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은 죽음도 뛰어 넘는다. 사람들이 죽은 이들을 기리는 것은 자기도 그렇게 기억될 것이라는 (무의식적) 희망을 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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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yonder 2020-10-09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코코‘라는 예쁜 이름은 사실 스페인어나 포르투갈어를 쓰는 나라들의 전승에서 ‘유령‘을 의미한다고 한다.

쿼크 2020-10-10 23:49   좋아요 1 | URL
저는 스페인어로 까까(caca)와 뽀뽀(popo)만 알고 있었는데 또 단어 하나 알고 갑니다..ㅎㅎ..
 














'슈뢰딩거 방정식'으로 불멸의 업적을 쌓은 에르빈 슈뢰딩거의 철학 에세이. '길을 찾아서'라는 이름이 붙은 1부는 1925년 가을, '무엇이 실재인가?'라는 이름의 2부는 1960년에 쓰였다. 이 두 기간 사이에 슈뢰딩거는 그의 이름이 붙은 방정식을 발표하고, 나치를 피해 영국 그리고 아일랜드에서 오랜 망명 생활을 했다.


같은 오스트리아인인 비트겐슈타인이 형이상학에 사형선고를 내렸음에도, 그는 시침 뚝 떼고 형이상학을 논한다. 사실 주요 주제인 의식과 자아의 문제가 꼭 형이상학이라고만 할 수는 없겠다. 수많은 난제에도 불구하고 이미 많은 부분은 과학의 영역으로 들어와 있다. 철학으로 보든 과학으로 보든, 당시 뿐만 아니라 아직도 미해결의 문제라고 말할 수 밖에 없을 이 주제에 대해 슈뢰딩거는 그의 과학적, 신비적 통찰을 기반으로 의견을 피력한다. 그도 인정하듯이 이 주제에 대한 그의 논의는 논증에 기반한 것은 아니다. 비유가 대부분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흥미로운 의견이자 통찰이지만 미완성의 느낌이 있다. 뒤의 해제를 붙인 장회익 교수의 말처럼, "진정한 보배"인지 "보배처럼 보이는 돌덩이"인지 판별하는 것은 "독자들의 몫"처럼 보인다. 어쨌든 슈뢰딩거의 이 짧은 철학 에세이 모음은 역사적으로도, 철학적으로도 매우 흥미로워 보인다[*].


이 에세이의 주요 주장은 별개로 보이는 자아, 의식이 사실은 '하나'라는 것이다. 그가 천착했다는 인도 철학(베단타 철학)의 영향이라고 한다. 삶은 죽음을 넘어 끝없이 이어지고, 오늘 아침에 일어나는 내가 어제의 나와 하나의 의식인 것처럼, 나의 의식과 조상의 의식은 하나라는 것이다. 이에 더해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이들의 의식도 역시 하나이다. 그가 얘기하는 이 '우주의 의식'이 감이 잡힐 것도 같고 아닐 것도 같다.


그는 1961년 1월, 73세의 나이로 고향인 비엔나에서 영면에 들었다. 그의 의식은 지금도 책을 통해 우리에게 말을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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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회익 교수는 다듬으면 보석이 나올 원석이라고 말한다.


  어떠한 자아도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 배후에는 물리적 사건들과 (그 특수 유형으로서) 지성적 사건들로 이루어진 무한한 사슬이 놓여 있다. 그 사슬의 하나의 마디인 자아는 그에 속하면서도 그에 역작용하면서 그 사슬을 연장시킨다. 자아는 자기 몸의, 특히 두뇌 체계의 지금 이 순간의 상태를 통해서, 그리고 교육과 전승을 통해서 조상들에게 일어난 사건들과 사슬로 연결된다. 그중에서 이러한 교육과 전승은 말, 글, 기념물, 관습, 생활방식, 새로 형성된 주변 환경에 의해 생겨난다. 이처럼 수천 개의 단어와 용어로도 다 표현하지 못할 모든 것을 통해 조상들에게 일어난 사건들의 사슬과 연결된 자아는 단지 이 사슬의 산물이 아니다. 자아는 엄밀한 의미에서 이 사슬과 동일한 것이고 사슬의 엄밀하고 직접적인 연속이다. 이는 쉰 살의 자아가 마흔 살의 자아와 연속인 것과 같다.

