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젖은 단풍나무
- 이 면 우 -
아주 오래 전 내가 처음 들어선 숲엔 비가 내렸다
오솔길 초록빛 따라가다가 아, 그만 숨이 탁 막혔다
단풍나무 한 그루 돌연 앞을 막아섰던 때문이다 그
젖은 단풍나무, 여름숲에서 저 혼자 피처럼 붉은 잎
사귀, 나는 황급히 숲을 빠져나왔다 어디선가 물먹
은 포풀린을 쫘악 찢는 외마디 새울음, 젖은 숲 젖
은 마음을 세차게 흔들었다.
살면서 문득 그 단풍나무를 떠올린다 저 혼자 붉
은 단풍나무처럼 누구라도 마지막엔 외롭게 견뎌내
야 한다 나는 모든 이들이 저마다 이 숲의 단풍나무
라 생각했다 그대 바로 지금, 느닷없이 고통의 전면
에 나서고 이윽고 여울 빠른 물살에 실린 붉은 잎사
귀, 군중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누구라도 상처 하
나쯤은 꼭 지니고 가기 마련이다.
멀리서 보면 초록숲이지만 그 속엔 단풍나무가
있고 때론 비 젖은 잎, 여윈 손처럼 내밀었다 아주
오래 전 내가 처음 들어선 숲엔 말없음표 같은 비
후두두둑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때 나는 내미는
낯선 손을 어떻게 잡아야할지 아직 몰랐다 다만 여
름숲은 초록빛이어야 한다고 너무 쉽게 믿어버렸다
그 단풍나무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고통에 관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 그렇다.
이렇게 살다가, 누구라도 한 번쯤은 자신의 세운
두 무릎 사이에 피곤한 이마를 묻을 때 감은 눈 속
따듯이 밝히는 한 그루 젖은 단풍나무를 보리라.
지금이 꼭 가을이 아니라도
요 며칠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는 대신, 엉덩이 곁에 발을 들어올리고 무릎을 곧추 세우는 꼴로 어색하게 앉아 있었다.
누군가는 이런 나를 보고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의 female 버젼이라고 추켜세우기도 했고,
누군가는 빨리 화장실로 가라고 몰아내려 하기도 했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그런 고난도의 자세를 구사할 수 있는 신체의 유연성에 감탄스러울 뿐이긴 하지만...
그런 자세를 하고 있는 것까지는 괜찮은데,
그 자세를 허물어뜨려 원상복귀하기까지의 그 고통이 만만치 않은 걸 자꾸 까먹고 또 그 자세를 취하니 그게 문제다.
만 가지 행동
김형경 지음 / 사람풍경 /
2012년 2월
"저도 답답했어요. 선생님은 자꾸만 '두성을 쓰란 말이야.' 하시지만, 그걸 쓸 줄 알았으면 벌써 썼지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갑자기 무엇인가를 알아차렸다. 그동안 내가 책에서 했던 말들도 저 멘토의 말과 같았구나 싶었다.
ㆍㆍㆍㆍㆍㆍ
훈습의 구체적 방법이나 내용은커녕 용어의 의미조차 밝히지 않았다. 그러고보니 사석에서 지인들이 "그런 얘기를 책으로 써 달라."고 했던 내용들은 훈습 과정의 개인적 경험이었고, 그 과정에서 내가 실천한 행동들에 대한 내용이었다.(7쪽)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프로이트가 정의한 작업이 먼저 이행되고 나면 엡스타인이 정의한 상태가 뒤따라오는 것 같았다. 무의식 깊이 밀어 넣은 후 억압, 회피해 온 정서의 부정적인 측면들을 의식 속으로 되찾아 오면 저절로 관점의 변화가 일어났다. 먼저 자신을 바라보는 시각이 변하고, 다음으로 타인을 보는 관점에 변화가 왔다. 이어서 세상을 보는 틀이 바뀌고, 그 다음에야 새로운 정체성이 만들어졌다.(27쪽)
훈습 기간 중 분리되기만큼 어려운 것은 '경계지키기'였다. 예전 방식은 버렸어도, 어디서든 새롭게 친밀한 관계를 맺고 싶어하는 이들을 만나게 되었다.(73쪽)
'성실하게 살되,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않는(65쪽)' 교과서대로만 살면 될 줄 알았고, 그렇게 살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어른이니까, 나의 마음 하나 쯤은 이미 내 마음대로 컨트롤 하고 산다고 생각했었다.
적어도 누군가를 치료하고 사니까, 그게 감정이입을 하고 사는 거라고 착각을 했었나 보다.
요즘들어, 누군가를 치료하는 건 반대로 철저히 나를 배제하는 거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오히려 누군가를 지켜보고 바라보기만 해야하는 일이, 표현하지 못하고 염원하기만 하는 일이...
어쩜 '나'라는 나무의 겉줄기나 외관은 그대로 둔채, 보이지 않는 물관과 체관만을 그에게로 향하고 행하게 하는,
그런 서글프고 비겁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의 김형경님처럼, 남에게 내 삶의 나뭇가지 하나 기대지 않는 것이 어른이라고 생각했었다.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고,
모두에게 적당히 친절하며,
냉철하고 지적이며 시니컬한 미소를 구사할 줄 아는, 그렇지만 감정표현을 하는데 있어서 서툴지 않은 사람.
그런 완벽한 사람을 어른이라고 그려놓고 있었지만, 그건 단지 내가 그려놓은 이상향이었을 뿐...
나는 아직 어른이 아니었나 보다, 누군가의 말대로 채 자라지 못한 내면아이가 여전히 울고 있었나 보다.
이 책의 김형경같은 생각을 되풀이했다.
"누구 안 아픈 사람이 있겠어? 살아가면서 저 밑바닥까지 떨어진 것 같은 느낌에 혼자 웅크려서 울어 보지 않은 사람이 있겠어?"
누구나, 누구나, 누구나...다 아프고 다 괴로울 것이다.
그런 인정 만으로도 버거운데...누구나의 틈을 뚫고 '누군가'가 슬며시 자리한다.
'누구나'에서 '누군가'로 '분리'되기도 버거웠는데...이번엔 '경계지키기'를 요구한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는 침묵해야 한다는데...
"중도는 흑도 아니고 백도 아닌 어중간한 중간 상태가 아니다. 흑과 백이 분리되기 이전, 너와 내가 분리되기 이전의 상태를 중도라 한다."
라는 어려운 말을 인용하려다가,
쿨하게 내 식대로 가기로 했다.
'경계 - 금'은 넘으라고 있는거야~!'
루시드 폴(Lucid Fall) 정규 4집 - 레미제라블
루시드 폴 (Lucid Fall) 노래 / 씨제이 이앤엠 (구 엠넷) /
2009년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