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트.이방인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30
알베르 카뮈 지음, 방곤 옮김 / 범우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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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들은 '인간 존재'에 대해 그리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들이 그리는 인간의 모습은 보는 사람들에게 여러가지 생각할 주제들을 던져준다.

 

 

[신이 없는 인간 존재, 그러나 다른 강조점]

이 두 작품에서 까뮈가 그리고 있는 세상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페스트가 창궐하고, 타인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못하는 사회 (비록 '이방인'에서 조차 배경 사회는 그렇지 않다고 해도, 저자가 주인공을 통해 보여주는 모습은 그렇게 느껴진다.) 속에서 작가는 인간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까뮈는 '허망한 인간의 존재' 그리고 그 속에서 허위 등을 벗어 던지고 모든 것에서 자유롭게 된 인간 (적어도 저자는 그렇게 그리고 있고 역자도 그렇게 보고 있다.)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하고 있다. 그러나 '이방인'과 '페스트'에 나타나는 인간상은 조금 다르게 나타난다.  

 

1.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는 모든 것에 대해서 관조하지만 스토아 학파 등 특정 철학의 관조와는 다르다. 일종의 냉소랄까? 그의 생각에 따르면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특별하게 생각할 이유가 없어진다. 죽음은 인간에게 당연한 것이니까. 그리고 뫼르소의 생각처럼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자신의 태도가 '전혀 다른 사건'인 '살인'까지 영향을 주는 것도 합리적이지 않다.

 

그러나 이방인의 뫼르소는 위와 같은 부조리를 드러내는 데는 성공 했지만, '인긴이 보여줘야 할 진정한 모습의 전형'을 보여주는데는 실패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에게는 어머니를 비롯한 '타인의 죽음' 역시 별거 아닌 듯 보이며,  미행은 아랍인들이 했지만 먼저 습격한 것은 뫼르소의 일행들이었다. 그러므로 '칼을 가진 아랍인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한 정당방위'로 보기도 어렵고, 그가 살인을 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허위를 벗어 던지면 살인할 자유도 얻어지는 것일까?  

아니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책에 나오는 것처럼 그는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보는 것일까? 혹은 그가 가진 삶에 대한 관조에는 타인이 들어갈 자리가 없는 것일까?.

 

(몰론 도스토예프스키는 그 뒤에 이어서 "그러나 신은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하여 '신이 없는 세상의 무질서'를 경고했다. 이걸 샤르트르가 뒤집어서 "신이 없기 때문에 인간은 모든게 가능하다"고 바꾸어 나타냈고 이 표현이 유명해져서 대표적인 무신론 명언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가 있다. )

 

[덧 붙이면 위와 같은 이유로, 까뮈가 정말로 그리고자 했던 '신에서 벗어난 진정한 인간 존재'를 알기 위해서는 '페스트'까지 읽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두 작품을 엮어 놓은 이 책의 구성은 뛰어나다.]

 

2.

반대로 페스트가 그리는 종교나 기존 질서(억압)들은  여전히 허식이지면 여기에 나타난는 인간만은 숭고하다.  이 이야기의 인간에게 '신'이라는 것은 '있어서 나쁘지는 않으나, 필요하지도 않으며, 도움이 되지도 않는 것으로, '인간 존재'라는 책의 주제와 상관 없기 때문에, 이 책에는 신이 허상인지, 아니면 실존 하는지에 대한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저자는 그저 담담하게 '신을 믿는 자들'도 페스트의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일반 사람들과 같다는 점을 보여주는 한편, "어린 아이의 고통에도 움직이지 않는 신의 덧없음."을 말한다.

 

리외와 파눌루의 대화를 비롯한 책의 곳곳에서 저자가 보여주는 인간의 모습은 "신이 없는 상황"에서도 충분히 "숭고한 것 처럼" 보인다. 저자는 작품 곳곳에 종교인(정확히는 신부)들을 자주 보여주면서 그들의 무능함을 담담하게 말한다. 

 

따라서 이 작품은 기존의 과학적 무신론자들이 하지 못했던 "신 없는 인간을 위한 방향 제시"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타 다른 무신론 작품들보다 더 큰 의미를 던진다.

