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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다 브렌트 이야기 - 어느 흑인 노예 소녀의 자서전 ㅣ 뿌리와이파리 알알이 2
해리엇 제이콥스 지음, 이재희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11년 2월
평점 :
품절
"내 인생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열다섯 살 흑인 소녀가 세상을 향해 맞서면서 하는 말이다.
이 책의 주인공 린다 브렌트는 노예였다. 태어나서부터 당연한 노예였다. 그녀가 남북전쟁이 발발하기 직전까지 겪었던 참담하고, 구역질 나는 노예생활을 자서전 형식으로 발표해 세상에 노예의 실상을 밝혀낸 이야기이다.
린다는 세 살 때 재산의 하나로 양도되었다. 린다는 자신의 주인 아가씨의 아버지 플린트에게 끝없는 괴롭힘을 당한다. 19세기 당시 노예는 하나의 전리품이었고, 재산가치였고, 노리개였다.
19세기 노예제와 참담한 노예 생활에 대한 이야기는 소설이나 영화를 통해 거의 모든 사람이 알고 있다. 노예 여성들이 겪었던 성적인 억압까지 대부분 알고 있는 이야기이지만, <린다 브렌트 이야기>는 그 억압을 직접 겪어내고 오랜 세월을 견디고 드디어 자유인이 되기까지의 여정을 있는 그대로 적어내려 간 자서전이라는 점에서 주목받는 책이었다.
저자 해리엇 제이콥스는 자신의 이야기를 '린다 브렌트'라는 가명으로 출간한다. 그녀는 자신을 끊임없이 짓밟으려는 악덕한 주인에게 성적 괴롭힘을 당하지만, 그의 협박 때문에 누구에게도(이웃에 살면서 자신의 기둥이 되어주는 할머니에게조차) 말하지 못하는 세월을 괴롭게 보낸다. 그녀는 비록 노예의 신분이었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있었고, 어려움을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현명함이 있었다. 악덕한 폭군에게 자신을 짓밟히게 놔두 차라리 자신이 사랑하는 백인 남자에게 자신을 내어준다. 당시 순결을 종교만큼이나 중요시하던 때였음을 생각할 때 린다의 선택은 용감하고 세상을 향해 도전하는 모습이기도 하다. 또한, 자신을 갖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악독한 플린트에게 복수하는 길이라 생각한다.
그녀는 두 명의 자녀를 낳았다. 하지만, 플린트의 집착은 병적으로 심했다. 결코, 그녀를 놔주지 않았다. 자신의 아이들과 할머니 그리고 이모, 삼촌 등 린다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볼모로 린다를 협박한다.
결국, 린다는 자신의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자신이 도망쳐 사라졌다는 시나리오로 6년 11개월을 숨어지내게 된다.
그녀가 선택한 길은 자유주로의 도망이 아니라 원수 같은 플린트가 있는 마을, 자신의 할머니 집 헛간 지붕에서 옴짝달싹 못하는 생활을 자그마치 7년여를 견뎌낸다.
나무판자 사이로 보이는 자신의 아들과 딸에게 말 한 마디 못하고, 그저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고, 쥐와 벼룩이 득실대는 그 장소에서 뻥 뚫린 지붕을 통해 내리는 비를 맞으며 그 세월을 견뎌낸다. 불의 온기도 없이 겨울을 보낸다. 뜨거운 여름밤에는 온갖 해충에 물어 뜯겨도 제대로 피할 수도 없다.
가끔은 자비로운 신께서 내가 당하는 고통으로 내 죄를 사해주시리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때로는 신의 처분에 공정함이나 자비심이라곤 아예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노예제 같은 악행을 왜 두고 보시는지, 어릴 때부터 줄곧 내가 왜 이렇게 박해받고 부당한 취급을 당해야 하는지 대답해달라고 호소했다. 이런 생각은 오늘날까지도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남아 있다. 내세에나 풀릴 수 있을지 모른다.(p188)
그녀가 겪은 우여곡절은 보태지도 않고 빼지도 않는 그녀의 서술로만 이루어져 있다.
