요일날 이 슬라이스를 가지고 첫 실전을 갖는다. 같이 치는 멤버들에게 문자를 보냈다.

“일요일날 아침 슬라이스의 향연이 펼쳐질 예정입니다. 많이 참석해 주십시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기 마련. 멋진 슬라이스의 그림자는 바로 독서였다. 아침 5시 반에 일어나 레슨을 받으니, 기차만 타면 그냥 자게 된다. 지난 2주간, 기차에서 내내 잠만 잤다. 난 기차를 타고 왕복하는 두시간 동안 책을 읽는 게 큰 기쁨이었는데, 2주 동안 3페이지밖에 책을 못읽었다. 그 바람에 저자한테 받은 <예수전>을 아직도 읽지 못했다. 성경에 대한 해석들이 깨달음을 주는, 재미와 유익함이 함께하는 책인데 말이다. 테니스를 위해서 책을 희생하긴 싫은데, 시간이 좀 지나면 아침 레슨에 적응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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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릴레이] 나의 독서론 : 내게 독서란 중단있는 대화다.
    from 풀먹는 사자~ 2009-06-18 00:01 
         1. 독서는 [중단있는 대화]다.  공자는 인생의 삼락을 "배우고 써먹는거, 친구 만나는거, 나 잘난 맛에 사는거"이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찌질거리며 사는 제게 인생에서 재미있는 건 너무나 많습니다. 주식, 도박, 영화, 만화, 음악, 악기연주, 연극, 춤, 인터넷, 스키, 물놀이, 수다떨기, 특히나 미인 감상과 게임은 제 인생에 큰 낙입니다.   이 재
 
 
무해한모리군 2009-06-12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제 경험으론 적응이 안되요 ㅠ.ㅠ
저도 아침에 뜀박질 운동을 하고 출근하곤 했는데, 밤이면 너무 졸려서 평소 3시간은 되던 평일 독서시간이 30분으로 급감 했답니다 흠..

순오기 2009-06-13 08:42   좋아요 0 | URL
맞아요~ 적응 안돼요. 사람은 잠이든 휴식이든 적정량을 유지해야 한다고요.ㅋㅋ

마태우스 2009-06-17 10:38   좋아요 0 | URL
아직도 적응 안되서 헤매고 있습니다. 그래도 예수전은 결국 다읽었다는...!!! 적응이란 어려운 건가봐요

summit 2009-06-12 1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코치님을 만나셨네요^^ 주말의 건승을 기원합니다.

마태우스 2009-06-17 10:38   좋아요 0 | URL
건승을 기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지난 주말엔, 흑, 별로 좋지 못했어요ㅠㅠ

Sati 2009-06-12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례지만, 계신 대학에서는 시국선언에 동참했는지 궁금하네요.

순오기 2009-06-13 08:42   좋아요 0 | URL
이런 재미난 이야기에 시국선언을 운운하는 의미는 뭘까요?
알라딘 일부 서재인들의 일방적으로 몰아부치는 분위기는 흠~

마태우스 2009-06-17 10:37   좋아요 0 | URL
죄송합니다. 전 테니스밖에 모르는 놈입니다

BRINY 2009-06-13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4회 새벽운동이라니, 대단하십니다. 기차에서는 일단 주무십시오.

마태우스 2009-06-17 10:39   좋아요 0 | URL
잉...? 책도 읽어야 하는데... 재밌는 책이 너무도 많단 말이어요

무스탕 2009-06-13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나달이 아프다는 뉴스를 본것 같은데 이 참에 1위를 넘보시려는거죠? ^^

마태우스 2009-06-17 10:39   좋아요 0 | URL
그, 그런 예리한 지적을 해주시다니...^^

soyo12 2009-06-13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아침에 일어나서 뛰는 것을 죽기 보다 싫어하는 지라.^.^
존경스럽네요. 그 바보의 유명한 대사처럼 나쁘기만 한 일은 없습니다.
그분의 댓글이 님께 과감한 결단을 내리게 해주셨네요. ^.~

마태우스 2009-06-17 10:40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세상엔 참 고마운 사람이 많지요. 글구...이상하게 전 아침에 일어나는 건 자신있어요. ^^

레와 2009-06-15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화이팅!!

저도 오늘부터 자전거 탈려구요~ 헤헤..:)

마태우스 2009-06-17 10:39   좋아요 0 | URL
레와님, 올만이어요. 자전거라, 위험하지 않나는 생각이 드네요. 조심하세요!

승주나무 2009-06-20 1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 없음

안녕하세요. 승주나무입니다.
알라딘 서재지기와 네티즌들이 함께 시국선언 의견광고를 하려고 합니다.
알라디너 분들의 많은 참여 바랍니다.
참여의사를 댓글로 밝혀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강요는 아닙니다^^;;

즐찾 서재들을 다니면서 통문(댓글)을 돌리고 있습니다. 난생 처음으로 남기는 스팸성 댓글이지만 어여삐 봐주세요~~~

http://blog.aladdin.co.kr/booknamu/2916466


2009-06-29 13: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7-06 13:0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