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벗과의 대화
안대회 지음 / 민음사 / 2011년 7월
평점 :
품절


고등학교 때 국어선생님이 그러셨었다.

대학에 들어가 미팅이나 소개팅 할때 취미가 뭐냐 이딴 거 물어 보는 것도 웃기지만,

그런걸 물어봤을때 독서라고 대답하는 사람은 더 웃기는 거다.

그럴바엔 차라리 취미가 없다고 해라.

솔직히 대학에 들어가 미팅이나 소개팅을 해본 기억은 유감스럽게도 전무하시다.

 

세월이 한참 지났음에도 불구하고...어떤 국어적 지식보다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말이다.

미팅이나 소개팅 자리는 이제 요원한 일이겠지만,

설문지나 앙케이트 조사의 취미가 뭐냐고 묻는 빈칸을 만나거나 하면,

신중하게 한번 더 생각하는 척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서'라고 대답한다.

특기가 뭐냐고 묻는다면 아무 망설임없이 '혼자놀기' 라고 한다.

 

이건 뭘 의미이냐 하면,

내가 '독서'를 유달리 좋아하는 유형이 아니라, 상당히 소극적이고 사회성이 결여된 인간이라는 거다.

 

그런의미에서,

이 책 '천년 벗과의 대화'도 언뜻 보기에는 벗과의 교류를 예찬하는 책 같지만, 나 같이 생각하는 이가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저자 안대회선생은 좀 심드렁해 지실 수도 있을게다.

 

사람은 혼자 살 수는 없는 존재여서,

늘 누군가와 시간의 어떤 부분들을 함께 보낸다.

위로는 조부모, 선생님, 부모, 형제 자매, 자녀, 부부, 친구, 직장 동료 등...

옛사람들은 그 중 벗을 아주 중요시 하였는데,

연암 박지원은 '경보'라는 벗에게 보낸 답장 편지에서 '벗과의 인연'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공교롭고도 오묘하지요. 이다지도 인연이 딱 들어맞다니! 누가 그런 기회를 만들었을까요? 그대가 나보다 먼저 나지 않고, 내가 그대보다 뒤에 나지 않아서 한 세상에 같이 태어났고, 그대가 얼굴에 칼자국 내는 흉노족이 아니요 내가 이마에 문신하는 남만 사람이 아니라서 한 나라에 같이 태어났으며, 그대가 남쪽에 살지 않고 내가 북쪽에 살지 않아 한 마을에 같이 살고, 그대가 무인이 아니요 내가 농사꾼이 아니라서 함께 선비가 되었으니, 이야말로 크나큰 인연이요 크나큰 만남입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주고받는 대화가 구차하게 같거나 행하는 일이 구차하게 맞아 떨어진다면, 차라리 천년 전 옛사람과 벗하고, 백 세대 뒤의 사람을 미혹시키지 않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의미를 짐작해 보자면, 연암 박지원은 인연이 좋고 감사하긴 한데 아무나 다 벗으로 여기진 않는다...고 튕기고 계신 중이시다.

더불어 나누는 대화나 함께 하는 행동이 구차하다면,

차라리 천년 전 옛사람하고나 사귀어서 백 세대 뒤 사람에게 나쁜 본을 안보이고 미혹시키지 않는 것이 낫겠다고 하신다.

홀로 고고하게 책 속에서 벗을 찾겠다는 얘긴 즉슨 책이나 읽겠다, 이런 말일 게다.

 

한 시대 한 나라에 태어나서,

한 지방 한 마을에서 살고,

문인 출신으로 선비 집안에서 태어나,

벗으로 지내는 게 큰 인연이고 어쩌고 할 때는 언제고,

그렇게 진정한 친구라면서 어떻게 주고받는 대화가 좀 구차하거나 하는 행동이 좀 천박하기로서니,

그걸 트집잡나 싶었다.

 

게다가 연암 박지원으로 모자라서,

진정한 친구란 그저 만나서 무료한 시간을 때우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란다. 진정한 친구라면 함께하는 시간에 나누는 대화가 천박하지 않아야 할 것이며, 함께하는 행동이 더럽지 않아야 할 것이란다. 의기투합했다고 해서 모두 좋은 친구는 아니란다.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하다.(43쪽)'고 안대회 선생까지 거들고 나선다.

 

난 박지원이나 안대회의 입장과는 사뭇 다르다.

사람이 보이는 것에 미혹되기 쉬운 동물이니,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에 주고받는 대화와 하는 행동 등 눈에 보이는 것들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일단 내 안에 들여 내 사람이다 싶으면 그쯤은 '암씨랑도 않다'고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주고 받는 대화와 함께 하는 행동이 구차하면 얼마나 구차하고 천박하면 얼마나 천박하다고,

사람을 그런 것들로 등급을 매기고 경계를 나눈단 말인가?