때론 자신의 독백처럼 이어지는 글이 있고, 때론 독자에게 말을 거는 듯한 표현도 있다. 또는 마치 세상을 향해 주장하는 구호를 외치는 각성과 행동을 추구하는 느낌도 있어서 현대인들이 읽기에는 매끄럽지 못한 점도 있다. 하지만 이는 있는 그대로를 전하려는 저자와 그의 뜻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당시 편집자와 이 세상 독자들에게 당시의 느낌을 그대로 전하려는 옮긴이의 뜻이라 생각하면 된다.
그녀는 마침내 자신의 아이들을 찾아내고, 자유주로 도주하는 데 성공을 했다. 노예가 자유주로 무사히 도망을 쳤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놀라게 할 사건이지만, 린다가 겪었던 그 세월의 사건들은 당시 독자들에게 충격을 주고 남았을 이야기이다.
저자는 남부를 탈출한 후 그동안 겪은 일을 익명으로 연재하지만 도망노예가 혼전임신이라는 파격적인 주제로 글을 썼다는 점 때문에 연재는 중단되고, 3년 후에 백인 여성 편집자 리디아 마리아 차일드의 도움으로 책으로 출간된다. 당시 사람들은 글의 문체를 보아 노예가 썼다는 점을 믿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여성 편집자가 쓴 소설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이런 논란은 120년이 지난 1981년 진 페이건 옐린이 편집자와 저자가 주고받았던 편지 다발을 찾아내므로 끝났다고 한다.
<린다 브렌트 이야기> 속의 주인공 린다는 당시 사회적인 배경을 고려해볼 때 상당히 적극적인 여성이었다. 비록 자신은 노예였지만 세상을 향해 노예제가 주는 문제점, 특히 노예 여성들이 당하는 성적착취와 이 일련의 과정을 여성이라는 입장 때문에 삼키고 참아야 했던 안주인 백인 여성의 입장도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당시로써는 상당히 민감한 사항을 건드리는 위험한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자신의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악독한 플린트를 교묘하게 속이는 계획도 성공한다. 그리고 자신의 처지가 위험할 때에도 목적을 위해서라면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거는 용기도 보여준다.
<린다 브렌트 이야기>에는 수많은 노예 여성들이 겪는 끔찍함이 있다. 자신의 아이가 죽어나가도 주인의 아이를 키워야 한다. 어쩌다 아이를 가진 노예 여성을 아이를 낳자마자 또 주인의 시중을 들어야 한다.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새해가 돌아오면 엄마는 자식들이 노예 경매장을 통해 팔려가는 것을 봐야한다. 어디로 가는지조차 모른다. 주인의 더러운 욕망의 노리개가 되고, 안주인은 주인의 눈에 띄었다는 이유로 발가벗겨 채찍질을 당해야 한다. 자신의 이부자리조차 편하게 쉬질 못하고 자다가 물을 찾는 주인을 위해 주인 침실 현관 바닥에서 잠을 자야 한다.
<린다 브렌트 이야기>에 나오는 노예제는 남부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었다. 노예제를 반대하고 있는 북부에서도 오히려 남부인보다 더 악독하게 노예사냥을 하는 북부인들이 있었고, 자신의 이익만을 우선으로 하는 백인들 역시 있었다. 노예제가 있던 당시의 미국을 남부와 북부로 나뉘어 노예제 찬반으로 대립했다는 표면적인 시대적 배경보다는 그 노예제 속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노예 여성들의 이야기를 주목해야 한다.
자유도시 뉴욕에서 인간이 팔리고 있다! 매매계약서는 증거로 기록되어 있으니 후대 사람들은 19세기 말 기독교를 믿는 나라의 도시, 뉴욕에서 여성들이 매매 대상이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p304)
그녀는 자신의 첫사랑이었던 남자, 아이들의 아버지였던 남자, 그래서 자신의 아이들을 구하는데 도움을 청했던 샌즈 씨에게도 배신을 당한다.
