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극도로 피곤했던 어느날, 내키지 않았지만 택시를 탔다. 잠깐 동안 눈을 붙이려고 의자에 머리를 기댔다. 그런데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라디오에서 계속 주옥같은-다시 말하면 내가 좋아했던-노래가 나오는 까닭이었다.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혹시...주파수가 몇인가요?”

“93.9예요. 여기서 좋은 노래 많이 틀어줘요.”

좋은 노래도 좋은 노래지만, DJ가 끼어드는 일이 없이 연속으로 노래를 틀어주는 게 마음에 들었다. 집에서 라디오를 듣는 일이 없어졌지만, 가끔씩 운전을 할 때마다 난 주파수를 93.9로 고정해 놨다. 이렇게 좋은 채널을 내가 왜 몰랐을까 후회하면서.


차를 몰고 집에 오던 오늘밤, 93.9는 역시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부활의 ‘사랑할수록’이 나오고, 성시경의 이름모를, 하지만 좋은 노래가 이어지더니만, 신해철이 부른 ‘인형의 기사’가 나온다. ‘햇살 속에서 눈부시게 웃던 그녀의 어린 모습을 전 아직 기억합니다. 그녀는 나의 작은 공주님이었지요.’로 시작되는, 주옥이란 표현이 부족하다 싶은 멋진 노래. 여자와 잘 안될 때가 많았던 탓에 ‘너의 결혼식’같은 비탄조의 노래를 즐겨 불렀었는데, 90년대를 통틀어 가장 좋아했던 노래가 바로 ‘인형의 기사’다. 노래도 어렵고 가창력도 부족해 노래방에서 부르면 점수가 그다지 잘 나오진 않았고 소음공해마저 유발했었지만, 그때 얼마나 열심히 불렀었는지 10년도 훨씬 더 지난 지금까지도 난 이 노래의 가사를 거의 완벽하게 외우고 있었다.


“(이제는) 너는 아름다운 여인/(이렇게) 내 마음을 아프게 해/

(언제나) 그말은 하지 못했지/오래 전부터 사랑해 왔다고


‘주파’라는 네티즌은 “14년 전의 우리 대중음악에서 이런 곡을 들을 수 있었다는 건 실로 획기적이라 할 만하다”라고 쓴 바 있는데, 신해철같이 뮤지션으로서의 자의식을 가진 가수들이 우리의 정서를 풍부하게 해줬던 그 시절이 대중음악의 전성기가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요즘이라고 자의식을 가진 가수가 없는 게 아닐 테고, 우리 음악도 그때보다 많이 발전했겠지만, 시간이 지나도 내 안테나는 젊은 시절에 들었던 노래만을 향해 있다(나같은 사람이 많아서인지 요즘엔 좀 뜬다 싶은 노래는 죄다 리메이크다).


서태지와 아이들을 좋아했던 팬들도 벌써 서른줄에 접어들었고, HOT 팬들은 20대 중반이다. 그리고 지금 아이들은 동방신기나 더블S 501 같은 그룹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행복>이란 노래를 즐겨 부르긴 했지만, 내가 HOT란 그룹을 좋아했던 적은 없다. 그때부터 난 아마 이문세 때가 좋았다고 주문을 외우고 있었을 것이다. 이게 궁금해진다. HOT 팬들도 동방신기의 노래를 들으며 머리를 절래절래 흔들고, 내가 그러는 것처럼 “HOT 때가 좋았지”라는 주문을 외고 있을까. 주위에 HOT 팬이 없는지라 확인할 길은 없지만, 아마도 그럴 확률이 높다. 음악은 감수성이 예민한 특정 연령대에 더 필요한 것이고, 사람이란 그 시기에 들은 노래를 평생 그리워하도록 세팅된 존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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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26 01: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루(春) 2007-03-26 0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활의 '사랑할수록, 넥스트의 '인형의 기사' 이런 노래를 좋아하시는 걸 보니.. 호호~ 반갑습니다.

다락방 2007-03-26 0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넥스트의 인형의 기사는 정말 명곡이죠. 보석같은 곡이예요. 아주 가끔 라디오에서 그 노래가 나오면 가슴이 아릿해져요. 아, 오늘 마태우스님의 이 페이퍼를 읽노라니 인형의 기사 노래가 절로 떠오르네요. 아, 좋아요.

마늘빵 2007-03-26 0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 넥스트 팬이에요. 이 노래 참 많이 불렀었는데.