  [...] 자아는 출생을 통해 비로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흡사 깊은 잠에서 깨어나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다. 그리하여 내게는 나의 희망과 분투, 공포와 근심이 내 이전에 살았던 수천 명의 사람들의 그것들과 같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믿어도 좋으리라. 수천 년이 지난 후에라도 그보다 수천 년 전에, 즉 바로 지금, 내가 처음 기원한 일이 성취될 수 있다고. 내 안에서 움트는 모든 생각은 이전의 어느 조상이 가졌던 생각의 연속으로 나타날 뿐이다. 그러므로 실상 어떤 새로운 싹이 움트는 것이 아니라, 태고의 성스러운 생명수生命樹에 있던 어떤 싹이 예정대로 발현하는 것이다. (51~52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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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2019 제43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김초엽 지음 / 허블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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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초엽 작가의 SF 모음집이다. 과학소설이라 배경은 미래인데 다루는 주제는 외로움, 쓸쓸함 등이다. 작가의 말처럼, 시대가 달라져도 살아가는 모습은 비슷할 거라는 의미일 듯. 지금과 100년 전을 비교해 봐도 인간소외의 문제가 달라지지는 않았다. 극복하려는 노력 속에 인간의 의미가 있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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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instein's Unfinished Revolution: The Search for What Lies Beyond the Quantum (Paperback)
Lee Smolin / Penguin Group USA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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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실재론적 양자역학을 실재론적 양자역학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비국소성nonlocality'이다. 비국소성이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양자역학적 '얽힘' 상태에 있는 두 입자는 서로 즉각적으로 영향을 받음을 말한다. 특수상대론으로 인해 우리는 빛의 속도보다 빨리 정보가 전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즉각적' 영향이란 참으로 이상한 현상이다. 실재론적 양자역학이란 입자의 성질이 우리가 관측하지 않아도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이 비국소성은 더욱 이상해 보인다. 스몰린 교수는 이러한 비국소성을 공간이 근원적이지 않고 관계로부터 나타난다emergent고 함으로써 해결하고자 한다. 물리학계의 통설에 따르면 공간이 근원적이고 시간이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하는데, 스몰린 교수의 주장은 그와는 반대로 시간이 근원적이라고 한다.


현재 당면한 물리학 및 우주론의 문제가 해결될 기미가 잘 보이지 않는 이 때, 이러한 다양한 주장을 심각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의 주장 중 흥미로운 것은 '복잡한' 얽힘 상태를 기반으로 하는 양자컴퓨터는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는 검증가능한 예측이다. '복잡한'이라는 말이 정성적이기는 하지만, 관심 있게 지켜볼 만 하다. 


주류와는 다른 주장을 하는 그의 용기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양자역학에서 측정의 문제와, 실재론적 양자역학을 만들기 위해 어떠한 방향으로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지에 대해 관심 있는 분들에게 추천한다.


결국 보어가 틀리고 아인슈타인이 맞았는가? 현재로서는 정답을 알 수 없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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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0-08-24 1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젠가는 아인슈타인이 결국 맞았다고 할 날이 올것이라고 전 믿습니다. ^^

blueyonder 2020-08-24 19:52   좋아요 1 | URL
네, 양자역학에서는 시대에 뒤떨어진 늙은이 취급을 받았던 아인슈타인이 맞는다면, 그 또한 통쾌한 일일 것 같습니다. ^^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실재론자(realist)’이다. 여기서 의미하는 ‘실재론(realism)’이란 자연—물질세계—가 우리(나)의 존재와는 상관없이 객관적인 실체를 가지고 있다는 주장이다. 즉, 내가 없어져도 세상은 존재한다[1]. 사실, 현대사회를 사는 우리에게 이러한 의미에서의 실재론은 상식이다. 


