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여름 휴가는 '더글라스 케네디'의 '행복의 추구'와 더불어서였다.
이 책은 읽는 사람에 따라 각자 다른 관점의 독서가 가능한 그런 책이지 싶다.
난 원제 'The pursuit of Happiness'랑 관련해서 pursuit에 좀 연연했었는데,
역자가 공경희님인데, 요번 번역은 맘에 안 드는 부분이 좀 있다.
pursuit를 '추구'라고 번역한 것부터가 그렇다.
차라리 윌 스미스(?)가 나왔던 그 영화처럼 '행복을 찾아서'라고 번역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었다.
암튼 pursuit에 힘을 주어 읽느냐, Happiness에 힘을 주어 읽느냐, 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해석이 가능한 그런 책이어서 좋았다.
난 pursuit에 힘을 주어 읽었고,
pursuit의 주체로서의 나를 곧추세우는데 의미를 부여하려고 노력했다.
뭐, 내용이야 로맨스소설 같기도 하고,
미국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나처럼 얕은 앎을 가지고 이러니저러니 할 처지는 아니구 말이다.
암튼 많이 좋고 재밌는 책이라고 그냥 들이미는 수밖에 없겠다.
행복의 추구 1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공경희 옮김 /
밝은세상 / 2012년 6월
행복의 추구 2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공경희 옮김 /
밝은세상 / 2012년 6월
이 책을 읽으면서 혼자서 반대말 놀이를 했었다.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나 증오 정도가 되어야 할까, 아님 누군가의 싯구처럼 '사랑했었어'라고 해야할까?
모두 아닌것 같다, 사랑의 반대말은 무관심인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주제어, '용서'를 놓고 볼 때도 마찬가지이다.
용서를 '하고 못하고'는 반의어적 성격을 가졌지만 동의어다.
왜냐하면 용서를 '하고 못하고'는 차치해두고라도 이 모두가 마음 속에 관심을 가지고 있어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살면서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어쩌면,
사랑의 반대말이라고 하는 '미움''증오''사랑했었어' 따위,
용서의 반대말이라고 하는 '용서 못함''용서할 수 없어''용서하지 않을거야' 따위,
가 아니라, 무관심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용서에서 언어의 역할은 중요하지 않아. 단지 약간의 제스처만이 필요할 뿐이야. 제스처는 다른 제스처로 연결되면서 도미노 현상을 일으키지. 즉 다시 말해 누군가를 용서하면 자신도 용서받을 수 있게 되는 거야."(행복의 추구 2권, 401쪽)
다시 말해서,
사랑뿐만 아니라, 행복이나 증오, 용서 따위의 단어 모두 상대적이어서...
'더'와 '덜'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중량감이 다르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반대말이 될 수 있는 필요ㆍ충분 조건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사랑이나 행복 같은 달콤하고 말랑말랑한 말 뿐만 아니라,
용서 같은 단어도 어느 정도의 애정과 관심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어찌되었건 이 모두를 상대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사람들을 스치다가 1,2초쯤 눈이 마주쳤고, 그렇게 힐끗 쳐다본 것 뿐이었는데 45년이 흐른 뒤에도 그 순간을 생생히 기억하는 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둘은 (처음 만난게 맞아?) 할말이 뭐가 그리 많은지...
두 시간이나 하나로 이어지고 겹쳐지고 녹아드는 대화를 나눈다.
마치 대화를 나누는 게 운명인 사람들처럼 말이다.
우리는 길모퉁이의 작은 바로 갔다. 대화를 시작하고 나서 잠시도 멈추지 않고 두 시간이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치 대화를 나누는 게 운명인 사람들처럼. 대화가 하나로 이어지고 겹쳐지고 녹아들었다.(1권, 6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