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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시간을 그리다 - 풍경과 함께 한 스케치 여행
이장희 글.그림 / 지식노마드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태어나고 자라고 늘 함께했던 서울이다. 지금은 경기도에 살고 있어 가끔 친정집 나들잇길에 보이는 서울의 거리를 보면서 그때의 기억을 새록새록 떠올려 본다. 서울의 묘미를 제대로 느꼈던 때가 그래도 내가 한창이라고 하던 그 나이 때였다. 나름 멋을 찾는다고, 나름 시간의 여유를 만끽한다고 친구들과 어울려 서울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던 기억이 떠오른다.
지금은 월드컵 상암경기장과 주변 공원이 들어서 너무나도 멋지게 변해버린 난지도의 그 황량했던 모습을 떠올린다. 쓰레기 매립지로 도시의 경관을 망치는 하나의 쓸모없는 땅이었던 그곳이 이렇게 어마어마하게 변했단다. 친구와 수다 떨다가 제때 내리지 못해 가게 된 상암동 구석진 버스 정류장, 질퍽한 진흙탕을 겨우겨우 빠져나오던 기억이 떠오른다. 종로의 피맛골은 동기생들, 선후배들과 늘 함께 들러 나름의 시국을 논하고 과거를 비판하고 미래를 바라보던 패기의 장소이고, 낭만의 장소였다. 지금은 없어진 종로서적에서는 설레이는 마음으로 그 누군가를 기다리던 장소였다. 조금 더 멋을 내자면 관철동에서 근사한 카페를 찾아내는 것도, 창가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조금은 비쌌던 커피를, 파르페를 먹던 맛도 참 좋았다.
그래. 나에게도 이런 시절이 있었다. 이런 시간이 있었다.
<서울의 시간을 그리다>는 나에게 그런 느낌을 새록새록 떠올리게 하는 여행 에세이다.
서울에 관한 많은 서적을 보면서 아..그래 이 장소, 맞다..여기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데..라고 생각을 하곤 하지만 <서울의 시간을 그리다>는 마치 내 기억 속에서 희미해진 기억을 표지가 바랜 일기를 뒤져보면서 그때의 감정과 그때의 느낌을 고스란히 몸으로 느끼는 그런 책이라고 할까?
사진으로 깔끔하게 보이는 서울의 모습보다는 연필로 선을 그어가면 하나하나 완성해가는 그 작업이 얼마나 꼼꼼하고 시간의 여유를 가져야 완성됨을 알기 때문에 더 정겨운 여행이야기가, 서울의 숨은 이야기가 쏙쏙 들어온다.
<서울의 시간을 그리다>는 터벅터벅 걸어가는 느낌이다. 서울의 한 모습을 담기 위해 그 장소를 쳐다보고 시간에 쫓김이 없이, 차로 지나가면 그저 커다란 덩어리만 봤을 서울의 구석을 걸어가야 찾을 수 있는 표지석과 한 번 더 손으로 짚어보고 찾아냈을 벤치며, 사람들에게 한 번 더 물어봐야 알 수 있는 옛 서울의 자취를 찾아내는 여행을 독자들은 참 재미있게 따라다니게 된다.
찰나의 순간을 잡아내는 스케치는 밋밋하고 싱겁지 않을까 염려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주는 묘한 매력은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채색하고 명암을 넣은 그림은 멋있지만, 때론 모든 것을 다 아는 듯한 느낌이 들어 쉽게 질릴 때도 있다. 스케치는 보면 그림 전체가 보이고, 또 한 번 보면 그린 이의 터치가 보인다. 여백을 준 공간을 보면 꼼꼼하게 펜으로 메워나간 부분도 보인다.
스케치라는 매력을 충분히 양념해주는 글도 좋다. 마치 그림에 말을 걸듯 써넣은 메모이다.
<서울의 시간을 그리다>는 그런 매력을 주는 에세이다. 마시다 남겨진 커피 자국에 나름의 변명도 써넣어보고, 보이지 않는 구석을 화살표로 설명도 넣어보고, 마치 내가 그 자리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아주 정감이 가는 여행 에세이다.
학생 땐 역사가 왜 그렇게 어려웠나 모르겠다. 연도별로 사건별로 외우라고 하는 것이 어쩜 그렇게 안 외워지고 지난 과거를 알면 뭐하냐라는 빈정담은 반항심도 들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서인가. 시간을 바라보는 여유가 생겨서인가. 역사의 숨은 이야기를 읽는 것이 참 재미있게 느껴진다.
경복궁, 명동, 수진궁, 효자동, 광화문 광장, 종로, 청계천, 우정총국, 정동, 혜화동, 숭례문, 경교장, 딜쿠샤, 인사동...서울을 떠올리는 곳이다. 서울을 떠올리는 단어이다.
<서울의 시간을 그리다>는 일러스트 작가인 저자가 5년 동안 서울의 구석구석을 다니면서 보고, 그리고, 서울에 대해 공부한 것을 묶어낸 것이다.
서울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우체국 건물 중의 하나가 있다. 1884년 11월 18일에 우정총국의 업무를 시작했지만 12월 4일 개화파가 일으킨 갑신정변으로 스무날 정도만 우정 업무를 본 곳이기도 하다. 윤선도의 서울집이 있던 곳이 바로 진고개, 명동성당이 있는 언덕바지라는 것이 새삼스럽게 들린다. 김구 선생이 해방 후 머물다 생을 마감한 경교장이 많은 사람이 다니는 병원의 하나로 생각하고 있다.
어느 가수의 노래 '광화문 연가'로 정동길은 꼭 다녀와야 하는 우리에게 낭만을 주는 거리였다. 덕수궁 뒷길을 거닐다가 정동극장에서 연극을 보던 기억이 난다. 이화여고 유관순 기념관에 무슨 공연을 보러 갔던 기억도 떠오른다.
서울의 발전을 세계에서 모두 주목하고, 과찬을 하고 있다. 짧은 시간에 큰 변화를 보인 도시는 서울만 한 것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그 개발의 물결 속에 우리네의 진정한 자존심은 슬그머니 미뤄놓고 있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게 한다.
역사를 알고 전통을 알자고 하면 너무 과하게, 크게 말하는 것이라 여겨진다면 우리가 늘 지내왔던 생활, 우리가 늘 지내왔던 거리를, 변화하기 전의 모습을 그대로 남겨보고 싶은 책이라 생각하면 마음이 가벼울까?
나는 현재진행형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지금 이 시간 충실할 수 있다는 이 단어는 참 많은 의미를 줄 수 있다. <서울의 시간을 그리다>를 통해서도 현재진행형인 서울의 모습을 새롭게 들여다볼 수 있다. 이 책에 남겨진 스케치는 시간이 지난 지금 변화를 하고 사라졌을 수도 있겠지만, 남겨진 이야기만은 독자들에게 오랜 느낌을 들 것이다.
오랜만에 참 포근하고, 재미있고, 추억속에서 달콤함을 느낄 수 있는 독서 시간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