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도 말한 적 있지만 최소한 서울에서만큼은 소위 작은 영화들이 자리를 잡은 것 같다. ‘시네 큐브’ 같은 곳을 가면 관객 점유율이 장난이 아니고, 한 극장에서만 하면서도 7만의 관객을 모은 영화도 있단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을 보면서 내가 뿌듯했던 건 극장을 가득 메운 관객들이었다. 작은 영화를 본다는 것에 유독 자부심을 갖는 나, 옆자리 미녀가 영화 상영 중 휴대폰을 받으려고 하기에 이렇게 말했다.
“그럼 안돼. 이 관객들은 말야, 수준 있는 사람들이라고.”

시네21에서 <마츠코>에 대한 평을 읽으면서 볼까 말까를 잠시 망설였다. 이유인즉슨 영화가 너무 처연할 것 같아서다. 착하게 살지만 남자들에게 번번이 이용만 당하는 여자의 삶이란 얼마나 가슴 아플까. 시종 분노하고, “저 나쁜 놈!” 이러면서 욕도 좀 하고, 난 이런 영화를 상상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이 영화, 진짜 웃긴다. 영화 전편에 깔린 기조는 분명 처연함이었지만, 곳곳에 설치된 웃음 장치 때문에 2시간 10분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예컨대 이 장면. 마츠코는 돈을 훔쳤다는 혐의로 주임 선생에게 불려간다.
마츠코: 정말 죄송합니다.
선생: 말로만 죄송할 게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 줘요!
마츠코: 네?
선생: 정말 미안하면 가슴을 보여주세요.
그러자 옷을 위로 올려 가슴을 보여주는 마츠코, 정말 황당하지 않는가. 영화를 보고 나서도 오랫동안 난 그녀의 매력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마츠코가 두려워했던 건 외로움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아무리 나쁜 놈일지라도 누군가가 자기 옆에 있기만 해주면 만족했다. 그 결과는 ‘혐오’까지는 아닐지라도 가엾디 가엾은 삶이었다. 이용해 먹으려는 남자들과 있으면서 마츠코가 행복감을 느낀 적이 과연 얼마나 됐을까. 내 지론을 얘기하자면, 외로움은 스스로 극복하는 것이지 다른 이가 옆에 있다고 해결되는 건 아니다. 그리고 진정한 외로움은 자신과 전혀 소통되지 않는 이와 같이 있을 때 찾아온다. 외로움을 이기는 법을 알지 못했던 마츠코, 불행은 거기서부터 싹튼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