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천국의 아이들>은 동생과 운동화 한컬레를 나눠신어야 하는 알리가 운동화를 갖기 위해 달리기 시합에 나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오전반인 동생이 학교에 다녀오면 알리는 그 운동화를 신고 학교까지 전력질주를 한다. 그러던 알리는 달리기 대회의 3등 상품이 운동화라는 걸 알게 되고, 3등을 해서 운동화를 타다 주겠다고 동생과 약속한다. 1등으로 달리던 알리는 3등을 하기 위해 뒤에 오던 두명을 먼저 보내기까지 하는데, 혹시 영화를 보실 분이 있을까 봐 그가 운동화를 탔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집에 세제가 떨어졌다. 이건 설거지 때 세제를 많이 쓰는 편인 내 탓인데, 총무로부터 이번달 테니스 대회의 3등 상품이 트리오라는 걸 알았을 때, 내 마음은 갑자기 3등에 대한 욕심으로 이글거렸다.

"그래, 2등 할 거 같으면 마지막 경기에서 일부러 져가지고 3등을 하는 거야!"

난 아내에게 꼭 트리오를 타가겠다고 호언장담했는데, 아내로부터 "자기야, 테니스 잘 치고 꼭 트리오 타와"란 문자를 받았을 때 난 이미 2패를 당해 우승권에서 멀어진 상태였다. 그날따라 이상하게 특유의 강스트로크가 터지지 않았고, 평소답지 않게 실수가 잦았다(전날 술을 많이 먹어서일까?). 다행히 오후 들어 컨디션을 회복해 평소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했지만, 한경기를 남기고 우리 팀은 1승4패로 최하위를 걱정해야 할 처지였다. 난 3등이 유력시되는 팀의 선수에게 다가갔다.

"형님, 형님은 트리오 같은 데 관심이 없으시죠? 저희 집에 이러이러한 사정이 있어서 그러는데 혹시 3등 하시게 되면 상품 저 주시면 안 돼요?"

사람 좋은 형님은 호탕하게 웃으면서 얼마든지 가져가라고 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마지막 경기가 그 형님과의 대결이었고, 우리 팀은 시종 팽팽한 경기를 펼쳤다. "이 팀 쯤이야"는 마음으로 임했던 그 형님으로서는 당황할 수밖에. 그렇게 4대 4가 되었을 때 난 네트 쪽으로 다가가 형님에게 말했다.

"이번 경기, 저희가 이기더라도 트리오 주셔야 해요."

형님은 역시 호탕하게 웃으며 그러마고 대답했는데, 그 뒤 사태가 좀 안좋은 방향으로 흐른 게 내가 날린 스매싱을 받던 형님이 안그래도 안좋았던 팔에 탈이 나버린 것. 결국 타이브레이크 4-0으로 우리가 앞서던 상황에서 형님은 기권을 하고 말았는데, 그 경기에서 짐으로써 그 팀은 간신히 3등에 턱걸이했다. 그런 지경이 되면 대부분은 "트리오 준다던 말 취소야!"라고 할 만도 하지만, 형님은 내게 3등 레떼르가 붙어 있는 트리오를 줌으로써 날 감동시켰다.


저녁을 먹고 맥주와 더불어 수다를 떨다가 집에 들어갔더니 아내가 묻는다.

"오늘 몇 등 했어?"

난 아무 말 없이 3등 레떼르가 붙은 트리오를 꺼냈고, 내가 정말로 트리오를 타온 것에 감동한 아내는 날 껴안으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 자기는 테니스도 잘 치지요."

그런 아내를 보면서 생각했다. '트리오 사가는 대신 달라고 하길 잘했어. 산 트리오에는 3등 레떼르가 없잖아.'

요즘 나는 3등 레떼르가 붙은 '쌀뜨물 안심설거지'로 설거지를 한다. 그리고 아내는, 아직도 그날 내가 5등 한 걸 모른다.


