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선생, 실험실 좀 비워줘야겠어요.”

올해 큰 연구비를 딴 교수를 우연히 만났는데, 대뜸 한다는 소리가 저랬다. 정신적 충격이 좀 가신 뒤 그에게 물었다.

“왜요?”

“일을 하려는데 공간이 필요해서요.”

이게 무슨 헛소리인가. 세상에 공간이 필요치 않은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럼 저는 어디로 가고요?”

그가 명쾌하게 대답한다.

“글쎄요. 내가 있던 곳을 쓰던가. 근데 거기 다른 기계들이 많아 쓸 공간은 별로 없을 거예요.”




내가 열이 받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나중에 학장님이 “대승적 차원에서 방 좀 옮겨주면 안되냐”고 했을 때 난 “그럴 바엔 그만두겠다”고 맞섰고, 학교 게시판에 들어가 난리를 쳤다.

“돈 많이 받으면 다냐. 나 작년에 논문 여덟편 썼다!”

“연구도 연구지만 먼저 인간이 되라.”

하지만 총장님까지 나서는 바람에, 그리고 학교 측에서 그보다 더 큰 공간을 약속했기에 실험실을 비워줄 수밖에 없었는데, 하도 화가 나서 어제 이런 글을 썼다.

“기초, 그것도 기생충학을 전공한 걸 한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지만, 이럴 때면 임상을 안한 게 조금 후회됩니다. 화끈하게 사표를 내고 다른 병원에 취직이라도 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각종 시약과 기계들로 꽉 찬 내 실험실, 그곳을 가꾸기 위해 내가 얼마나 노력했던가? 아무리 더 큰 방을 준다해도 바꾸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드는 건 당연하다.




내가 살던 터전을 빼앗길 위기에 처할 때, 온몸을 바쳐 저항하는 건 인지상정이다. 용산 지역의 철거민들이 망루에 올라간 것도 같은 이치다. 나야 당장 죽고사는 문제가 아니었지만, 생존권이 걸린 그들 입장에선 죽기살기로 저항하는 것 말고 다른 길이 없었을 것이다. 어제 피디수첩에 나온 유가족의 말이다.

“2억4천을 투자했는데 2천만원밖에 안준대요.”

권리금에 내부시설까지 투자한 돈의 십분의 일만 건질 수 있다면, 망루에 올라가지 않을 사람이 과연 누가 있을까?




하지만 아침마다 배달되는 중앙일보는 철거민들이 돈만 바라는 파렴치범이고, 망루에 올라간 이들이 곳곳을 돌며 폭력시위를 일삼는 데모꾼이라고 한다. 사람 목숨이 여럿 희생되었으면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주면 좋겠건만, 그네들한테 그런 상식을 바라는 것조차 사치스럽게 여겨진다. 그런 신문들에 세뇌된 강남의 한 아주머니는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이런 말을 한다.

“용산 철거민들, 그놈들 아주 나쁜 놈들이더라고. 돈밖에 모르고....”




노무현 때부터 정치와 사회에 관심을 끊고 살려고 하지만, 그런 한심한 소리를 들으면 정말이지 머리띠를 메고 학교 옥상에 올라가고 싶어진다. 언제나 권력의 충실한 시녀인 검찰은 경찰은 무혐의고 철거민들만 죄가 있다고 말한다. 우리 사회엔 과연 희망이 있는 걸까? 있다면 어디에 숨어 있는 걸까? 그놈이 갑자기 보고 싶다. 못견디게.




댓글(23) 먼댓글(0) 좋아요(4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2009-02-04 10: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09-02-04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 놈이 못견디게 보고싶네요.
거침없이 추천 날립니다.

무해한모리군 2009-02-04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께 그런 날벼락 같은일이..
점점 세상이 왜 이모냥인지 모르겠습니다..

Mephistopheles 2009-02-04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태님의 분노가 여기까지 마구마구 느껴져요 희망이전에 상식을 먼저 찾아봐야 할 것 같아요..요즘 세상은 '상식'도 없어요. 그런데 정말 실험실 뺏기는 건가요..??