 

('우주에는 신이없다''물리학의 세계에 신의 공간은 없다' 같은 과학계의 무신론 서적들이 "과학을 통한 신 존재 반박"이라는 헛수고를 하고 있는 것에 비해 이 책은 이런 의미를 던져줌으로  다른 길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p.s1] 왜 과학으로는 신 존재 반박이 안 되는지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 잘 나와 있다. 물질 세계의 밖에 있는 '신'이라는 존재는 과학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과학적 방법으로는 증명도, 반박도 안 된다. 위에서 말한 '물리학의 세계에~'가 "신을 증명하기 위한 가설을 검증하고, 실패 했음을 들어 신은 없다."고 주장하는데, 이건 칸트가 오래전에 했던 말이다. 다시 말하면 과학으로는 '형이상학' 또는 그 이상의 존재인 '신'을 증명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다.

 

p.s2] 이 작품에서 까뮈가 그리는 '신에 대한 부정'은 "다른 것에 의지 하지 읺기에 독립적이면서도,  그 자체로 숭고한 인간" 을 가져온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 형제들에 나타나는 스메르자꼬프(표도로비치 포함)의 모습을 보면   '신 없는 세상'은 까뮈의 작품과는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그러므로 두 명작은 모두 읽어볼 필요가 있다. 

 

 

어쨋든 이 작품은 고립된 사람들의 생각을 잘 그리고 있는 한편, 독자들이 생각하도록 만들고 있는 명작이며, 뛰어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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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실 언니 - 개정판
권정생 지음, 이철수 그림 / 창비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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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생 선생님의 글들은 일반 동화들과는 달리 어른이 되어 읽는데도 조금 어려운 감이 없지 않다. 단편은 단편대로 생각할 것이 많지만 이번 장편은 동화를 읽는다는 느낌이 안 들었다. 주인공이 아이일 뿐, 오히려 "소설"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이제 이 책을 읽고나니 둘의 차이를 구별하는건 너무 어려운 문제가 되어버렸다.)

 

우리내 식민시절의 끝자락과  6.25를 살아오신 우리의 할머니(할아버지 포함)들의 모습을 글로 그려낸 몽실언니는 어떤 고상한 개념이나 주제를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그저 주인공이 겪는 가난과 고통, 이별과 방황, 그리고 개인의 눈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을 어린아이의 눈으로 바라볼 뿐이다  그 주인공은 어떤 고상한 관념이나 이상향을 보여주진 않는다. 다만 저는 다리로, 누군가를 용서해가거나, 선한이들의 고통처럼 이해할 수 없는 일들보며 울 수 있는, 그런 작은 존재일 뿐.

 

동화에서 주인공은 어찌보면 무능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당시 삶의 모습이었으며, 주인공이 느끼는 울분과 슬픔, 그리고 그 속에 있던 작은 기쁨은 자신들의 잘못 없이 어떤 흐름에, 물결에 쓸려서  '막막할 수밖에 없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이 느꼈던 감정일 것이다..

동화가 외부의 압력으로 단절 되어서인지 이야기의 결말 부분은 조금 모호하다. '희생을 통한 자기 존재 가치 발견'이라는 주제가 보이는 '강아지 똥'이나 그외 다른 동화들에 비해서도 이 책이 가지는 확실한 주제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작가가 그려내는 몽실이의 사회(시대)는 정말 암울 했으며, 그런 삶 앞에서의  막막한 감정에도  소녀는(몽실이는) 이겨왔고, 동생들을 지키고, 자녀들을 돌보면서 살아왔다. 그리고 그 동생들 역시 어려움은 있었으나 결국은 버림받음과 이별 등 여러 어려움을 거치며, 여기(지금, 오늘)까지 살아왔다.

 

이것이 우리의 할머니,할아버지들 삶의 모습이었고, 힘든 걸음으로 그 시대를 살아간 몽실이와 난남이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삶을 버텨왔을 모습으로 생각하면 한편으론 그들의 삶 자체를 두고서도 고개가 숙여진다.

