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를 좋아하는 이 친구는 그 사이 시대의 정신을 가지게 되었다. 시대는 흔히 저항 시인들이 이름을 드날리던 시절이었다. 이름도 거룩한 이육사님과 윤동주님도 저항 시인의 대표이지만, 나의 시대는 그 이름이 드높았던 김지하를 시작으로 신경림, 강은교, 황지우, 김남주, 박노해, 정호승, 최승호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문인들이 '민중 문학' 이라는 장르에서 활약하며 '시대 정신'을 추구했던 것이다.
헤어질 시간이 다가오자, 절친이 주저하듯 나를 불러 세웠다. 그런데 말이다... 절친이 말끝을 흐리기길래, 말해보라이~ 했더니, 어느 선배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그 선배께서 유명을 달리했다는 소식이었다. 아.... 탄식이 터져 나왔다.
그 선배도 시를 쓰는 사람이었고, 조태일 시인처럼 늘 소주병을 나발불던 냥반이었다. 언제나 조마 조마한 불안감을 주던 선배. 얼굴은 시멘트 바닦에 긁혀 상처가 아물 날이 없었다. 어쩌다 이리되었냐고 물으면 늘 대답은 한결같았다, '그제 밤에는 내 앞으로 전보대가 와락 쓰러지더니, 어제 밤에는 글쎄 아스팔트가 벌떡 일어서지 않겠니! 허 허 허!' 그랬다. 그 선배도 민주화의 이름을 부르며 살아간 한 사람이었다. 시대가 그러했다는 얘기다. 이자리를 빌어 선배님의 명복을 다시 한번 빈다. 부디 영면하소서...
수 많은 저항 시인 중에 시인 조태일도 한 자리를 차지했다. 시인 조태일께서 글을 쓰며 시대정신을 발휘하고 있던 그 시대는 캠퍼스에 매케한 최루탄 냄내가 사라질 날이 없었고, 휴강은 밥먹듯이 이루어졌다. 과대표는 휴강 소식을 알리기 바빴다. 휴강한 학생들은 거리로 나가 자신들의 목소리를 냈다.
뿌연 연기 속에서 직격을 당해 목숨을 잃는 열사가 있었다. 최루탄에 직격당한 학생은 머리에서 피를 흘르며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쓰러진 그 학생과 그 학생을 부축하는 동료, 그 한 장의 사진은 너무나도 강렬하게 뇌리에 남았다. 최루탄으로 사람을 향해 직격하는 것은 불법이었다. 그러나 경찰은 학생들에게 직격을 가했다. 이에 격분한 학생들 중에는 스스로의 몸에 인화물질을 끼얹고 분신을 한 끝에 사망하는 열사들도 있었다.
시대는 조태일에게도 학생들에게도 절실한 그 무엇을 갈망하게했다.
그 이름, 꽃보다 더 아름다운 그 이름, 민ㆍ주ㆍ화ㆍ!!!
민주화는 성은 민씨요 이름은 주화인, 사람의 이름 아니다. 그야말로 아름답고 눈물겨우며, 때로 누군가는 자신의 목숨마저 마다하지 않고 던진 민주화였던 것이다. 시인 조태일과 학생들은 독재를 향해 외쳤다, '자유를 자유케 하라!! 진리를 진리케 하라!!' 학생들은 자신들을 금남로의 정신으로 그렇게 무장했다. 특히 5월은 더욱 격렬했다.
당시 학생은 스스로를 '지성인'이라 생각했다. 지식인은 비겁하지만 지성인은 '용기를 가진 자' 라고 생각했다. 용기있는 자 만이 행동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 처럼 비겁한 자는 결코 용기를 내지 못했다. 고로 행동도 하지 못했다. 행동하는 자의 용기는 너무나도 고결한 것임을 잘 알고 있다. 절친이여, 고맙소, 그대를 사랑하오.........
