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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팅 클럽
강영숙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오늘도 글을 쓴다.'
'오늘도 사진을 올리고 그에 맞는 멘트를 올려야 한다.'
인터넷의 공간이 생활의 습관처럼 되어버리면서 글쓰기는 거의 모든 사람의 가장 보편적인 일상이 된 듯하다.
글을 써야 하는 것이 어느 순간부터 책임과 의무가 되어버린 듯 하다.
책을 읽고 서평을 쓰는 취미를 가지면서 '나도 '글쓰기'에 합류했다.'라는 나만의 자부심을 느끼게 된다. 포토샵으로 일관된 사진 몇 개가 평범한 멘트와 함께 올려지면 최신 글, 인기 글 포스팅으로 기억되는 이 시간에 그래도 나는 책을 읽고 오로지 글로만 표현했기 때문에 그대로 다른 글보다는 진정한 '글을 썼다'라고 나름의 주장하고 싶다. 작가라는 타이틀은 아주아주 높은 곳에 올려져 있는 최고의 이상이지만 가상 공간에서 써내려가고 다른 이들에게 보여주는 '글쓰기'를 통해 독자들은 스스로 '작가'를 모방하는 '글쓰는 사람'이란 타이틀에 만족감을 가지게 된다.
<라이팅 클럽>이란 소설..., 글쓰기에 관한 또 다른 비밀, 노하우를 훔쳐볼 수 있는 글이 아닐까...기대를 했다면? 욕심 버리시길~!!
<라이팅 클럽>의 두 주인공, 싱글맘 김 작가와 그의 딸 영인의 팍팍한 삶 속에서도 놓지 않는 글쓰기에 대한 미련을 통해 독자들은 과연 내가 원하는 '글쓰기'란 무엇인가, 내가 하고 싶은 것이 '글쓰기'인가 아니면 나를 보여주고 싶은 발버둥일까를 생각하게 된다.
김 작가는 작가 지망생이다. 하지만, 등단도 하지 못했고, 내세울 만한 이력도 없는 그녀다. 그 여자는 왜 작가를 자칭하고 있을까? 아니 그녀의 주변 사람들은 왜 그녀를 작가로 지칭할까?
그것은 김 작가가 그저 다른 사람보다 문학적인 멘트를 조금 더 알고 있고, 글로 표현하려는 것을 문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었다는 것 때문에 작가의 타이틀이 어울린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녀의 글쓰기 교실에 들락거리는 사람들은 그녀의 등단이나 이력에 관심이 없다. 그저 입으로 하는 수다를 글로 표현하라고 채근해주는 그녀는 당연히 작가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무의식중에 인정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작가로 지칭할만한 그녀의 주변에 있으므로 아마도 그저 흘러가버릴 나의 수다가 글쓰기 소재 발굴을 위한 고매한 작업일 수도 있으므로 그녀의 글쓰기 교실은 늘 북적인다.
그녀의 글쓰기 교실은 그녀가 마음대로 자신을 우쭐하게 하는 공간이다. 동네 아줌마들이 모여 수다를 떠는 공간을 '글쓰기 교실'이라는 타이틀로 고상한 분위기에 젖어버리게 한다. 공간일 뿐이지만 그 속을 들락거리는 사람들은 문학을 알고, 글을 알고 예술을 안다고 스스로 위안한다. 이 공간을 벗어나면 김작가는 엄마로서 정말 불합격인 여자일 뿐인데...
그런 그녀를 한심하게 바라보는 그녀의 딸 영인이 있다. 영인 역시 삶의 목표가 있는 여자인가 할 정도로 갑갑한 인생을 살아간다. 삶의 목적이라는 것도 보이질 않고, 열정도 보이질 않는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생기면 받아들이고, 없으면 포기하는 뜨뜻미지근한 성격의 소유자 같다.
하지만, 이렇게 서로 다른 모녀의 공통점은 '글쓰기'라는 것이다.
누가 하라고 강요한 것도 아니다. 전문적으로 배운 것도 아니다. 그저 어쩌다가 글쓰기가 늘 생활의 주체가 되고, 삶의 기준점이 되는 것이다.
삶의 고단함 속에서 돌고도는 시간을 보내도 그녀들이 잡는 것은 바로 '글쓰기'이다. 무엇 때문에 '글쓰기'를 놓지 못하는 것일까.
내가 쓰고 싶은 글이 무엇인가를 물어본다.
내가 보여주고 싶은 글이 무엇인가를 물어본다.
<라이팅 클럽>은 독자들에게 이 두 가지를 물어보는 소설이다.
그래도 글이라고 끼적대는 독자들에게는 내가 쓰는 것이 글인지, 낙서인지, 아니면 내 삶을 타인에게 보여주고 공감을 얻고 싶은 우쭐함인지 생각해보는 잠깐의 쉼표를 이 소설을 통해 가져본다고 해야 할까?