마태우스 2009-02-04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님/전 괜찮아요. 귀찮아서 그렇지, 더 넓은 곳으로 옮기기로 했어요. 그거야 그리 화낼 일이 아닌데, 요즘 사회는 정말이지 화가 나용. 정말이지 상식도 없어요...
휘모리님/글게 말입니다. 정권 한번 바뀌었을 뿐인데 적응이 안되네요.
다락방님/흠, 글고보니 님이 보고 싶어집니다 그때 데이트했어야 하는데...^^
속삭님/문제는 사람들이 불의를 보고 분노하지 않는다는 것이어요. 분노는커녕 다들 거기 동조하는 분위기...그래도 87 때는 몸으로 뛰진 않아도 뭐가 옳은지에 대해선 알고 있었잖아요. 언론이 하는 말은 다 거짓말인 걸 알고 있었던 그때와 지금은 많이 다른 것 같아요

2009-02-04 12: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늘빵 2009-02-04 1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_- 어찌되었든 사람이 죽어나갔는데, 맨 위에 있는 사람들이 지들이 잘못한 탓이지 내가 뭘 잘못했냐, 는 식으로 나오니 환장하겠습니다. 항상 "왜"라는 질문을 가지고, 원인을 분석해야 하는데, 원인은 없고 현상만 가지고 판단을 하죠. 철거민 사태 뿐 아니라 주변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그래요.

2009-02-04 12: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9-02-04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디까지나 제 생각인데 말이지요, 강호순의 뉴스를 이렇게 가열차게 방영하는 것은 용산 철거민들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사그라들게 하는 것이 아닐까요? 책을 내려고 했다는 뉴스까지 내보낼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일까, 차라리 유족들에게 어떻게 국가가 대응하는지를 취재하는 편이 더욱 진정한 뉴스 답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했거든요.

전 대승적 차원에서--라는 말이 더 화가 납니다. 대승적 차원은 무슨 대승적 차원, 결국은 방 빼란 말인데 저렇게 포장을 하는 건 또 뭡니까. 화가 나는 것이 당연해요.

마노아 2009-02-04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식은 없고 상처와 상말만 있는 대한민국이에요. 화나고 겁나고 진저리가 쳐집니다...ㅜ.ㅜ

myjay 2009-02-04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좋은 글입니다.
퍼갈게요.^^

레와 2009-02-04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요.
정말 정치적인 인간이 아니였는데 말입니다.

뉴스는 꼴도 보기 싫어요.=.=

혜덕화 2009-02-04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읽은 우석훈님의 "직선들의 대한민국"이 생각납니다.
연구비 많이 타신 그 분도 너무 직선으로만 달려와서 옆에 누가 있는지 안보이나 봐요.
짧은 시기에 이룬 고도성장의 그늘이라고 보기엔, 한숨 나오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paviana 2009-02-04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효 뉴스는 맨날 그렇지요.

호주오픈 거의 마지막 세트밖에 못봤는데 나달이 잘하긴 하더라고요.페더러가 이래도 칠래 하고 보내는 공들을 다 걷어내는 걸 보고 놀랐어요.근데 시상식에서 페더러가 막 울면서 내년에 다시 오겠다는 말을 한 순간 맘이 아팠어요. 백호주의 때문인가 아님 패자에 대한 위로인지 페더러때 사람들이 나달보다 더 박수를 많이 치더군요.

2009-02-04 17: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09-02-04 1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말문이 콱 닫히게 하는 나라~~ 것들!

깐따삐야 2009-02-04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신들의 천국이 어딘가 있는가 봅니다. 당신들만 즐쳐드시는 세상이요.

BRINY 2009-02-05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돈밖에 모르는 건 과연 누굴까요...

