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의 노래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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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작가가 그린 이순신 장군의 내면이다. 사면초가의 외로움이 뼈에 사무친다. 최근에 다시 읽었는데, 예전에 감상을 남겨두지 않아서 이제라도 몇 자 적어둔다. 다시 읽으니 감동이 예전만큼은 아닌 것 같다. 그가 남몰래 울었다는 내용이 난중일기에도 나오며 책 자체는 역사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그래도 역사 속의 이순신 장군이 이만큼 현대적 내면을 지니지는 않았을 것 같다. 처음 읽었을 때는 신선하고 충격적이었지만, 우리 사회나 나도 이제는 이 소설을 지나 성장한 것일까. 처음 읽었을 때를 생각해서 별점을 매겼다. 


책의 몇 구절을 다음에 옮겨 놓는다.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은 2001년에 나온 초판본인데 알라딘 검색에 나오지 않는다. 다음의 페이지 수는 초판본 기준이다. 


서해의 물길은 낯설고 어려웠다. 여기서 사납고 좁은 물길 하나를 잘 골라서, 거기서 적을 맞을 수 있다면 또 한 번 존망을 역류할 만도 했지만, 아직도 그나마 온전한 백성들의 넓은 들 뒤쪽 어귀에서 나는 적을 맞고 싶지 않았다. 여기서 내가 죽는다면 적들은 서해를 따라 임금에게 갈 것이었고, 영산강을 따라 백성에게 갈 것이었다. 여기는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나의 사지였지만, 편안히 죽을 수 있는 사지는 아니었다. 고하도에서도 나는 나의 사지를 찾지 못했다. 아마도 나의 사지는 경상 해안 쪽으로 좀더 앞으로 나아간 어떤 자리라야 마땅할 것이었다. (151 페이지)

나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희망을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언어로 개념화되는 어떠한 미래도 생각하지 않았다. 희망은 멀어서 보이지 않았고, 희망 없는 세상에서 죽음 또한 멀어서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았지만, 살아 있는 나에게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만은 의심할 수 없이 분명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날들이 힘겹게 겨우겨우 흘러갔다. 저녁이면 먼 섬들 사이로 저무는 햇살에 갯고랑 물비늘이 반짝였고, 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소멸하는 날들은 기진맥진했다. (181 페이지)

나는 환도 아래서 몸을 뒤채었다. 나는 강화 협상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백골로 뒤덮인 강토에 쑥부쟁이가 우거졌고, 도성은 잿더미가 되었다. 적이 나의 강토와 연안을 내습했으므로, 적이 전쟁을 끝내기를 원한다면 군대를 거두어 돌아 가면 될 일이었다. 그리고 온 국토를 갈아엎고 돌아가는 적을 온전히 살려서 돌려보낼 것인지, 종자를 박멸해서 시체로 바다를 덮을 것인지는 적이 아니라 나와 내 함대가 결정할 일이었다. 적은 귀로의 바다 위에서 죽음을 통과해야만 돌아갈 수 있을 것이었고, 그 바다에서 적의 죽음과 나의 죽음은 또 한 번 뒤엉킬 것이었다. 이 세계에서는 그토록 단순하고 자명한 일이 단순하지도 자명하지도 않았다. (260~261 페이지)

적의 인후 앞에서 나는 온 천지의 적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나는 이런 방식으로 전쟁이 끝나는, 이 세상의 손댈 수 없는 무내용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날 밤, 나는 혼자서 숨죽여 울었다. 관아 객사로 올라간 등자석 패거리들은 거기서 또 술을 마시는지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달이 높이 떠올라 숙사 방 안을 비추었다. 나는 새벽까지 잠들지 않았다. 나는 달빛 속에서 뒤채었다. 등판을 적시는 식은땀에서 누린내가 났다. 내가 맡는 내 몸의 냄새는 고단했다. 말하여질 수 없는 적의가 산더미처럼, 파도처럼 내 마음에 밀려왔다. 임진년에 이물의 앞쪽에서 눈보라로 나부끼며 달려들던 적을 맞을 때보다 더 크고 깊은 무서운 적의로 나는 잠들지 않았다. 적은 가까이 있었다. (278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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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26-08-12 2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가지고 있는 <칼의 노래>는 생각의나무 출판사 판본인데, 김훈 작가의 얼굴이 나온 표지였어요. blue님이 언급하신 2001년 초판본이 절판된 구판인 것 같습니다. ^^

잉크냄새 2026-08-12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가지고 있는 책은 2001년 재판 3쇄네요. 절판되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