비로그인 2007-03-26 0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브릿팝,이나 독일에서 나오는 노래들을 잘 듣는데, 요상모상한 것이 그네들 음악은 제가 10년전 들었던 노래 이후, 요즘에도 들을만한 음악들이 종종 나오고 있는데, 한국으로 눈을 돌려보면 처참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요즘에는 음반을 내지 않고 뭐하고 있는지 모를 윤상 무리들을 생각해 보면 그래도 들을만한 게 딱히 없지는 않다, 라는 생각이 들면서 묘하게 슬퍼집니다. 이승환만 하더라도 한국에서는 이제 음악을 계속할 만한 판매고가 부진하다는 말이 나올 지경이니까요. 이리 쓰고 나니, 저도 좀 나이가 든 사람이 되어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2007-03-26 13: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moonnight 2007-03-26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끔 예전에 좋아했던 노래를 라디오에서(반드시 라디오여야 하죠! ^^ ) 우연히 듣게 되면 마음이 아릿하다고 해야 할까. 좌우지간 그렇더라구요. 인형의 기사. 줄창 들었던 시절이 있었지요. 홍홍 ^^

깐따삐야 2007-03-26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오락프로그램에 나오는 신해철의 모습은 별로지만 예전엔 '날아라 병아리' 같은 노래를 좋아하기도 했어요. 학창시절에는 015B와 푸른하늘의 노래들을 즐겨 들었는데 마태우스님 말씀처럼 세팅이 그리 되어선지는 몰라도, 요즘 쏟아져 나오는 신곡들을 아무리 들어봐도 역시 그만한 노래가 없지 않나 싶습니다.

조선인 2007-03-26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등학교, 중학교 때 좋아하는 음악이 평생 가나봐요.

클리오 2007-03-26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형의 기사...를 포함한 그 테이프 전체를 참 좋아했었어요... 신해철이 인형의 기사를 부르는걸 듣고 있으면 정말, 햇살 속에서 눈부시고 웃고 있는 그녀,가 떠오르곤 했지요... ^^

무스탕 2007-03-26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삘이 꽂힌 노래는 하루종일 입안에서 흥얼거려진다지요..
근데여.. 어제도 잠깐 음악프로를 봤지만 도대체 요즘 노래는 정말 모르겠어요 -_-;;

해적오리 2007-03-26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활의 '사랑할수록'...
갑자기 그 때 그 시절이 생각나네요...쩝...

마태우스 2007-03-27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적님/전 그시절보다 지금이 훨 좋은데...해적님도 만날 수 있구요^^
무스탕님/요즘 노래도 열심히 들으면 좋은 게 있을 거예요 까만안경도 참 좋지 않아요? 우리가 무관심할 뿐이죠^^ 마태생각.
클리오님/오오 멋진 표현이십니다. 도시인을 비롯한 그 테이프, 정말 명곡들의 터전이었죠..
속삭이신 ㄹ님/나이든 사람은 미래보단 항상 과거를 생각한다지요. 저도 거기서 자유로울 수 없네요 신촌에서 예전에 먹던 불량식품을 파는 걸 보니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더이다^^
조선인님/제말이 그말이어요 글구 지금은 댄스가 주라, 발라드의 아름다움이 많이 사라지기도 했을 거예요..
깐따삐야님/저도 신해철이 뱀파이어 시트콤에 나오는 게 슬펐어요 귀공자인 그가 먹고 살려니 저런 일도 하는구나 싶어서요....
달밤님/같은 노래를 듣고 자랐는데 왜 우린 영화 코드가 안맞는 걸까요 ㅠㅠ
속삭이신 분/글쎄요 어떤 노래를 좋아한다는 게 창피한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저도 젊을 땐 트로트를 좋아하는 나이든 사람들을 속으로 비웃었는데, 지금은 반성해요 다 그 시대마다 시대정신을 관통하는 노래가 있는 법이구, 그땐 핫이 그걸 구현한 그룹이었겠죠
주드님/윤상무리라니 너무 멋진 표현인걸요^^ 주드님처럼 20대 한창이신 분도 나이듦을 느끼는군요 저도 그 시절 그랬는지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지금 느끼는 나이듦과 주드님의 나이듦은 또 다른 느낌이겠지요..
아프락님/님도 넥스트 팬이시군요 으음. 그땐 님이 십대 때였죠 아마?
다락방님/님의 댓글을 보니 마음이 아릿해지는군요^^ 우린 같은 노래를 좋아했군요!
하루님/인형의 기사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동호회 만들까요^^
속삭님/님 서재에 댓글 남겼어요

root 2007-03-27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90년대에는 음악하는 사람들이 음반기획자들을 잡아먹었는데....언제 다시 올 수 있을까요?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대접받는 시대가????

하루(春) 2007-03-27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들어요!!

마늘빵 2007-03-28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도 제 애창곡은 신승훈, 윤상, 신해철, 김동률 그렇습니다요.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