문제는 이러한 실재론이 미시세계를 기술하는 양자역학에서는 사실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양자역학은 관측자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객관적 실체가 없다고 말한다. 미시세계에서 물질의 성질은 우리가 무엇을 측정하느냐에 따라 결정되고, 측정 이전에는 결정되어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적어도 이것이 현재까지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해석이다. 이론에 해석이 따른다는 말 자체가 양자역학의 난해함을 말해준다.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은 이러한 해석은 간과한 채, 주어진 방정식을 ‘요리법(recipe)’처럼 사용해서 많은 유용한 결과들을 얻어냈다. 대표적인 예가 우리가 사용하는 수많은 반도체 장치들이다. 양자역학이 없었다면, 현대 생활에 필수적인 스마트폰, 인터넷, 컴퓨터 등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는 ‘양자통신’이니 ‘양자암호’니 ‘양자컴퓨터’니 하는 말들까지 나오고 있다. 앞에 ‘양자’가 들어가는 요즘 유행어는 양자역학이 알려주는 미시세계의 성질인 ‘얽힘(entanglement)’을 좀 더 전면적으로 이용하려는 시도이다.  


스몰린의 신간 <Einstein’s Unfinished Revolution>은 지금 주류로 받아들여지는 양자역학의 해석을 ‘반실재론(anti-realism)’이라 부르며, 미시세계에서 실재론의 부활을 시도한다. 그에 따르면 현재 양자역학에 관한 관점은 다음의 몇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1. 보어의 코펜하겐 해석. 위에서 언급한 관점이다. 현재 주류로 받아들여진다.

2. 양자역학은 자연에 관한 우리의 지식을 나타낼 뿐이며, 자연의 본질적 성질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라는 관점.

3. 조작주의(operationalism)의 관점. 양자역학은 우리가 원자를 측정할 때 일어나는 일을 형식화한 것이다. 원자의 본질적 성질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2, 3번은 단순한 실재론의 문제를 넘어서 과학이 실재를 어떻게 기술하느냐의 문제를 포함하고 있다. 위의 관점 모두를 스몰린은 반실재론이라 부른다. 주류인 코펜하겐 해석이 가장 강력한 반실재론이다. 쟁점이 단순히 해석의 문제일 뿐이라면 현실에 유용한 결과를 낳을 리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스몰린은 현대 물리학이 처한 난제를 근본부터 새로운 접근법으로 타개하자고 주장하는 극소수 중의 하나이다. 그는 실재론을 복원한 새로운 양자역학으로 현재 물리학이 처한 어려움을 해결할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책은 3개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첫 번째 부분은 어떻게 양자역학이 비실재론적 관점을 얻게 되었는지 기술한다. 보어와 하이젠베르크가 주인공이다. 두 번째는 그동안 무시되었던 실재론적 양자역학에 관한 설명이다. 드 브로이, 봄, 그리고 에버렛이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은 기존의 양자역학을 넘어서는 스몰린의 전망이다. 책의 뒤표지에 “현대 물리학의 최고 전문가가 보여주는 양자 이론에 관한 대담한 새 전망[2]”이라고 나와 있는데, 매우 흥미로운 책이 될 것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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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실재론이란 말을 좀 더 엄격하게 사용할 수도 있다. ‘과학적 실재론’이라고도 이야기할 수 있는 이러한 관점은, 과학이 실재(reality, 물질세계)를 있는 그대로 반영한다는 주장이다. 즉, 과학이 기술하는 것은, 인간의 편견(인식)이 반영되지 않은 실재의 진정한 성질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과학이 기술하는 것이 실재의 진정한 성질이 아닐 수도 있나? 과학철학자인 장하석 같은 이는 그렇다고 말한다. 상충되지만 모두 올바른 결과를 주는 두 가지 이론체계의 예를 들면서(예: 뉴턴의 중력이론과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론), 과학이란 단지 ‘실천체계’일 뿐이라고 말한다.

[2] “A daring new vision of quantum theory from one of the leading minds of contemporary physics”를 마구 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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