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마흔의 언저리이다.
공자는 '불혹'이라고 하여 세상일에 정신을 빼앗겨 갈팡질팡하거나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게 되었다고 하는데,
그 논리대로라면 난 불혹의 나이에 한참 못 미쳤어야 하거나,
벌써 세상일에 미혹되지 않아야 하는데...이도 저도 아니니, 원~--;
그렇다고 공자도 터득하는데 40년이 걸린 그 불혹의 묘를 하루 아침에 터득할 수도 없는 일이고,
다른 사람의 삶을 엿보고 몸소 체화하여 한걸음 다가가는 수밖에 없다 싶다.
공자와 같은 훌륭한 학자도 40년 동안 전력을 다하여 공부하고 갈고 닦아서 도달한 경지인데,
나같은 범인이 마흔 언저리라고 하여 범접할 수 없음은 어쩜 당연지사인듯 하다.
다시 말해, 나이 마흔 언저리에서 '불혹'에 이르지 못했다고 부끄러워 하고 손 놓고 앉아 있을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삶을 엿보고 내 삶에 적용 익히고 체화하려고 노력하면 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삶을 엿볼 수 있는 가장 손 쉬운 방법이 책을 통한 간접경험이 아닐까 싶다.
시인의 서랍
이정록 지음 / 한겨레출판 /
2012년 4월
이 책 이정록 산문집 <시인의 서랍>은 그런 의미에서 펼쳐들게 되었다.
하긴 이 책 뿐만 아니라, 요즘 내가 펼쳐드는 모든 책은 다 그 연상선 상에 있었다.
이 시인은 '불주사'라는 시로 처음 만났다.
시가 수려하다기보다는, 꾸밈이 없고 수더분해서 좋았다.
그도 우리네 사람사는 세상의 일들을 고스란히 겪고있는 듯 느껴져...수선스럽거나 호들갑스럽지 않게,
다시말해 세상 일에 미혹되지 않고 감정이입할 수 있었다.
문턱이나 경계 따위가 없어 쉽게 다가갈 수 있었다.
이번엔, 그런 그의 산문집이다.
산문집은 시보다 형식적인 면만 보더라도 더 자유스럽다.
하지만, '불혹'을 '자유'와 등가(等價)로 놓기에는 기준과 방향이라는 제재가 따른다.
암튼, 그의 글은 시면 시, 산문이면 산문...일단 글이 뛰어나다.
하지만, 뭇사람들이(아니, 쟁쟁한 소설가들이) 그에게 소설을 쓰라고 했을 정도로, 이야기는 더 감칠맛이 난다.
소설을 쓰라는 권고에 대한 그의 대답 또한 일품인데,
"시 속에 소설을 뭉뚱그려 품어보겠습니다."
였단다.
불주사
- 이 정 록
내 왼 어깨에 있는 절이다
낭떠러지에 지은 절이라서
탑도 불전도 사라지고 없다
눈코 문드러진 마애불뿐이다
귀하지 않은 아들 어디 있겠냐만
어머니는 줄 한 번 더 섰단다
공짜라기에 예방주사를 두 번이나 맞혔단다
그게 덧나서 요 모양 요 꼴이 됐다고
등목 해줄 때마다 혀를 차신다
보건소장이 아주 좋은 거라고 해서
한 번 더 맞히려했는데 세 번째는 들켰단다
부처님도 자라는 흉터는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이것 때문에 가방 끈도 군대 삼년 소총 멜빵도
흘러내리지 않아 좋았다 말씀 드려도
내가 네 몸 버려놨다고 무식한 어미를 용서하란다
인연이란 게 본래 끈이 아닌가
내 왼 어깨엔 끈이란 끈
잘 건사해주는 불주사라는 절터가 있다
어려서부터 난 누군가의 오른 쪽에서만 잔다
하면 내 인연들은 법당마당 탑신이 아니겠는가
내 왼 어깨엔 어머니가 지어주신
불주사가 있다 손들고 나서려고만 하면
물구나무 서버리는 마애불이 산다
'불주사'말고 내가 아끼는 시는 '더딘 사랑'이라는 시인데,
시인 스스로가 읽고 또 읽어 건진 다섯 문장 중에 들어가는 시라는 걸 알게 되자 더욱 더 애착이 간다.
더딘 사랑
- 이 정 록 -
돌부처는
눈 한 번 감았다 뜨면 모래무덤이 된다
눈 깜짝할 사이도 없다
그대여
모든 게 순간이었다고 말하지 마라
달은 윙크 한 번 하는 데 한 달이나 걸린다
암튼, 그의 글들을 읽다보면 여기저기서 어머니가 무게있게 등장한다.
'불주사'란 시에서도 그랬었고,
이 '시인의 서랍'이란 산문집의 첫머리에서도 그렇다.
그의 어머니가 등장하는 책의 1/3까지는 시인과 어머니의 대화가 선문답 같은것이 너무 재밌어서 책속에 머리를 박고 헤어나지를 못했던 반면, 나머지 2/3는 책장을 설렁설렁 바람을 일으키며 넘겼다.
