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 가고 싶어졌다.
난 움직이는걸 좋아하는 부류가 아니다.
낯선 곳으로의 여행이란 것도 아들이 학교 다닐 적에 숙제 차원에서 다녔던걸 제외하면,
전무하다시피 하다.
산촌 여행의 황홀
박원식 지음 / 창해 /
2009년 10월
그런 내가 '박원식'의 '산촌 여행의 황홀'을 읽다가는 그냥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어졌다.
절기상 대설을 하루 지났지만, 날은 꾸물꾸물한 것이 뭐라도 내릴 것만 같은 하늘이다.
오늘 같은 날 읽는 이 책은,
아궁이에 불지핀 방 아랫목에서 곶감으로 만든 수정과에 마침하게 구워진 군고구마를 먹는 기분이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한 부분은 '우복동 사상 박힌 순결한 산촌'이라는 제목의 '경북 상주시 화남면'꼭지이다.
경북 상주라고 하면 곶감의 고장이라지만,
이렇게 쪼로록 실에 꿴 곶감이라니, 보석으로 꿴 발보다 이쁘고 귀하다.
글이 어떻길래, 내가 이렇게 설레발을 치는지 맛보기 차원에서 조금만 옮겨보겠다.
학교도 단 한 곳이 없으며, 납작한 구멍가게와 겨우 간판만 달린 작은 식당이 각각 있다. 그밖에 연탄난로 연통이 처마 밑에서 덜렁거리는 다방이 하나 보인다. 그리고는 아무 것도 없다. 그저 낡고 허름한 인가가 여기저기 산재해 그나마 사람 사는 조짐을 증명할 뿐이다. 약도처럼 간략한 풍경이다.
생략법처럼 차라리 절묘한 구성이다. 이렇게 소소하고 미미한 구색을 걸친 면 소재지란 어디에도 다시 없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매우 이색적인 여행지에 도착한 게 틀림없다. 고도로 압축되고 극도로 정제된 풍경 속에 들어온 셈이다. 혹은 지나치게 남루하고 형편없이 침체한 경관 속에 놓여 있다. 어쨌거나 이색이며 이채다.
북풍이 달려와 앙칼진 한기를 끼얹는다. 그 써늘한 한풍으로 내장까지 맑게 씻기는 기분이다. 간밤의 술자리로 탁류처럼 흐려졌을 뱃속이 서서히 진정되고 이제 식욕이 입을 벌린다. 국도 변에 붙은 식당에 들어가 늦은 아침을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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쥔장은 적적한 산골을 좋아한다는 별난 여행자에게 일테면 자폐적 취향 같은 것을 느끼고 실소를 터뜨렸을 수도 있다.
지루할 수도 있지만, 조금만 더 보자.
내가 완전 매료된 구절은 이제부터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나는 고독이 많은 사람이지만 고립이나 자폐를 옹호할 까닭도 없다. 나를 유폐시키려는 듯 덮쳐오는 도시의 잡담에 가끔 환멸을 느낄 뿐이다. 소음과 풍문이 들끓는 도시에서 놓여나 고요한 산촌에 들어온 지금, 웅크렸던 의식이 환하게 열리는 걸 느끼고 있다.(94~95쪽)
도시에서 현기증이나 환멸 따위를 느낄 때면 가끔 이렇게 산촌에 심신을 치유하러 다녀오면 된다니 말이다.
제 스스로 여행이 가고 싶어졌다고 설레발 치는 걸 보면 이런 치유 방법이 여간 부럽지 않았나 보다.
개인적으로 감성에 쩔거나 수사가 화려한 글들은 좋아하지 않는데,
박원식은 예외로 놓아야 할 것 같다.
박원식과 더불어 문장의 수사가 화려한데도 불구하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관독일기'와 '폐사지 답사'시리즈를 낸 '이지누'다.
마음이 번거롭고 어쩌지 못하겠는 날,
아무데나 펼쳐서 아무렇게나 읽어도 참 좋다.
여행을 가고 싶지만, 번거롭기도 한 나는,
곶감 사진이나 바라보며 감을 입에 문다.
근데 홍시든 곶감이든 단감이든 상관없이,
감을 먹으면 영감이 마구 떠오르는게 아니라, 영감이 되는 느낌이지만 말이다.
오늘의 '1인1그림'은 '감을 몰래 먹고 시치미를 뚝 잡아떼는 여자'이다,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