[6.25당시에도 돈 많은 사람들은 의료 혜택을 받는데 우선권이 있었던 점이 동화 속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상위1%의 사람들은 이런 세월을 겪지 않았을 확률이 높지만, 당장 우리의 할머니들만 봐도 대부분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 동화가 그리는 이 사회의 문제는, 각 단체를 구성하는 개인이 악해서도 아니며, 그들 모두가 나쁜 것은 더욱 아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무엇일까, 어디서부터 살펴야 할까.......

 

그 전에,  몽실이와는 다른 조건이고 훨씬 편한 세상이이지만,  나 역시 서로에게 열린 마음을 가지고, 끝까지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생각해야겠지.....  참 어렵다..

 

저자의 말이 생각난다.

 "동화가 왜 그렇게 어둡냐고요? 그게 진실이기에 아이들에게 감추는 것만이 대수가 아니지요. 좋은 글은 읽고 나면 불편한 느낌이 드는 글입니다." -권정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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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이런 내용의 서평을 썼었다. 하지만 다시 읽어서인지, 아니면 개정판(내용에는 변화 없음)에서 변한 그림들 때문인지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한 묘한 느낌이 든다. 이전의 내용과 그림들이 오래된 흑백 사진이나, 남의 이야기 같은 '먼 과거의 어떤 사건'이라는 느낌이 들었다면 이번 개정판은 조금 더 생생하다. '회상'이라는 느낌이 난달까? 

 

아니면 그림의 차이 외에도, 옛날 책의 표지 글처럼 '사라지지 않고 있는 세상의 모든 폭력'이 변하여 찾아오기 때문일까?

 

아니면 몽실이가 말했던 "사람들을 나쁘게 만들고, 서로 죽고 죽이게 하는 진짜 나쁜 것"이서 비롯된 사회의 문제는 언제나 모습을 바꾸어 찾아오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몽실이처럼 그저 인내하며 살아가는 것이 최선의 저항일까? 그건 아직 잘 모르겠다. 한편으로는 좀 더 적극적으로 개선의 노력을 하는 것이 의미 있어보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개인이 무능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결국 개정판에 맞추어 이 소설(동화이나 소설같은 느낌이 든다)을 세 번 이상 읽고 난 후, 얻게된 가장 큰 소득은 '세상의 부조리함을 새롭게 알기'보다, '그런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생명들에 대한 따스한 시각'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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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에서 포스트모더니즘까지
새뮤얼 이녹 스텀프.제임스 피저 지음, 이광래 옮김 / 열린책들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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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내용과 상관 없는 내용을 먼저 이야기 한다면, 아래 여러 독자들의 리뷰와 마찬가지로, 지금의 번역은 대부분의 오역이 교정되었기 때문에 원문의 의미가 왜곡된 부분은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다루고 있는 철학들의 수준을 볼 때,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내용을 잘 전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출판사의 책임감도 좋은데, 판본에 따라 다르겠지만 오역 판본들은 아직까지도 열린책들에서 교환을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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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내용적인 특징을 살펴보면, 대부분의 교양 철학서적들과 달리, 엠파도클레스, 플로티노스, 스코투스 등과 같이주류라고 보이지 않는(고교 윤리 시간처럼 일반적인 교양 수준에서는 잘 다루지 않는) 철학자들까지도 자세히 다루고 있으며, 각 철학들에 대한 평가 역시 충실하다.

 

좀 더 예를 들면,‘가능태와 현실태로서 형상과 질료’같이 잘 알려진 아리스토텔레스의 핵심 내용 외에도근본 전제는 논증되지 않는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처럼 일반 교양 수준에서는 잘 다루지 않는 세부 내용이 많다.

 

게다가 필요한 경우에는 각 철학이 가진 약점들 또한 잘 지적하고 있는데러셀의 분석 철학(논리적 원자론)에 대해 "<일반적인 사실>에 해당하는 원자적 사실은 없다. 게다가 그 이론 자체에 대한 설명이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같은 반박은 개별 철학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 할 수 있도록 해준다.

 

검증 원리 자체가 검증 불가능하다는 논리 실증주의에 대한 비판 역시 비슷한데, 철학을 잘 모르는 사람이 읽기에도 타당해 보인다.  (과학적 명제에 대한 예측하는 언명이나 검증을 구성하는 일 등 여러 내용이 있으나 본 서평의 목적에 따라 생략한다.)