그러고 보면, 그의 불혹은, 다시 말해, 그가 쓰는 글의 원천은 아무래도 어머니인가 보다.
아니면, 어머니는 모든 불혹(= 미혹되지 아니함)의 원천인지도 모르겠다.
처음 '세상 모든 말의 뿌리는 모어母語다'라는 부분에서부터 어머니는 기선을 제압하고 들어간다.
표준어로 구사하여, 모든 사투리는 통역이 필요한 나의 경우에도,
'농사천재'라는 별명으로 통하는 어머니가 하시는 말씀이 따옴표 처리가 되어 책에 글자로 들어가 박혀 있는게 아쉬웠다.
첫 장을 채 넘기기도 전에,
오디오 북 같은 것이나 보이스 레코더로 따서, 어머니의 목소리를 리얼버젼으로 듣고 싶다는 열망으로 이어진다.
물론 글에서 그런 느낌이 들게 했다는것만으로도 충분히 글쓴이의 저력을 느낄 수 있는거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의 시 또는 산문 모두 소재의 일정 부분을 어머니가 담당하고 있고,
그런 그의 글들을 읽는 독자라면, 어머니를 향하여 새록새록 솟아나는 관심과 흥미는 어쩔 수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의 어머니는 '농사천재'일뿐만 아니라, 어찌보면 인생에 도통한 '도사'이시다.
가로등에서 빛이란 걸 배웠다고 했다가는 이내,
"인생 농사도 그늘 농사라고 혔지. 아내 그늘, 자식 그늘, 지 가슴속 그늘! 그 그늘을 잘 경작혀야 풍성한 가을이 온다고 말이여."
라며 그늘 예찬론자로 말을 바꾸지만,
그런 당신을 향하여,
"왜 이랬다 저랬다 말을 바꾸고 그러세요~?"
하며 툴툴거리게 되지는 않는다.
행여 이리 저리 늘어놓으시던 감칠맛 나던 얘기들이 쏙 들어가지나 않을까 그게 조심스럽다.
조용히 멍석을 내다 펴게 만드신다.
"그늘이 짙으면, 노을도 되고 단풍도 되는 거여. 사과도 홍시도 다 그늘이 고여서 여무는 거여. 뭣도 모르는 것들이 햇살에 익는다고 허지. ㆍㆍㆍㆍㆍㆍ."
이런게 제대로 된 불혹(= 미혹되지 아니함)이라고 하겠다.
그의 글에선 어머니 뿐만 아니라, 아버지도 일정 역할을 담당해 균형(=불혹)을 잡아주고 있다.
아버지의 지팡이에 새겨진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라'라는 글귀가 아버지의 유언이 되는 까닭은 그래서이다.
지팡이를 떠받들고 있는 걸레를 보고,
'그려, 걸레가 돼야지. 걸레는 저렇게 숭엄하지.'하는 것도 그렇고,
그가 쓰는 시는
'지팡이, 걸레, 행주, 발수건이지. 내가 쓰는 시는 이 네가지에다 주소를 둬야지. 그러다보면 시보다도 어렵다는 삶이란 녀석도 지팡이 짚으며 따라오겠지.'
라며 마음을 다잡는것도 불혹(= 미혹되지 아니함)에 다름 아니다.
난 여기서 지팡이의 종류와 효용에 대해서 잠깐 생각을 했다.
'걸을 때에 도움을 얻기 위하여 짚는 막대기'를 '지팡이'라고 한다.
크게 피켈(pikel)이라고 불리우는 등산용 지팡이와 노인용 지팡이로 나눌 수 있다.
등산용지팡이는 끝이 뾰족하게 되어 있어서, 짚는 용도 외에,
계곡의 물 깊이나 설산의 눈 깊이, 낙엽의 쌓임 정도를 가늠할 수 있게 해주고,
무엇보다 설산이나 빙벽을 오를 때 발판을 만들어주는 작업을 하기도 한다.
노인용 지팡이는 짚는 게 가장 큰 역할이다.
때문에 등산용 지팡이와 노인용 지팡이를 효용에 맞게 골라 드는게 중요하다.
등산객들이 노인용 지팡이를 드는 경우는 흔치 않으나,
개중에 나뭇가지를 아무렇게나 꺾어 짚는 용도로도 보조적 역할만 할뿐이고,
가늠하는 역할도, 작업용 삽 또는 곡괭이의 역할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내가 지팡이의 종류와 효용을 들먹인 이유는, 후자때문이다.
노인용 지팡이는 짚는 역할만을 담당한다.
신선이 드는 이리저리 꼬인 지팡이라면 한번쯤 멋스러움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으려나?
미적 기능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노인이 짚는 거니 우선 가벼워야 하겠고 그리고 체중을 지지할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해야 하겠다.
