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12월 14일(목)
누구와: 친한 친구와
“오늘 안만나면 안되겠니?”
술약속을 변경하는 일이 거의 없는 나, 전날 너무나도 많이 마신 탓인지 도저히 술마실 용기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올해가 가기 전 꼭 만나야 하는 친구였고, 빡빡한 스케쥴을 보고 있자니 다시 일정을 잡기도 힘들 것 같다.
“그래, 오늘 보자. 타이레놀 좀 먹고 가면 되지 뭐.”
그를 만나러 서울로 가는 기차 안에서 <시네 21>을 탐독하다가 <비상>이라는 영화에 필이 꽂혔다. 꼴찌팀이 준우승을 하는 다큐멘터리라, 이렇게 만화에서나 나오는 일이 작년에 우리 축구판에서 실제로 벌어졌다고? 잠시 눈을 감고 작년을 회상한다. 축구에 관심이 거의 없지만, 옛날에 공부하던 가락이 있어서 기본적인 상황은 다 알고 있다. 작년엔, 내가 응원하는 울산 현대가 우승했었다. 결승 1차전에서 5-1로 이길 때, 집에서 한 십분 가량 TV로 본 기억도 난다. 상대가 누구였는지는 몰랐지만, 그게 이 영화의 주인공인 인천 유나이티드란다. 갑자기 이 영화가 보고 싶어 죽겠다. 그래, 술만 마시기보단 영화 보는 것도 괜찮지 뭐. 그 친구도 축구 좋아하잖아?
“너 나랑 영화 같이 봐주면 안되니?”
해물뼈찜을 뜯다가 친구에게 부탁을 했다. 하지만 막상 영화가 시작되고 나자 넋을 잃고 스크린만 쳐다본 건 내가 아닌 친구였다.
“라돈치치, 쟤 나 알아!”
나보다 훨씬 축구를 좋아해서 그런지 친구는 나보다 훨씬 더 영화에 감명받은 듯했다. 그렇다면 <비상>은 꼭 축구를 알아야 재미있는 영화일까? 꼭 그런 건 아니다. 평소 축구에 관심이 없으셨다던 ‘작게작게’님의 리뷰 중 일부다.
“<비상>을 보는 내내 울었다. 물론 웃기도 많이 웃었다. 맨 마지막엔 엉엉 목 놓아 울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옆자리 앉은 친구도 엉엉 울었고, 내 옆에서 영화를 보던 여자 둘도 계속 울었으니까.”
그렇다. <비상>은 축구 영화가 아니었다. 라면만 먹고 뛴 육상선수가 아시안게임 3관왕을 하는 것에 감동하는 게 육상을 좋아해서가 아닌 것처럼, 인생의 패자일 수도 있는 선수들이 모여 기적을 일궈낸다는 <비상>은 축구의 선호 여부에 무관하게 관객을 감동시킨다. 한가지 궁금한 것. 이 다큐를 찍은 감독은 인천 유나이티드가 준우승의 위업을 달성할 줄을 어떻게 미리 알았을까?
* 영화를 본 건 보고 싶기도 했지만 술을 마실만한 몸상태가 아니어서이기도 했다. 하지만 1차에서 소주 한병씩을 마셨고, 영화 보고 나서 다시 세병을 비웠으니 목표 달성에는 실패한 듯하다. 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