수많은 저항 시인들의 처절한 시와 김대중이 남기 저서 '행동하는 양심으로'는 당시 학생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다. '행동하는 양심으로'는 자신의 음흉한 야욕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홍위병들을 이용하고자 했던 모택동이 젊은 대학생들에게 뿌려댄 '모택동 어록'과는 차원이 달랐다. 모택동은 올바른 양심을 자신에게서 도려낸 음모론자 였고 사기꾼이었다. 모택동이 가진 것은 오로지 탐욕, 그 자체였다. 그러나 김대중은 차원이 달랐다. 올바른 양심의 살아있는 전설이었던 것이다.
탐욕의 도구로 이용당했던 홍위병들과는 달리, 대한민국의 학생들은 올바른 시대 정신을 장착하고, 스스로를 지성인이라 여기며 그 앞을 막아서는 경찰들과 대치했다. 곤봉으로 얻어 터진 머리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학생들은 그토록 아름다운 민주화를 쟁취하기위해 싸우고 또 싸웠다.
경찰은 쫒고 학생들은 쫒기었다. 학생들은 서로 연대하여 시위하고 숨고 숨겨줬다. 이때 김아무개는 홍길똥 이라는 별명을 가진 행동주의자 였다. 당시 경찰에 쫒기던 김아무개는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나타났다가는 사라졌다. 그리하여 홍길똥이라는 닉네임을 얻은 것이다. 정작 본인이 홍길똥으로 불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나중에 대통령 비서실에서 근무하다가 썬그라스 사건으로 욕을 바가지로 잡순 그 냥반이 바로 그 시대의 홍길똥이었던 것이다. 학생들은 그러다 잡히면 모진 고문을 받다가 죽기도 하고, 대다수는 군에 강제 입대를 해야했다.
시인 조태일도 민주화를 외쳤다. 민주화를 외치며 거리로 나선 학생들과 함께했다. 조태일 시인은 강연 요청을 거절하지 않았다. 누구 한 사람에게라도 '시대정신'을 알리고 피력하는 것을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절친도 조태일 시인의 집 전화 번호를 알고있었다. 통화는 저녁, 강연을 해주실 수 있으시냐는 문의 전화였다.
절친 말로는
이 쪽에서 여보세요~! 하면
전화를 받은 시인이 저 쪽에서
'네, 조~오 테일 입니돠!' 라고 했다고 한다.
이때 옆에서 대화에 끼어든 누군가가
'아냐 쉑갸~ 내가 전화하면 시인이 그러셔, 조~오털입니돠~!! 라고 쉑갸ㅡ!' 라며 강한 어조로 조오테일을 반박했다. 조태일 시인의 성씨가 '디'씨가 아니길 천만 다행이다. 누구의 말이 사실인지는 사실 중요한 것은 아니다. 조오 테일이든, 조오털이든 그 사람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시인은 저녁이 되면 늘 쐬주에 밥을 말아먹고 계셨다는 점이 중요했다.
밥에 취한 것인지 소주에 취한 것인지 전화를 받는 시인의 발음은 정확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인의 정신은 '술권하는 사회'의 주인공과는 달리 정신이 온전했다. 사회가 시인에게 술을 권하고 있었지만 그는 온전한 정신으로 시대 정신이 살아있는 작품들을 남겼다. 또 그러나 시대를 염려하며 자신의 삶을 불태운 시인은 결국 건강이 악화되어 환갑을 넘기지도 못하고 불록하셨다. 이것은 시대의 환경탓인가 아니면 조오테일 자신의 무능력 탓인가.
그렇게 나의 절친은 민주화의 주역으로 성장했고 나는 군역으로 시간을 보냈다.
병장 만기 제대 후 3학년으로 복학을 하고 절친을 다시 만났다. (어떤 유명한 국회의원이 전국민에게 송출되는 어떤 자리에서 손가락 꼽으며 일병, 이병, 삼병, 병장 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았다. 순간 나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선배들이 목숨을 희생해서 얻어낸 민주화 안에서 군 면제를 받은 냥반이었다. 계급의 순서도 틀렸고 삼병은 또 뭐냐 대체?)
어째거나
그 친구는 4학년, 동기 여자들은 죄다 졸업을 하고 각자의 길을 가고 있었지만 절친은 입대 문제로 군대를 왔다갔다하면서 세월을 보내다보니 졸업이 늦어졌던 것이다.
학교생활을 그렇게 같이 하게 되었다.
