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광화문 집회에 참여하여 체력을 탕진하고,
방전된 체력을 회복하겠다고 어젠 하루종일 방바닥과 딱 달라붙어 시체놀이를 했다.
잠이 보약이란다.
최근 박 대통령과 만난 종교계 인사는 "박 대통령이 예상과 달리 상당히 밝은 표정과 맑은 눈이었다. 그래서 '잠은 잘 주무시나 봅니다'라고 인사말을 건넸더니 미소를 지으며 '잠이 보약이에요'라고 하더라"라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는 보도도 있던데,
잠이 보약이라는 걸 모르는게 아니라,
너무 피곤하니 잠조차 오지 않아서 퀭한 채로 출근한 내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니,
밝은 표정과 맑은 눈을 가지고 있었다는 그니를 향하여 괜히 약이 오르고 빈정이 상하는 거라~--;
최진석이 쓴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을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데나 펼쳐서 읽는데 이런 구절이 나온다.
한 친구는 최진석의 노자는 사유의 폭을 확장시키는데 큰 도움이 될거라고 하던데...그건 잘 모르겠을 뿐이고.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
최진석 지음 / 소나무 /
2001년 12월
노자를 읽을 때 범하기 쉬운 오류 가운데 하나가 노자가 말하는 모든 가치를 상대적 차원으로 해소해 버리는 것이다. 이런 태도가 장자에게는 어느 정도 정당하나 노자에게는 그렇지 않다. 제 2장에서 선과 악, 미와 추를 상대적인 관계 속으로 해소하려는 시도들을 이미 비판한 적이 있다. 즉 악이 있어야 선도 있고, 추함이 있어야 미도 있다거나, 혹은 어떤 대상을 사람에 따라 추하게도 받아들이고 아름답게도 받아들인다는 등의 태도들이다.
그러나 노자가 지향하는 가치는 어느 한쪽을 분명히 가리키고 있다. 즉 경솔함보다는 중후함, 조급함보다는 안정됨, 추함보다는 아름다움, 악보다는 선, 남성성보다는 여성성, 강함보다는 부드러움, 굳셈보다는 약함, 채움보다는 비움, 불보다는 물 등이다. 물론 이런 것들이 어느 범위 안에서는 반대편과의 '관계'속에서 기능한다는 것도 인정한다.
ㆍㆍㆍㆍㆍㆍ
노자는 이 세계가 대립항들끼리의 상호 꼬임으로 되어 있다고 본다. 反이라는 운동경향을 매개로 대립항들이 서로 꼬여서 존재한다는 원칙을 도라는 글자로 나타낸다. 그런데 이런 원칙 아래 존재하는 세계나 이런 원칙을 충실히 이행하는 사람의 태도는 바로 앞에서 말한 대로 노자가 분명히 지향하는 어느 한편의 모습 즉 낮고 부러우며 여성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ㆍㆍㆍㆍㆍㆍ즉 가치론적으로 중립적이며 존재의 영역에만 관여하는 것들이다. 노자의 철학을 잘못 받아들여 가치 상대론으로 오해하는 일은 피해야 한다.
여기서도 노자는 중후함이 경솔함의 근본이 되고, 안정된 것이 조급함의 우두머리가 된다는 일반 원칙을 제시한다. 그런 후에 그것을 모델로 하여 통치자는 무기와 양식을 싣고 자신을 따신을 따르는 무거운 수레[輜重]곁을 떠나지 않는다. 즉 무슨 일을 하든지 중후함을 잃지 않는다는 뜻이다. 화려함이 그를 둘러싸고 있어도 그는 조용한 곳에서 초연한 태도를 잃지 않는다. 이렇게 해야 비로소 중후함을 잃지 않기 때문이다.(228~229쪽)
그동안 노자의 도덕경을 해설해 놓은 책을 판본을 바꿔가며 들이고,
개 중 몇 권은 읽는다고 이렇게 저렇게 들추기도 하였지만,
매번 제대로 읽지 못했다는 자괴감이 들었었다.
그러던 차에 강신주를 읽으면서 별개의 노자와 장자를 놓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뭉뚱그려 생각하기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요번에 이 책을 읽으면서 깨달은 것은 다소 충격적이기까지 한데,
그동안 나는 장자는 물론이거니와 노자도, 그 어떤 것들도...
기준을 정하고 거기서 비롯함이냐 말미암음이냐를 얘기하는 가치 상대론의 개념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노자가 말하는 것은 어떤 대상과 대립항들의 상호 꼬임인데,
이런 대립항들이 서로 꼬여서 존재하는 원칙을 '도'라는 글자로 나타낸다고 하는 것이다.
이걸 거칠게 요약해 보자면,
높음의 반대 개념으로 낮음, 불의 반대 개념으로 물...따위를 얘기했었고,
그걸 중간의 어떤 기준점을 놓고 비롯함이나 말미암음이나의 문제로 봤었는데,
그게 아니라,
높음과 낮춤이 서로 꼬여 존재하는데 그걸 '낮춤'으로 얘기하고,
불과 물의 꼬임을 '물과 같음'으로 얘기하는 식이다.
그러니 '낮춤'과 '물과 같음' 따위가 노자가 말하는 '도'인 것이다.
놀라웠던 또 한가지는,
공자, 맹자 따위는 정치를 하는 사람들의 통치 이념으로 익히 알았지만,
노자 마저도 '통치자는 어떠해야 한다고 제시'하는 그런 것인줄은 몰랐다.
노자의 사상 안에서 통치자들에게 조용한 곳에서 초연할 것을 요구하는 일이나,
자신을 고孤(부모가 없다는 의미), 과寡(남편을 잃은 홀어미), 불곡不穀(不善하다는 의미) 등으로 부르게 하는 것도 모두 자신을 낮추기 위한 외적인 장치들이라는 걸 보면,
노자가 말하는 도란 이런 것임을 알겠다.
하긴 나도 노자를 들먹일 깜냥은 아니고,
지금 그니에게 통치자의 통치 이념 따위를 기대하겠다는 것도 아니다.
구르미 그린 달빛 포토 에세이
KBS 구르미 그린 달빛 제작팀, 김민정.임예진 극본, 김성윤.백상훈 연출 /
열림원 / 2016년 11월
다만 내가 궁금한 것은,
박보검과 김유정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구르미 그린 달빛'을 봐도 그렇고,
수렴청정이나 세도정치를 하게 되면 왕들은 온갖 방법을 동원해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치던데,
직접 순실의 코앞에 그것들을 갖다 바치고,
밝은 눈과 맑은 표정으로 '잠이 보약'이라고 할 수 있는 정신 구조는 어찌된 것일까?
뇌가 없다고 눈물 짓던 허수아비나, 대통령 코스프레 놀이를 즐긴 찌질이나 지진아는 아니었을까?
잠자는 숲속의 공주라는 동화를 보면,
호기심 많은 공주가 물레에 찔려 영원한 잠에 빠진 것을,
잘 생긴 왕자가 나타나 입맞춤을 해줘서 잠에서 깨어난다.
잠이 보약이라는 또 다른 공주님은 호기심도 전혀 없는데다가,
한번 잠에 빠지면 그 미모를 보고 나타나 입맞춤을 해줄 왕자님 따윈 없으니,
옛날식 물레만 구하면 안성맞춤인데 말이다.
옛날식 물레가 요원하다면,
옛날식 다방에 앉아 도라지 위스키 한잔을 "찔끔찔끔' 아껴 마시면서 잠을 청해야 하려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