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장에 즉, 머리말부터 임팩트가 강력한 책이 있으니, 바로 헤세의 문장론이다. 지성에 호소라도 하듯 거침없이, 자신감 있고, 도도하게 흐르는 문장, 이 책의 머리말이 그러하다.

 

초장에 대차게 나오는 넘치고 별볼 일 없는 넘들이 많은데, 헤세의 문장론은 예외이다. 알고보니 이유가 있었다. 초장부터 강력했던 것은 바로 헤세의 글에 있는 내용을 역자가 자신의 글과 버무려 버렸기 때문이다. 하여 독자의 가슴을 이토록 설레게 하는 머리말은 처음 만나보았다.

 

 

이 책의 또 다른 장점은 역서의 냄새를 지워내려 무던히도 노력했다는 점이다. 불가피한 몇몇 표현은 논외로 해야 할 것이다. 역서는 어쩔 수 없는 역서이니 말이다. 그 점을 감안한다면 외국어의 한글화가 단연 돋보이는 역서이다.

 

 

문장론이라고는 하지만 부제가 이를 말해주고 있듯이 작가에게 뿐 아니라, 독자로서 알아두면 매우 유익한 조언들을 가득 담고 있다. 도서의 선택 방법, 책을 대하는 태도, 독서법 혹은 태도등 독서를 하되 흔히 우리 대부분이 간과할 수 있는 부분들을 헤세는 자신의 인문학적 견해를 통해 명료하게 밝히고 있다.

 

그 과정에서 아쉬움이 있다면 헤세가 독일인 이라는 점이다. 독일을 중심으로 한 작품들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도 그러하지만, 그가 한국인 이었다면..하는 아쉬움 말이다. (이것은 지극히 미련한 생각이다. 말이 그렇다는 것이다)

 

또 다른 아쉬움은 같은 내용의 다른 글을 중복시켰다는 점인데, 9장(1910)과 29장(1930년)에 쓴 두 글이 바로 그러하다. 어떤 부분은 거의 토씨 한자도 틀리지 않으며, 전체적인 내용 또한 차이는 없다. 다른 글로 대체를 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필경 그만한 사정 또한 있지 않았겠는가. 다른 한 편으로는 20년이 흐른 뒤에도 헤세가 자산의 기본 개념을 변함없이 확고하게 구축하고 있는 인물임에 틀림이 없다는 것을 파악한 것이 일종의 수확이라면 수확이겠다. 기본 개념에 무쌍한 변화를 가지는 것도 일변으로는 바람직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니 말이다.

 

과거 그의 작품으로 국내에도 널리 알려진 ‘데미안’을 읽는 순간, 헤세가 나의 머리와 가슴 속을 속속들이 읽어내면서 헤집어 드러내고 있다는 생각에 오싹하는 전율을 느낀 적이 있다. 하여 당시 나는 헤세를 두려워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나는 이 책을 통해 그 냥반, 헤세의 생각과 마음 속에 내가 들어가 그의 것들을 하나씩 들추어내고는 기분이었다. 이 책을 읽는 희열이고 기쁨이며 행복이다. 수십 년 전 나처럼 당했던 일을 멋들어지게 헤세에게 되돌려주는 기쁨을 누리고 싶은 분이 계시다면 읽으셔도 좋다.

 

 

그런데,

이 느낌은 책의 전반부를 읽어나가는 나의 생각이었을 뿐, 나는 페이지를 넘겨 갈수록 반전을 맞이한다. 읽어나가며 생각해보면 문득 깨닫게되는 한 가지가 있다. 그의 글을 통해, 다시 나는 나의 생각을 그에게 되려 스캔당하는 느낌이 불현듯 드는 것이다. 내가 그의 생각을 헤집고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는 나의 등을 타고 앉아있다. 이는 마치 독자와 글쓴이가 쫒고 쫒기는 묘한 관계를 성립시키는 독특함을 준다.