댓글(15)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순오기 2008-03-23 0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호호~ 마태님은 역시 사랑받는 남편 컨셉에 어울리십니다!^^
날마다 '쌀뜨물 안심설거지' 세제를 너무 팍팍~ 쓰지는 마셔용, 환경은 설거지부터... ^^

조선인 2008-03-23 0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하핫 그래서 아내에게 알라딘이 비밀인 거군요?

무스탕 2008-03-23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님. 정말 사랑스러우신 신랑님이세요 ^^

Mephistopheles 2008-03-23 12:03   좋아요 0 | URL
저 신혼 아닌데요?? -애 딸린 유부남이며 테니스는 잘 모르는 메피스토가-

무스탕 2008-03-23 18:19   좋아요 0 | URL
푸하핫- 메피님은 한 분으로 족한데 어이하여 마태님이 메피님이 되신건지.. ^^;;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 알아주시니 감사할 뿐입니요 :)

Mephistopheles 2008-03-23 1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야클님의 닭살시대는 지고 새로운 마태님의 닭살시대가 등극했습니다.

커피우유 2008-03-23 1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알라딘 서재 메인에 뜬 제목만 보고도 전 마태님 글인줄 알았어여. 여전한 유머와 센스..^0^
설거지하실땐 되도록 고무장갑 꼭 끼시고(주부습진 조심!)
항상 행복가득한 가정 되시길...^^

웽스북스 2008-03-23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소가 절로 흐흐흐 지어져요, 아웅 귀여우셔라 ㅋㅋㅋ

마태우스 2008-03-23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웬디양님/부끄럽습니다 열시미 하겠습니다 꾸벅
커피우유님/근데요 설거지할 때 장갑 끼면 헹구는 게 좀 어려워요. 그래서 교대로 한짝씩 끼려고 하는데, 대부분은 귀찮아서 맨손으로 합니다. 절묘하게 주부습진에 안걸리고 있다는...
메피님/어... 이거 감동적이지 않나요?^^
무스탕님/호호 저 마태인데요 메피님보단 조금 덜 귀엽지만 테니스는 제가 더 잘친답니다
조선인님/헤헤 그렇습니다^^
순오기님/그러게 말입니다 남자들 설거지의 가장 큰 문제점이 세제를 많이 쓴다는 거잖습니까 전 안그러려고 하는데 거품이 많이 나야 하면서 뿌듯하거든요..

다락방 2008-03-23 1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고야. 유부남 마태우스님의 글도 이토록 좋군요. 여전히 저는 마태우스님의 팬이어요. 흣 :)

호랑녀 2008-03-24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싸모님은 얼마나 행복하실까요?
저는 쌀뜨물안심설거지 얼마든지 사 놓을 수도 있는데...
옆지기는 포기하고, 애들이나 빨리 키워야겠어요.

L.SHIN 2008-03-24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에~ 재밌고 멋진 글 (>_<)
아, 오랜만에 테니스 이야기가 나와서 잠깐 콩닥콩닥 했습니다.(웃음)

세실 2008-03-25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호호 유부남이 되고 나니 더 가까워진 느낌^*^
글에 일상의 애환이 묻어 난다고나 할까~~ 하여간 마태님은 영원한 귀염둥이^*^

마태우스 2008-03-30 0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실님/부끄럽습니다 꾸벅. 뭐 이정도면 애환까진 아니죠^^
Lud-S님/안녕하세요 칭찬 감사! 님도 테니스 좋아하시나봐요? 요즘 비가 와서 테니스 못치는데, 낼도 못칠 것 같아 속상합니다.
호랑녀님/제가 맘 안변하고 열심히 잘할 수 있도록 도와주삼!
다락방님/호홋 감사합니다 몇 안남은 제 팬이니 정말 잘해야겠어요.

sweetmagic 2008-04-02 0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헤... 마태님 글 보니 넘 좋아요...
아.. 이제야 좀 살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