서평이 숙제처럼 내 앞에 던져졌을 때 나는 그래도 글쓰기를 해야 한다는 책임감에 시간을 쪼개고, 시간을 보태면서 글을 써간다. (서평을 쓴다고 표현하는 자체가 참 부끄럽다라는 말은 하고 싶다.아직도 서평이란 글이 참 어렵기 때문이다. 표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짧은 서평 속에는 나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래서 서평이 재미있고, 글쓰기가 재미있다. 내 인생에 대한 그 무엇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 글을 읽고 뭐라고 답해주는 답글로 또 다른 만족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또 책을 읽고 글을 쓴다.
저 여자가 엄마 맞나? 싶은 김 작가보다는 그녀의 딸 영인의 삶이 파란만장하다. 때론 참 미적지근하다.
한국에서 살 때에나 멀리 미국에서 살 때에도 지지리 궁상으로 보이기도 하고, 도무지 열정이 없이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는 듯 보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녀가 겪는 그 모든 것은 바로 글쓰기의 핵심이다. 물론 본인은 깨닫지 못한다.
'인생은 죽을 때까지 배우는 것이라며?' 바로 그 얘기를 하고 있다.
너무도 당연한 인생의 답이지만 독자들은 그 틈새 속에서 느껴지는 일탈의 변명을 달콤하게 받아들인다.
'그래, 영인이 남자를 계속 만나고 헤어지는 것은 엄마의 모성이 그리워서 그것때문에 사랑이 그리워서 그러는 것이야.'
'그래도 작가가 되겠다고 끼적이는 것은 엄마보다 더 나은 인생을 살았다고 보여주고 싶은 반항심이야.'
'그렇게 무시하던 엄마의 글쓰기 교실을 따라 하는 것은 모전여전이지..인생이 그렇다며??'
영인의 삶을 따라가면서 독자들은 그녀가 작가가 되기 위해 필사적으로 글을 쓰려는 모습을 본다. 하지만, 풀리지 않는 글쓰기는 독자들 역시 답답함을 공감하게 된다. 독자들은 영인이 왜 제대로 된 글을 쓰지 못하는지를 감을 잡지만 정작 소설 속의 영인은 오만가지 삶의 팍팍함에 끌려다니는 모습만 보여준다.
인생의 굴곡을 돌고돌아 글쓰기에 녹여 표현해야 하는 것을 독자들은 영인의 삶에서 가늠한다.
다른 등장인물 J 작가를 주목하게 된다. 정확히 말하면 J 작가의 칙령에 눈길이 간다.
J 작가는 영인이 자신의 글을 평가해달라면서 만나게 되는 작가이다. 그녀도 안 보이는 이면 역시 팍팍할 것이라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 이는 독자 개인의 느낌이고,
오래된 카페의 고정적인 자리에 앉아 커피와 함께 늘 뭔가를 적고 있는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도 부럽다. 그녀가 영인에게 알려주는 일명 J 작가의 칙령은 독자들이 또다시 찾아봐야 하는 문학의 깊이, 작가의 깊이를 채울 수 있는 숨은 카드이기도 하다.
잉게보르크 바흐만의 『삼십세』, 하인리히 뵐의 소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토마스 만의 『마의 산』, 시몬느 베이유의 『노동일기』, 앙리 포시용의 『형태의 삶』, 마렉 플라스코의 『제8요일』,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과 『댈러웨이 부인』, 에이드리언 리치의 『더 이상 어머니는 없다』, 로제 마르탱 뒤 가르의 『티보 가의 사람들』, 잭 런던의 『강철군화』, 시몬느 보봐르의 『인간은 모두가 죽는다』, 이사벨 아옌데의 『파울라』, 세르반테스의 『돈 키호테』,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통상 관념 사전』 등등
그래도 '글쓰기'의 맛을 아는 독자들이라면 이 책을 읽어봐야 할 것 같다. 작가가 독자에게 들려주는 또 다른 '글쓰기'의 비밀일지도 모르니까.
영인은 글을 제대로 건져내지를 못하지만 J 작가가 일러주는 책은 꾸준히 읽는다. 영인의 느릿한 삶을 버티게 해주는 하나의 도구이기도 하다. 이는 독자들도 동참해서 함께 읽어갈 또 하나의 묘미이다.
다른 사람들이 글을 쓰고 그것을 보여줄 때는 참 쉽게 쓴다는 생각을 한다.
'참... 맛깔스러운 표현으로 쓴다.'
'참 솔직하게 쓴다.'
'글 속의 인생이나 나의 인생이나 별다르지 않구나.'
그래서 사람들은 글쓰기에 도전을 한다. 그저 나의 진실과 나의 정직함, 순수함이 있으면 글이 써지리라 기대를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글쓰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다.
똑같은 사건을 두고 받아들이는 관점이 다르듯이, 글쓰기라는 작업 자체는 똑같은 일임에도 각각 다른 노력을 요구할 때가 있다.
거의 모든 사람이 자신을 '글 쓰는 사람'으로 지칭한다.
하지만, 진정한 '글쓰기'를 위해 '글 쓰는 사람'이 가져야 하는 그 본질에 대해 되물어보는 소설이다.
글을 쓰는 직업인 '작가'를 원하는 것인지, 무심코 흘려보내기 아쉬운 내 삶의 진함을 남겨보고 싶은 '글쓰기'를 원하는 것인지 독자는 <라이팅 클럽>의 회원으로 자신을 들여다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