우리나라에선 '청려장'이라고 하여 명아주라는 한해살이 풀을 잘 말려 지팡이의 재료로 사용하곤 한다.
노인용 지팡이를 등산용 지팡이처럼 끝을 뾰족하게 하면 짚는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다.
보통은 고무캡을 씌워서 지지면을 넓히고 마찰을 최대화하여 잘 짚도록 하는데,
사용하면서 고무캡이 닳아 없어진 것을 방치하였다가 미끄러져 넘어져 다치는 것을 여러번 보았다.
세심한 관찰과 배려가 필요하겠다.
책의 다음 부분에서 한참, 아주 오래 머물렀다.
요즘 내 서재대문의 이름으로 사용하는 '안전거리 확보'와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너무 억지스러운지 모르겠지만, '안전거리 확보' 또한 내겐 불혹(= 미혹되지 아니함)으로 작용한다.
물끄러미, 마음속 하늘을 들여다본다.
누구에게나 눈물 몇 모금의 웅덩이는 있는 것이어서, 언제고 세상의 미꾸라지와 개구리는 내 안에서만 흙탕물을 일으킨다. 가슴속 하늘에는 황사 구름이 사철 부옇게 서려서, 도대체 이놈의 마음에 언제 모내기를 하고 추수를 마친단 말인가.
하지만, 누추한 삶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일은 얼마나 대견하고 고즈넉한 일인가. 내 마음에 안치해놓은 풍경 위에 나를 덧대어, 새로운 풍경으로 감싸 읽는 것은 얼마나 위무적인 일인가. 풍경은 자신의 영역 안으로 들어오는 자에게 부단한 치유의 능력을 보여준다.
오래도록 마음속 왜가리의 목덜미와 진흙 묻은 부리를 어루만질라치면, 못자리에 뜬 하늘처럼 나도 우련히 깊어지기도 하는 것이어서, 부끄러운 지난날들의 흙탕물이 고요히 가라앉는다. 마음의 앙금 안쪽에 실뿌리가 뻗는다. 부유하는 삶은 흐리다. 정처가 없다. 정처가 없으면 뿌리가 내리질 않는다. 뿌리를 기르지 않는 풍경은 힘이 없다. 바닥이 없다.
오늘 나는 작은 거울에 입김을 불어 넣고 이 말을 쓴다.
'물끄러미!'
아, 저녁 같은 이 말의 촉촉함에 나를 비빈다. 내치는 것도 아니고, 와락 껴안는 것도 아니다. '물끄러미'라는 말속에는 적정한 거리가 있다. 대상이 녹아서 나에게 스며들 때까지의 묽은 기다림이 있다. 째려보는 것도 아니고 쏘아보는 것도 아닌, '넌지시'가 있다. 몰아세우고 닦달하는 것이 아니라, 안쓰러운 나를 보리밥에 열무김치처럼 비비는 것. 비빔밥 옆 찬물 한 그릇의 눈을, 가슴에 들이는 것!
물끄러미, 오래 젖을 것! 풍경에 나를 덧대고, 내 안에 서려온 그늘이나 설움을 오래 문대며 들여다볼 것!(163~165쪽)
책을 통한 간접 경험임에도 불구하고, 이 시인의 그것들이 내게 깨달음을 주는 이유는...앞에서도 얘기했었지만,
그도 우리네와 마찬가지로 지지고 볶고 사람사는 세상을 살고 있기 때문이고,
사람 사는 세상의 일들을 겪은 그대로 꾸밈없이 담담하게 써내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내가 책을 통해 하는건 간접경험이지만,
이 시인이 하고 책에 적어내려간 것은 생생한 날 것, 직접적인 체험이어서...내게 감동적으로 와닿았던 것 같다.
공자같은 훌륭한 학자도 불혹이라는 것을 터득하고 체화하는데 40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모든 것은 자신이 직접 체험하였을때에만 아무리 보잘 것 없는 결과를 낳더라도 자신의 것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 구절은 내게 '불혹'이고 '지팡이'이고,
때문에 'insure safety distance'인 셈이다.
그러나 손길은 바로 곁에 있을 때만 유효하다. 손길이 닿아야 할 곳이 멀다면 그곳까지 손을 옮길 수 있는 것은 발길이다. 가닿아야 할 손길이 사랑의 편지이거나 책과 옷을 묶은 소포라면, 그 발길은 우표와 우체부가 대신할 것이다. 빨리 뛰어가야 할 손길이 돈이라면, 금융기관의 온라인과 체신부의 우편환이 발길이 되어줄 것이다. 빈손으로 가는 가난한 손길이라면 그 손길의 따뜻함은 다리품만이 온전히 가지고 갈 수 있다.(167쪽)
그런 후에야 '파파로티와 친구들'이나 'live like horses'따위를 들먹이지 않고도, '불혹'과 '지팡이'를 맘껏 얘기할 수 있겠다.
4집 For War Child - 1996년 실황 /ABCD006
유니버설뮤직 / 2000년 1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