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12월 13일(수)
마신 양: 치사량
큰일날 뻔했다. 할머니를 봐주시는 아주머니가 새벽 두시쯤 잠을 깨지 않았더라면. 내가 술을 먹고 오는 건 이미 포기한 엄마지만, 그날 아침에는 십분이 넘도록 야단을 치셨다. 야단 맞아도 싸다, 난.
여간해선 두 탕을 뛰지 않는 나지만, 그날은 어째 일이 꼬였다. 뜻하지 않은 술을 마시는 바람에 약속장소인 대학로로 갈 무렵 난 이미 진탕 취해 있었다. 4호선으로 갈아타기 위해 내려야 할 충무로를 세 정거나 지나친 뒤에야 정신을 차렸고, 결국 안국역에서 택시를 잡아타고도 30분을 늦었다.
하지만 소주란 놀라운 기능을 가진 액체라, 서너잔 마시고 났더니 정신이 맑아져 버렸다. 그래서 난 평소 때의 기세로 술을 마셨는데, 그건 모임 멤버들 중 평소 만나기 힘든 미녀가 둘 있었고, 그들이 교대로 잔을 내미는 걸 거절하기 힘들었던 탓도 있다.
어떻게 왔을까, 집에? 노래방에 간 것까진 기억이 나는데, 그 이후의 기억이 전혀 없다. 깨보니 옆에 미녀가 누워 있었다,가 아니어서 다행이지만, 엄마가 잠자는 날 깨우며 까맣게 탄 냄비를 보여주니 정신이 번쩍 든다.
“왜 물을 가스렌지에 올려놓고 자냐고. 아주머니 아니었으면 큰일날 뻔 했잖아.”
엄마의 말에 난 뭐라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저 불이 안난 게 다행일 뿐. 냄비는 까맣게 타서 밑바닥이 갈라진 후였으니 조금만 더 가열했다면 불이 나는 것도 당연해 보였다. 두 탕을 뛰면서 평소보다 더 많이 먹어놓고선, 왜 그날따라 라면 생각이 난 걸까?
문제는 내가 술에 취하고 난 뒤의 행동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것. 라면으로 손이 가는 날 어떻게 말려야 할까? 앞으로는 술을 적당히 마신 뒤엔 김밥천국을 들르는 게 어떨까.
냄비의 잔해입니다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