 

물론 그런 비판들이나 보충이 다른 철학자가 했던 비판을 인용한 것인지는 모른다. 그리고 분명히 특정한 몇몇 사상들에 대해서 유독 비판적인 면도 없지 않다.

 

하지만 후설, 라일, 로티, 후대의 포스트모더니즘까지 이르는 넓은 철학사상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러셀의 서양 철학사에서 빠진 내용들을 보충하기에도 좋으며, 반대로 이 책으로 보다 넓은 공부를 한 뒤에 러셀 등의 책과 비교해보는 일도 의미 있게 보인다.

 

그렇다고 이 책 내용에만 의지해 각 철학에 대한 입장을 세우는 건 조금 위험하다. 이 책 역시 원전이 아니고 제한적인 설명만 하기 때문인데 예를들면, 파스칼의도박 논증에 대한 반박이 없으며, 무엇보다 저자가 이를 '신 존재 증명'과 연결시키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도박 논증을 신 증명으로 보는 경우에는 이 논증에 대해, 기존의 신과 달리기독교인들을 지옥에 보내고, 불신자들을 천국에 보내는 신을 가정하면 한번에 반박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논증은 '신 존재'와는 무관하다.)

그러나 이 논증을 신앙에 대한 변호로 보는 경우에는 기독교의 신이 존재하는 경우에는 파스칼의 논증과 마찬가지로 지혜로운 선택이 되며, 심지어 위에서 설명한 기독교와 반대되는 신을 가정하는 경우에도 기독교인만 천국으로 인도하는 신기독교인만을 지옥으로 인도하는 신이 있을 확률은 모두 같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근본전제나 칸트의 주장처럼 이런 영역의 것은 이성이나 과학으로는 예초에 증명이나 반박 자체가 불가능하다.> 최소한 그 신앙은 50/50의 확률을 가진 정상적인 선택이 된다.) 


어차피 도박 논증이나 칸트의 도덕론적 증명은 신 존재 증명이 아니라 '신앙에 대한 변호'이다.

 



   

게다가 로티,샤르트르, 퐁티 같은 현대 철학자들도 잘 다루고 있지만, 지면상의 한계인지, 아니면 저술 시기 때문인지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철학자들은 대부분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항목 아래에서 일반적인 설명만 한 장 가량(두 쪽이라는 의미) 하고 있어서(물론 그 배경이 되는 이전의 철학자들이나 일반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구분하는 로티 등은 충분히 나온다.), 각 철학 사조들을 연결시키거나 비교하려는 노력이 부족하다. 물론 베르그송의 제논 비판처럼 직접적인 경우는 잘 다루고 있지만 시대가 다른 철학자 간의 비교는 적어 아쉽다.


(직관에서는 파스칼과 배르그송 등을 비교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이렇게 시대가 다른 철학자들끼리의 비교는 거의 없다. 단지 베르그송이 직접적으로 비판한 제논의 역설정도만 언급할 뿐 사상 비교는 조금 부족해 보인다.)


하지만 서양 철학사 전반에 대한 흐름을 쌓을 수 있으며, 그에 대한 비판까지 생각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책이라는 점에서 이 책이 가지는 의미는 크다고 할 수 있다. 이 책과는 상관 없지만 철학사를 공부하는 이유에 대해 윌 듀란트가 했던 말이 생각나서 마무리하는 김에 적어 본다.

 

과학은 우리에게 지식을 준다. 그러나 오직 철학만이 우리에게 지혜를 줄 수 있다.”

 

 

 

'소크라테스에서 포스트모더니즘까지'와 그 원서인  'Socrates to Sartre and Beyond' 7번째 판본[원서는 아마존 구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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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기술 - 출간 50주년 기념판
에리히 프롬 지음, 황문수 옮김 / 문예출판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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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학적 사랑의 극복]

 

부모의 영향을 강조하는 프롬의 사상은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지만 프로이트 이론의 한계를 지적하며(56p) 지식적 심리학의 귀결은 ‘사랑’이라 정의하고 있다. 그의 이야기는 부모에 대한, 부모에 의한 사랑은 물론이고 ‘신에 대한 사랑’에까지 확대 되고 있는데(물론 그는 무신론적 관점을 가지고 있다 100p참고) ‘신앙’으로 발생하는 “관계”에 대한 긍정은 그가 어떤 대상과의 교감을 얼마나 중시 했는지 잘 보여준다.