이러고 앉은 나는 하는 말과 행동이 지독히 세련되지 못해서,

다시 말하면 지독히 촌스러워서  아직 그런 진정한 친구를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ㅋ~.

 

유유상종(類類相從)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대화가 구차하다는 얘기는 내가 내뱉는 말 또한 구차하다는 얘기일테고,

그의 행동이 천박하다는 얘기는, 응하는 나의 행동이라고 해서 고상할 턱이 만무하다.

그러니 나의 경우 지금 내 곁에 있는 이와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한게 아니라, 무엇을 하더라도 좋은 거다.

 

암튼, 이런 글을 읽다 보면...지금 내 곁에 벗이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무한 땡큐를 날리게 된다.

지금 내 곁의 벗이 천년 전과 백년 후를 넘나드는 귀한 인연이라는 걸 깨닫는다면,

함께하는 매 순간순간을 소중히 여겨야 되겠지만 곁에 있을땐 그 소중함을 금방 까먹는다.

내게 문제는 그것이다.

 

여기서, 내가 중심을 잡아 생각을 할 것이, 내가 빠지면 안되는 논리적 오류의 함정이 바로 이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벗(=친구)에 비견되는 걸로 책을 꼽았다는 것이지, 책에 비견되는 걸로 벗이 꼽히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책이 사람의 자리를 대신할 수는 없는 것이다.

 

책이 사람의 자리를 대신할 수 없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가 아닐까 싶다.

소극적이고 사회성이 결여된 사람일수록, 책만 읽고 사람을 소외시하다가는 독선에 빠질 수도 있다. 

하지만, 독서만으론 건전한 인격이 형성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걸 여러번 보았다.

특히 어려운 철학이나 사상, 논리 등을 만났을 때,

'곡학아세'에 빠지지 않기 위해선 여러 사람의 색다른 경험과 가르침이 적절히 맞물릴 필요가 있는데,

책만 읽어서는 나와 다른 사람의 색다른 경험을 만날 기회도 없고 의견을 조율하고 가르침을 받을 기회도 없어진다.

책이 주는 건 당위론적인 질문과 대답이어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데...

생물인 사람은 얼마든지 이렇게 저렇게 가변적으로 변할 수 있다.

당위론적이라는데서 고인 물을 끄집어내고,

고인물은 썪기마련이라는 것까지 생각이 미친다.

 

책이 만들어내는 논리구조는 매번 일정한데,

생물인 사람의 삶은 이리저리 움직여서 논리구조가 틀어지기도 하고, 뒤엉키기도 하고, 멈추섰기도 하고 늘 가변적이라는 거다.

인격형성에 어떤 영향을 어떻게 미칠지 짐작할 수 없어서 더 중요한 건지도 모르겠다.

 

하긴 바꿔 얘기하면, 천년 전과 백년 후를 넘나드는 책에 비견될 정도로...

나의 인격 형성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벗이니까 이런 것 저런 것 따져가며 신중해야 한다는게 저들의 입장인 것이고,

이 논리는 뫼비우스의 띠 마냥 돌고도는 것이 될지도 모른다.

 

어찌되었든 간에 책(=천년 벗)을 향하여서는 괴벽에 가까울 정도로 집착을 보이면서,

사람은 귀하게 여길 줄 모르는 날 한번쯤 반성할 필요가 있다.

 

천년 벗을 향하여 이런 집착을 보이는 사람들은 다른 벽을 갖기도 하는데,

꽃이 되기도 하고 차가 되기도 하고 그림이 되기도 한다.

 

병에 꽂는 꽃은 너무 풍성해도 너무 빈약해도 안 된다. 종수는 많아야 두셋이면 충분하다.

꽃 아래에서 향을 피워서는 안 된다. 차를 마실 때 과실을 놓아서는 안 되는 것과 같다. 차에는 참맛이 있어 단맛 쓴맛이 아니듯 꽃에는 참된 향기가 있어 향 연기가 아니다.

차를 마시며 보는 것이 최상이고, 대화를 나누며 보는 것이 그 다음이며, 술을 마시며 보는 것이 최하이다.

ㆍㆍㆍㆍㆍㆍ

내가 보기에, 내뱉는 말이 무미건조하고 면목이 가증스러운 세상 사람은 모두가 벽(癖)이 없는 사람들이다. 만약 진정으로 벽이 있다면 그 속에 푹 빠져 즐기느라 성명과 생사도 모조리 좋아하는 것에 맡길 터, 수전노나 관리 노릇에 관심이 미칠 겨를이 있을까 보냐?(59쪽)

 

반면 사람이 책과 과하게 친하게 지내면, 다른 뭔가에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를테면 운동을 싫어한다거나 소극적이라거나 사회성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단적인 예로,

이 책에는 병 중에 있거나 고독했던 많은 사람들이,

병과 싸우거나 고독에 대항하기 위해 수많은 책을 집어삼키듯 읽은 걸로 되어있다.

