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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구
김이환 지음 / 예담 / 2009년 8월
평점 :
품절
"...을 조심하게 젊은이"
들릴 듯 말 듯한 이 말로 시작되는 글은 결국 밤을 하얗게 지새워 책을 다 읽어버리게 만들었다.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검은 구.
그것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다가온다. 모든 벽을 통과하면서 사람을 흡수한다. 그것도 살아있는 사람만..
무엇이지? UFO인가? 사람들은 호기심에 그것을 바라본다. 하지만 바로 눈 앞에서 사람이 흡수되는 것을 보고나서야 도망치기 시작한다.
어제까지 활기차던 도심은 남쪽으로 남쪽으로 피난가는 사람들의 행렬이다.
전쟁이 터진것도 아닌데 사람들은 피난을 한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그것도 잘나가는 이 시대에 말이다.
32살의 남자는 평범하지만 또래에서 조금 잘나가는 그런 사람이다.
평범한 인생에서 그저 좀더 나은 상위층을 향해 그때그때 상황에 적응해 나가는 그런 남자다. 뭐..32살의 남자가 독립도 했고, 차도 있고, 집도 있고, 일의 능력에서 상사에게 인정받으니 나름 성공 가도를 달리는 남자의 모습이다.
어느날 무심결에 목격한 검은 구와 그것으로 빨려들던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도망을 친다. 경찰에 신고도 안했다.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동네 노인들이 놀라서 허둥대는 남자의 말을 듣고 미친놈이라는 눈길만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자는 부모님 집을 향한다.
독립한 후에 연락이 점점 뜸해진 자신이었지만 그래도 떠올리고 챙겨야 할 사람은 부모님 뿐이기 때문이다.
천천히 다가오는 검은 구에 비해 남자는 서두른다. 조바심만 남아있다. 그나마 구에 대해 조금은 파악했기때문에 8분여의 시간을 잠깐 졸고 또 도망하고 또 졸고를 반복한다.
그것은 소리없이 나타난다. 하지만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두렵다. 아무 소리 없고 아무 반응이 없고 그저 제일 가까운 사람만 쫓아가서 흡수하는 것 뿐인데 두렵다.
'2009 멀티 문학상' 수상작으로 1억원의 고료를 받은 작품이다.
출판 및 영화, 드라마 등 다양한 장르로 활용할 수 있는 콘텐츠를 발굴하고자 출판사 위즈덤하우스, 영화투자배급사 쇼박스, 방송사 SBS 등이 만든 '멀티문학상' 수상작이다.
작가는 무엇인지도 모르고 일단 도망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그 무엇에 대한 공포와 불안을 그려내고 있다. 혼란스러움 속에서도 또 발생되는 인간의 잔악함을 그려낸다. 책 속의 폭도, 강도들은 언제 자신이 검은 구에 빨려들어갈지도 모르는 상황을 무시한다. 눈앞의 것만 취하면 된다.
결국 검은구로부터 도망치던 남자는 온 지구상에 오롯하게 혼자 남겨진다.
그리고 또 다시 바뀐 주변의 상황에 남자는 혼란스럽다. 꿈일까 생시일까?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남자는 언제부터인가 또 도망친다. 이번에는 사람들로부터 도망친다.
얼마 전부터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그리고 감정적으로 불안에 시달린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늘 무언가에 쫓기지만 그 공포의 정체는 찾아내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개인적인 문제인가, 사회적인 문제인가? 그렇다면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그 시간을 보내며 해온 고민이 글에 담겨 있습니다.(작가의 말 중에서)
우리는 늘 쫓기듯 살아간다.
급할것도 없는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듯. 도망치듯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편히 쉬어야 하는 시간에도 무언가 모르는 불안감에 움직이게 되고 억지로라도 해야 마음이 편해진다. 또다른 시선으로 인간을 바라보자.
운동하는 사람, 공부하는 사람, 직장에서 맡은 일을 하는 사람..극히 당연한 취미와 의무와 책임감을 하고 있지만 문득문득 무엇에 쫓기듯 앞에 있는 숙제들을 해치워버린다.
"...을 조심하게"
그렇다.
사람들에게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언제인지도 모르게 나타나는 절망의 그 구를 조심하라는 것이다.
절망이 왜 내 앞에 나타나는 지에 대한 답은 독자들이 알고
책 속의 인물 스스로가 알고 있다.
절망이라는 것은 누구를 가릴 것 없이 나타나고 언제라도 정해진 것 없이 나타난다.
그는 길에 도착했다. 그는 길을 뛰었고 더 멀리, 그리고 더 멀리 도망쳤다. 그는 더 먼 곳으로 도망쳤고, 다시 도망쳤다. 끝없이 도주했다. 남자는 도망치고 또 도망쳤다. 절망을 피해 도망쳤다. 이것은 남자의 도주에 대한 기록이다. 남자는 도망친다.(p418)
인간의 모습이다.
도망쳐야 하는 인간의 운명.
운명에 대한 도전이라고, 새로움에 대한 도전이라고 떠벌리던 인간들은 도망친다. 끝없이 도망치는 모습에서 무엇을
결론내려야 하는지 책을 덮고 한참을 머뭇댄다.
내가 내릴 결론은 무엇이어야만 하는가.
지극히 당연한
해피앤딩을 떠올리지만 과연 그것이
정답일까라는 반문이
해피앤딩의 발목을 잡아 붙들어 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