“사랑은 ‘참여하는’ 것이며, ‘빠져드는’ 것이 아니다.” “사랑이란 원래 ‘주는’ 것이며 ‘받는’ 것이 아니다.” 또는 “사랑은 갈등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처럼 이어지는 저자의 이야기들은 사랑에 대한 깊은 통찰을 주고 있으며, 나의 사랑이 가지는 근본적인 문제는 물론이고, 개별 대상에 대한 사랑에 관해 보다 구체적으로 생각 하도록 도와준다. 물론 사회, 문화, 종교 전반에 걸친 방대한 영역의 사랑을 연구한 저자의 바탕에도 “‘부모의 사랑’이 모든 사랑의 기본이 된다.”는 심리학(정신 분석학)적 '기본 전제'가 있으며 이 바탕은 끝까지 유지 된다.  

 

세부 사항을 말하자면 "배울 점이 많지만 심리학 전문서적들에 비해 아쉬운 곳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저자가 보기에 어머니는 무조건적인 자연적 사랑인데 비해, 아버지는 인공적이고 모험적이며, '세계로 들어가는 길을 지시하는, 즉 가르치는 자'로서 아버지의 사랑은 조건적이다. 따라서 어머니는 자녀가 떨어져 나가기를 바라는 소망에 생애의 일부를 바친 채 “어떤 모습이라도 너는 사랑 받을 가치가 있으며, 소망이 있다”라 해야 하고, 아버지는 관대함을 가지고, 권위적으로 자녀를 바른 길로 인도해야 한다. 고 보았다.

 

 

즉 저자는 이 부모의 역할이 바르지 않은 것을 신경증의 원인이라 보았다. 이런 그의 이야기를 통해 독자들은 여러 가지 적용점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경우라면 어떻게 될까? 편부모 가정은?

 

그러므로 그의 책에서도 다른 도서들과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수용하기보다 프로이트 등의 기본적인 정신 분석이 놓치고 있는 부분을 배워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집단으로 인해  생긴 초자아에 의해 억압된 원욕”을 이야기 했던 정신 분석과 달리 그는 사회 구조를 억압으로만 보지 않고 그것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깊게 탐구한다. 개인의 인격 형성에 역사가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거나, 인간 소외 현상을 극복하고 개인의 욕구를 충족하는데 사회나 집단이 필요하다는 점을 생각하면, 독자들은 독서를 통해 그가 사랑의 각 측면에 대해 분석한 이야기에 주목하며, 일반 정신 분석학이 놓치고 있는 “사회 속에서의 인간”에 대해 생각해야 할 것이다.

 

 

 

[구체적인 방법이나, 세부 내용에서는 비판적으로]

“사랑에도 연습이 필요함”을 강조하는 그의 통찰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제시 하는 방법들에는 명료함이나 구체성이 떨어진다. 저자는 정신 집중과 인내를 훈련하기 위해 혼자 있으면서 어떤 한 가지 일에 정신을 집중해 볼 것을 권하며 (경청에 잘 나타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더 열린 마음을 갖고 들어줄 수 있을 듯하다.) 저자는 이어서 신앙과 용기의 훈련으로

1.언제,어디서 신앙과 용기를 상실하는지 주목

2.상실을 은폐하는 합리화에 주목

3.어디서, 어떻게 비겁한 행동을 합리화 하는지 인식

 