 

관심을 갖고 지켜본 바에 의하면,

이들은 책은 많이 읽었을지 모르지만, 책을 제대로 읽지는 못했지 싶다.

병과 싸우거나 고독에 대항하기 위해 읽는 책은 지식 습득의 측면에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인격형성에 미친 영향은 알 수 없는 것이다.

인격형성에 미친 영향을 알 수 없단 얘기는 곧, 병이나 고독으로 대치 될 수 있는 치열한 자기내면과의 싸움에서는 실패하였다는거다 .

툭하면 병에 잡아먹히고 고독에 침몰하였다고 되어 있으니 말이다.

 

암튼, 그래서 난 이 책을 내 맘대로 해석하고 싶다.

'천년 벗과의 대화'는 맘에 안 드는 벗 대신 책을 택하겠다...뭐, 그런 꿀꿀한 얘기가 아니라,

그렇게 좋은 책을 재껴 놓을 정도로 소중하게 내게 온 벗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보다 더 귀하게 여기고 대접해야 겠다...

뭐, 이런 역설을 담고 있다고...ㅋ~.

 

오랫만에 군더더기 없고 깔끔하면서 고졸한 문장의 매력에 흠뻑 빠져 들 수 있어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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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2-07-09 12:49   좋아요 0 | URL
내 안에 들여놓은 사람
이란 말이 참 좋네요 천년벗과의 대화란 제목도 참 좋고요
행간은 안 읽고 낱말만 주워읽는 하늘바람입니다

차트랑 2012-07-09 14:40   좋아요 0 | URL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사람....
저는 친구를 그렇게 말하고 싶더라구요.

'내 안에 들여놓은 사람'은 더 마음에 드는 표현인걸요^^
연암은 참으로 정녕 멋진 분입니다..

2012-07-09 15: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2-07-10 00:12   좋아요 0 | URL
저도 가끔은 독서를 좋아하는 제 성격을 사교성 부족으로 인해서 생긴 정신적 결핍을 어느 정도
해소(또는 극복)하기 위해서 형성된 것이라고 제 스스로 생각하곤 해요.
그래도 그러한 성격 형성의 이유를 내 자신 스스로의 문제점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게
좀 서글퍼지기도 하네요, 저도 아직 제대로 미팅이나 소개팅해본 적도 없는데,, ㅜㅜ
제가 예전에 오프라인 독서모임을 가져본 적이 있어서 느꼈는건데, 정말 성격은 제각각이더라도
취향과 취미가 비슷한 사람끼리 만나면 기분이 좋고 말이 통하더군요. 그리고 지금까지도 몇 몇 분들과
인연을 유지하고 있고요 ^^

숲노래 2012-07-10 05:16   좋아요 0 | URL
번역을 왜 '구차'로 했는지 모를 노릇이지만, 천 년 벗을 말하는 대목에서 '구차하다'는 좀 다른 뜻이리라 느껴요. 나도 '구차하게 굴며 말하는' 사람은 동무로 안 사귀거든요. 그러나, 내가 동무로 여기는 사람은 '무엇을 하든' 아랑곳하지 않아요. 이를테면 말투가 거칠든 개구진 짓을 하든 어리석은 짓을 해서 크게 손해를 보든 대수롭지 않아요. 그러나, '구차하게' 구는 사람이 기부나 선행을 한다 하더라도 그리 마음이 끌리지 않아요.

어떤 생각, 어떤 마음, 어떤 사랑, 어떤 삶인가를 돌아볼 노릇이겠지요. 그리고, '책'이라 하더라도 먼 옛날과 오늘날은 서로 다른 자리 다른 뜻일 텐데, 옛사람 책읽기를 다루는 오늘날 책들은 '책'을 제대로 못 짚는구나 싶기도 하네요...

루쉰P 2012-07-10 13:57   좋아요 0 | URL
허유 ^^ 날씨는 더운데 전 무얼 찾아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양철나무꾼님 저 돌아올거에요 ^^ 반드시!

2012-07-13 11:17   좋아요 0 | URL
재밌는 글이에요.
책과 벗. 둘 다 참 좋은 거잖아요? 근데 벗(사람)을 얻지 못하면 (할 수 없이) 책과 사귀고, 이런 우울한 얘기가 아니라, 벗만큼이나 소중한 책, 책보다 더 소중한 벗. 이런 얘기라서 이 페이퍼가 좋네요.
처음에 글 읽으면서 끝이 이렇게 갈 거라고 예측하지 못했어요. ㅎㅎㅎ
사실 저는 박지원의 저 글을 '벗이 드물어 책과 사귀는 자'에 대한 위로의 글로만 대했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책과 친구하는 것에 대한 경계 부분도 많이 공감하면서 읽었어요. 책과 친구하면서 고고한 사람이 되는 건 정말 너무 쉬운 일입니다. 쉬운 만큼 함정이 있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