마태우스 2009-02-05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브리니님/호홋 제말이요
깐따삐야님/글게 말입니다. 하여간 나쁜 놈들이 그저 평범하게 살려는 사람을 나쁜 놈이라 몰아부치는 형국이랄까요
순오기님/그놈이 그놈이다 해도 정권이 바뀌니까 세상이 확 달라진 느낌이네요
속삭님/제가 언제 전화로 말씀드릴께요
파비님/흠, 마지막 세트밖에 못보셨다구요 페더러 그래도 명승부 펼쳤어요. 글구 사람들이 페더러한테 박수친 거랑 백호주의를 연결짓는 건, 흐음...
혜덕화님/그러게 말입니다. 직선들의 대한민국, 안읽었는데 함 읽어볼래용
앗 구두님/언제 한번 뵈야죠!
레와님/글게 말이어요. 이 정권이 사람을 정치적으로 만든다니깐요
블랙커피님/제가 겪은 일에 비하면 용산 사건은 정말... 100배는 더 화가 나는 일이어요. 나라 꼴이 어찌 되려는지..
myjay님/어...조, 좋은 글인가요? 감사드립니다만, 좋은 글을 더 안쓰는 세상이 오면 좋겠는데
마노아님/그죠? 1년 사이에 참 많은 것이 바뀌었어요. 전 노무현 때도 참 나쁜 세상이네 했는데...
hnine님/뭐, 저도 실험실을 놀린다던가, 연구실적이 부진해서 빼앗긴다면 그리 저항하진 않았을지 몰라요. 하지만 2008년은 제가 가장 열심히 연구한 해라서... 공간 문제는 참 예민한 사안이어요. 근데 그 사람들이 너무 예의가 없었던 게 제가 화가 난 점이어요. 저도 돈 많이 따와서 방 내놓으라고 하고 싶더라구요...
아프님/그러게요. 왜 그랬는지에 대해선 별반 관심이 없구, 모든 저항은 다 폭력시위로 몰고, 진짜 나쁜 놈들이어요
속삭님/그래도 세상을 좀 안다고 생각했는데, 전 아직 멀었나봐요. 님 말씀대로 희망을 믿는 건 순진한 건가봐요. 요즘엔 유난히 절망이 넘쳐나네요...

새초롬너구리 2009-02-06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파이더맨에도 나오는 상식인데, "좀 더 큰 힘에는 더 많은 책임감이 든다는거" 당연히 국민을 보호하는게 가장 기본인 것을. 경제가 힘들다고 좀 양보하지 그래! 하면서 모든 걸 결과론적으로 몰아가며 과정을 무시하는게. 글쎄 한사람이 바뀌었다고 완전히 이렇게 바뀐다면 우리나라의 대통령제는 뭐가 잘못되가는거 같아요. 그나저나 방을 바꾸면 에어콘도 바꿔야 하는데, 그거 재설치하는 돈도 마음약한 님이 내셨겠네요.

L.SHIN 2009-02-07 0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남 아주머니, 그런 욕은 당신이 들어야 하는거 아닌가? ㅡ.,ㅡ^

폭설 2009-02-07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읽었습니다.^^
언제나 제치있고 재미있고 거기다 감동까지 주는 마태우스님!

'아침마다 배달되는 중앙일보' 가 마음에 걸리는 군요. 돈내고 보시나요?
눈 버리니 매일은 보지 마시기를.... 전 가끔 은행같은데서 이것들이 요새
뭐라고 지껄이나 하면서 한번씩 훑어보는데 아조 심장이 불끈불끈~~ 도대체 이것들은
뇌가 있는지... 내몽골 황사가 따로없지요. 콜록콜록~~^^

마태우스 2009-02-10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폭설님/그것 때문에 아내와 몇번 다투었지요. 돈은 아내가 냅니다만, 제가 여러번 문제점을 지적하니 구독기간만 지나면 끊겠다고 하네요. 근데 정말이지 볼 때마다 가관이더군요.
Lshin님/글게 말입니다..
너구리님/어머나 미모의 너구리님이닷! 방가방가!! 에어콘도 바꿔야 하고, 이것저것 돈이 좀 들겠지요. 할수없죠 뭐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