인연이 질기군~!
그 친구는 입버릇 처럼 내게 말했다, '아놔~ 사람들은 왜 다들 내가 죽은줄 알지??? '
그만큼 허약한 친구였던 것이다. 그런 친구가 소위 운동은 대차게 했다. 결국 리스트에 오르는 영광을 누렸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자신을 숨겨달라고 했다. 명예의 전당, 즉 블랙리스에 올랐으니 수배의 전당에는 자동 올랐던 것이다. 잡히면 친구가 끝장이고, 숨겨줬다 들키면 둘다 끝장이다. 한하운의 시집과 정현종의 '시의 이해'를 죽어가던 절친에게 넘겨주던 순간에는 손이 벌벌 떨렸지만, 이번에는 두 손이 아니라 심장이 벌벌 떨렸다.
절친은 시대 저항이라는 죄를 지었고 나는 은닉죄를 지을 판이다.
그러나 우리는 절친이 아니던가.
절친을 숨겨주고 두문 불출, 몆날 며칠을 함께 지냈다.
삼양 라면의 주주들은 우리에게 고마워해야 할 것이다. 덕분에 둘다 삐쩍 골았다.
천만 다행히도 경찰은 나의 존재를 잘 알지 못하고 있었다. 막 제대하고 복학한 내가 너의 절친인지 경찰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라며 친구에게 허세를 부렸다. 그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던가...
그렇게 치열한 시대를 지나온 절친은 졸업을 하고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았다. 시는 여전히 쓰고 있었고, 고향의 어느 촌스럽고 허름한 도회지 건물 한 켠을 세얻어 영어를 가르치며 먹고 살고있다. 아, 글쓰는 것도 가르친다고 했다. 절친에게 나는, 글쓰는 것도 가르치고 배우냐? 기냥 자기 멋대로 쓰면 되는거지, 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때는 내가 맞았고 지금은 내가 틀렸다ㅠ.
그의 젊은 시대는 시인에게 소주에 밥을 말아먹게 했고, 학생들에게는 민주라는 이름을 목놓아 부르게 했다. 학생들은 그들의 아름다운 청춘을 보다 더 아름다운 '민주화'라는 이름을 위해 썼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 이는 아마도 나의 절친과 그 동료들이 대신 싸워줬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저 고마울 뿐이다. 나는 비겁한 놈이었으니까.....
그도 시인이 되었고, 이제는 저항할 상대가 없어져서인지 자신과 어린 시절 이웃집 순이를 바라보는 시를 썼다. 그리고 생각한다. 시대가 시인과 학생들이 저항하게 만드는 것은 옳지 않다, 라고. 그런 이 친구가 정말 마음에 든다. 허파가 허름한 절친이여, 버얼써 죽었어도 별 이상할게 없는, 나의 사랑하는 절친이여!!! 부디 나를 앞세우고 내 뒤를 띠라 오시게나!!!
이 페이퍼는 '죽어가는 친구에게 준 책'과 관련하여 ' 댓글을 달아주신 어느 분께 다음 시리즈도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라고 댓글로 일종의 약속을 해놓고는 그 약속을 저버린 일을 떠올리며 쓴 글이다.
본인께서는 어쩌면 그런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을 수도 있다. 그 분과는 서로를 아는 바가 조금도 없다. 그러나 지키지 못할 댓글을 드렸으니 이참에 이행함을 알려드리고 싶다. 또 물론 그 분께서는 이 글을 읽지 못할 수도 있다. 별스러운 스토리는 아니지만 그 약속을 지키는 뜻으로 그 알라디너님께 별스럽지 않은 이 글을 드린다. 저는 늘 비겁한 사람이지만 그러나 올바른 양심이 아주 조금은 남아있습니다.
어느 날 공영 방송인 KBS가 공영 방송으로서의 가치를 잃었다는 판단을 내리자, 그날로 테레비를 내다 버리고 수신료 납부를 거부한 것을 보니 비겁한 제게도 약간의, 아주 작은, 정말 작은 약간의 올바른 양심이 남아 있는게 분명합니다. 하오니 행여 읽어주신다면 깊은 고마움을 전해드리겠습니다.
건강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