 

내가 헤세의 등에 올라타 있구나 싶으면, 어느새 그가 내 등에 다시 올라타 있는 이 읽힘의 연속. 그의 정신을 관통하며 헤집고 있구나 싶으면 어느새 그의 칼날 같은 관조가 나의 정신을 뚫고 지난다.

서로는 그렇게 낭자히 흐르는, 서로의 상처에서 흐르는 그 무엇인가를, 끈끈한 것을 뚝뚝 떨어뜨리고 만다. 다만 붉은 색의 액체가 아니라는 점, 그것은 붉을 수도 있고 초록일 수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일깨움이며 정신의 소통이 남겨주는 아름다운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다시 한 번 그가 독일인인 것이 아쉬울 뿐이다.(미련하기는~)

 

때로는 나를 좌절시키는 대목을 만나기도 한다.

창작과 사고가 거의 같은 것이라는 견해, 세계관을 묘사하는 것이 문학의 임무라고 견해는 오류이다. 작가에게 추상적 사고는 위험 요소이며, 심지어 가장 커다란 위험 요소이다. ....중략.... 다만 추상적인 인식이 주된 핵심이 되는 순간 작가는 예술가이기를 멈추게 될 것이다. 시대를 막론하고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인 문학은 사유가의 체념이 창작자를 정화된 냄정한 삶의 관조로 이끌어서, 작가가 가치판단이나 철학적 근본문제를 포기하고 순수 관조로 들어갔을 때 생겨난 것이다. 101쪽

 

물론 내가 작가가 되려는 생각으로 이런 좌절을 언급 하는 것은 아니다. 나로서는, 독자로서 문학을 바라보는 태도의 오류를 날카롭게 지적당하고 있다는 점에서 좌절스러운 내용이었던 것이다. 개인의 고뇌가 너무 클 때, 순수 관조에 이르지 못함을 헤세가 작가에게 고하는 말이지만 독자로서도 뜨끔하지 않은 수 없는 냉철함과 그의 관조를 느낄 수 있다. 이 대목에서 나는 헤세가 그토록 섬뜩하리만치 나를 관통하는 ‘데미안’을 쓸 수 있었던 이유가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감동적인 대목이 한 둘이 아니지만 그 중 인상적인 몇 가지를 적어본다면 다음과 같다.

 

책을 읽을 때 스스로 주의 깊게 함께 하고 함께 체험하겠다는 의지를 갖지 않는다면 나쁜 독자이다.

119쪽

 

형편없는 시를 짖는 것이 심지어 최고 아름다운 시를 읽는 것보다 훨씬 행복함을 알게 될 것이다.

158쪽

 

책의 주제와 멀어보이는 듯 보이지만, 사랑 앞에서는 아무 것도 신성한 것은 없다. 131쪽

 

칸트는? 나는 망설였다. 결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칸트는 그냥 놓아두기로 했다. 니체는? 서간과 함께 꼭 필요하다. 160쪽

 

괴테와 휠덜린, 도스토엡스키의 모든 책들은 남겨둔다. 162 쪽

 

 

눈에 띄는 대목은 이루 말할 수 없지만,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아래와 같다.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는 노자의 책에 적혀 있다. 그 지혜를 유럽어로 번역하는 일은 현재 우리의 유일한 정신적 과제이다. -170쪽

 

이 대목은 내게 매우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그저 서양의 어느 통찰력을 가진 이가 동양의 인문학적 정신에 매료되었구나 싶은 정도를 넘어, 그의 표현을 빌자면 ‘유럽의 언어’,‘우리의(유럽의) 유일한 정신적 과제’라는 두 표현이 주는 함의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헤세는 유럽이라는 공통체 의식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으며,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철학적 빈곤함을 함축적으로 반증하고 있다고 이해하도록 만드는 장면인 것이다. 이런 해석은 오해라고 말해도 소용없다. 아직까지 내게는 그렇게 들리며, 헤세의 아름다운 고백이라고 생각 때문이다 ㅠ.ㅠ