글쎄, 당시의 상황으로써는 백인 남자가 흑인 여자를 위해 얼마나 힘을 쓰고, 얼마나 도움을 줬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이 일로 린다는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믿게 된다. 누구도 믿기 어려워함은 후에 좋은 백인 친구들을 만나면서 잠깐의 의심을 하는 대목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린다의 자비로운 신은 린다의 기도를 들어주었다. 그녀가 자유시로 무사히 도망을 오고 나서 그녀에게는 좋은 백인 친구들을 만나게 된다. 그녀 역시 완전한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그 먼 곳까지 자신을 잡으러 오는 플린트의 족쇄를 피해 도망 다니고 피하고, 숨는 여정이 반복적이지만 그래도 그녀를 사람으로 대해주는 백인 친구가 있었다.
감격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어릴 때 불쌍한 아버지가 내 자유를 사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그리고 그럴 수 없었을 때 얼마나 낙심했는지가 떠올랐다. 그의 영혼이 하늘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기뻐하시기를 바랐다. 할머니가 말년에 나를 사기 위해 열심히 돈을 모았던 것, 그리고 그 계획이 번번히 실패로 돌아가 얼마나 상심했는지도 떠올랐다. 사랑으로 가득한 그 신실한 할머니가 나와 내 아이들이 마침내 자유의 몸이 된 것을 보면 얼마나 기뻐할 것인가? 나를 구하려는 내 가족들의 모든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하느님은 낯선 사람들 중에 한 명의 친구를 보내 내가 그토록 오랜 시간 바라오던 귀중한 선물을 선사하도록 해주셨다. 친구! 흔한 만큼 때로는 쉽게 쓸 수 있는 말이다. 다른 좋고 아름다운 것들처럼 함부로 다루다가 그 의미가 훼손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브루스 부인을 내 친구라고 말할 때 그 말은 성스러운 의미를 지닌다. (p305)
1863년 노예제가 폐지되고 나서도 린다는 해방 노예의 자립을 돕고 여성권리신장을 애쓰다 1897년 생을 마감했다.
그녀는 "노예제 속박 아래 나와 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아니 그보다 더 극심한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는 2백만 남부 여인들의 처지를 북부 여성들이 깨닫게 되었으면”하는 바람을 담아 이 책을 출간했다.
하지만, 이 시절, 21세기에 읽어보는 <린다 브렌트 이야기>는 현대에는 여성의 성 착취에 대한 사회적 반응, 남성의 반응은 어느 정도인가 생각해볼 만한 시간을 주기도 한다. 비록 노예제라는 무시하고 더러운 제도는 없지만, 여성 스스로 노예제의 속박에 잡혀 사는 것은 아닌가, 남성 스스로 여성을 속박하는 위치에 있다고 착각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점을 독자들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
사랑이라는 변명하에 여성을 억압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남성이 속박하려는 것을 여성을 보호하려 한다고 착각하며 놔두는 여성이 있는 것은 아닌지, 이 문란한 세상에 독자들이 따끔하게 생각하고 깨우쳤으면 하는 권유를 하고 싶다.
비록 노예제를 피해 먼 길을 도망 다니고, 자식들 위해 그 험난한 길을 참아냈지만, 그녀가 겪었을 그 암담한 고통은 세상에 글로 보고를 함으로써 조금은 위안이 되지 않았을까라는 점도 떠올려본다.
열다섯 살, 주인이 저지르는 억압에 당당하게 맞서고, 자신을 노예제에 속박하려 했던 세상을 향해 맞서고, 자신을 지켜냈던, 자신의 자존심을 지켜냈던 그리고 자식의 운명을 지켜냈던 린다 브렌트, 해리엇 제이콥스에게 오랜 시간이 지난 이 세월의 독자가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