을 이야기 하는데 구체적인 적용은 조금 모호하다.  사랑을 바라보는 어떤 틀이 변한 것 만으로도 변할 수 있는 부분이 많이 있겠지만, 사실 그 '신앙, 용기'를 상실하는 때를 포착하거나, '합리화'하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객관적인 몇몇 사람들에게나 결심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지, 그저 "~해야 한다"만으로는 조금 어려울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정신분석가인 에리히 프롬이지만 사랑에 대한 그의 글들을 읽으면 심리학자가 아니라 '사상가' 또는 '철학자'의 분석을 읽는 듯 한 느낌이 난다. 이 책을 통해 신앙과 권력이나, 현 사회에 있는 인간 소외 처럼 큰 틀에서 바라본 사랑의 문제를 알 수 있으며, 타인의 심리적 반응에 집중하여 타인을 배려하는 일반 서적들과 달리 저자는 “(자신을) 주는 것” 이라는 사랑의 속성에 따라 “자기 변화”에서 출발하는 타인 사랑을 이야기 하기 때문에 이 책은 구체적은 연애를 위해 읽기보다, “사랑” 자체에 대해 더 깊게 알거나 생각해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권할만한 책이다.  따라서 기술적인 부분이 아니라 '사랑의 깊은 내용'을 조금 더 살피고 싶다면[완전히 살피는건 인간에겐 어려운 일이다.] 읽을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다.

 

 

덧) 1987년에 나온 판본도 갖고 있는데 새로 나온 이 책이 번역을 비롯한 여러 부분에서 더 나았지만, 저자의 성장, 사상적 배경설명에서는 옛날의 책보다 부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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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인 이야기
김재진 지음 / 책만드는집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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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가슴에 남아 있는 한 아무것도 사라지는 것은 없어. 돌아갈 뿐이야.......

......

마음속에 기다림이 있는 한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아...

[본문 중에서]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는 역설적인 표현을 담고있는 이 책은, 표현대로 전반적으로 아이들이 읽고 느끼기에는 조금 어렵거나 추상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다. 하지만 이야기 전반에 흐르는 잔잔함과 깊은 내용들은 독서를 하는 도중에 잠시나마 세상의 여러가지 일들에 대해 생각을 하도록 하고 있으며, 시인의 말처럼 '눈을 감고, 하늘을 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여러가지 깊은 생각들과 함께, '우리가 어떻게 세상을 좀 더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을 하고 있는 이 책은, 잔잔함 뒤에 싶은 울림을 준다. 게다가 소설과 이어지는 그림들은 손으로 그려져 좀 더 따스해 보인다.  독서 이후 독자들은 '과연 세상은  삭막하기만 한 곳인가?'에 대해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이 가지는 가장 큰 단점은, 작가가 다루는 많은 이야기들이 어떤 주제로 연결되는지가 불분명하다는 점이다. 

 

예상되는 주제들을 뽑아보면

 

첫째로, 결말 부분에서 잠자리가 보여준 '자기 희생'을 통한 사랑의 완성?[이 부분은 마치 권정생 선생님의 '강아지 똥'  이야기를 주제만 사랑으로 바꾼 것 같다] 

아니면 사랑 하는 존재(오랜지 코스모스)의 특별함? [이건 어린 왕자와도 유사성이 있을 듯 하다.]

혹은 우리가 관심 없이 보낸 수많은 자연, 그 속에 있는 생명을 가진 존재들의 아름다움?

그것도 아니라면  계절과 시간 이 순환되는 과정에서 느끼는 아름다움?

 

"어느 시인과 잠자리의 이야기" 라는 한 이야기에 너무 많은 주제들을 연결시켜서, 독자가 책을 덮은 뒤에, 작가가 진짜 하고 싶던 말이 이 모든 것이었는지 아니면 그 중 몇 개인지 알기 힘들다.  

 

 게다가 본문 중 잠시 나오는 특정 종교의 교리 자체에 대한(아마도 기독교)에 대한 비판까지 더하면 이 소설을 '잘 쓰여진 작품'이라 평할 수는 있겠으나, 모두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라 평가하기는 어렵다.

 특정 종교에 대한 비판이 있는  곳은, "아이가 잠자리에게 '어머니'의 모습을 묘사하는 단락"이었는데 이런 단락을 특정 종교의 교리에 대한 비판으로 연걸시킨 것은 이야기의 큰 흐름에도 맞지 않고 억지스럽다.

 

따스한 작품에 이런 점까지 지적하게 된 것이  조금 아쉽긴 하지만, 위와 같은 이유 때문에 이 책을 모두에게 선뜻 추천하기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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