 

헤세는 1931년 글에서 자신이 많은 은혜를 입은 동양서적들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들 중 가령 여불위, 공자, 장자의 책은 언제든지 손에 잡을 수 있게 가까이 두고 있으며, 특히 역경 같은 경우는 마치 신탁을 묻듯 종종 펼쳐보곤 한다.” 라고 고백하고 있다. 이 순간 나는 잠시 숨을 멈추어야 했다. 공자, 장자는 그렇다치더라도 여불위라니...그의 독서가 어디에 까지 닿아있는지 짐작할 수 없게 만드는 단어가 여불위인 것이다. 더구나 역경을 신탁이라고 표현한 헤세, 나는 경이로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신탁'이라는 말이 주는 언어의 함의와 무게감을 적절히 대신할 수 있는 대체물이 과연 있을 것인가...그것도 서양인의 글로 말이다.

 

 

역경을 언급한 부분이 나에게 그토록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서양의 관점에서 역경의 심오함과 그 과학적 위대함은 헤세보다 200여년을 더 거슬러 올라가는 라이프니쯔가(1646-1716) 이를 잘 증명해주고 있다. 그는 계산기를 발명하고 미분법을 창안하여 세상을 놀라게하기도 했지만, 0과 1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이진법을 창안, 현대의 전산시스템의 근간을 마련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역을 연구했고, 그 역 안에 담긴 수리적 원리가 자신이 찾고 있던 바로 그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현대를 전자의 시대로 변화시킨, 마법과도 같은 이진법을 창안해내는 결정적 계기는 바로 역경에 있었던 것이다. 역경을 바라보는 라이프니쯔의 시선은 그 얼마나 경이로움과 놀라움에 가득 차 있었을까.

(읽은 책이 아니고 읽고 싶은 책임) 

 

마찬가지로 헤세도 역경을 언급하며 마치 ‘신탁을 묻듯’이라는 표현을 감히 쓰고있다. 그 함의가 가지는 그 육중한 무게감에서 서구의 철학적 사고를 벗어 던진 헤세의 사유를 들여다 볼 수 있고, 나아가 그가 보여주는 동양의 철학적 가치에 대한 무한한 신뢰의 이유는 무엇일지 동양인인 우리들도 되새길 필요가 있는 의미심장한 대목이겠다. 동서양의 경계를 넘어 통찰을 보여주는 헤세, 그는 진정 아름답다.

 

이 두 인물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한결 같다. 동서양의 경계를 넘나드는 통찰력, 바로 그것이다. 주역의 계사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고 한다. ‘생생지위역(生生之謂易)’-역을 설명한 말일 것이다. 易이란 生하고 生하는 것이다. 生한다는 말은 창조력을 뜻하는 것이다.

 

크게는 스스로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창조해나가는 우주의 능력, 작게는 개인의 끊임없는 창조력 말이다. 단순한 지식의 축적에서 멈추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그 지식을 자신의 권력으로 인식한 결과,  타자에게 휘둘러 승리하는데 사용하는 것이 아닌, 진정으로 자신과 인류를 위하는 올바른 창조력 말이다.

 

(역시 읽어볼 책)

 

아직 읽어보지도 않은 두권의 책을 페이퍼에 넣으려니 뻘줌하다. 헤세가 '헤세의 문장론'에서 언급한 책들은 수없이 많다. 그 중 인상적인 역경을 언젠가는 읽어보겠지 싶다. 라이프니쯔는 몰라도 말이다.

 

사적으로는 문장론에 관한 책을 읽어본 적이 없어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동안 독서를 하되, 관조의 의미를 살려내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이 책을 통해 관조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자각하고 책을 대하는 여러가지 태도들은 이전과 달라질 것이 분명하다. 적어도 내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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