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세레레 1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22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 지음, 이세욱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평점 :
절판


나는 오히려 그럴때 감동한다.

진수성찬이나 고량진미가 아니라,

내 식성과 양을 파악하여 입맛을 돋구는 음식을 안성맞춤하게 내어,

밥풀 한톨, 국물 한방울 허투루 남기지 않게 하는 그런 상차림일 경우.

상 위의 그릇이란 그릇은 말끔히 비우게 만들었을때.

산해진미라도 내가 못먹는 음식이이어서,

예의상 젓가락으로 몇번  깨작거리다 마는 경우라면 도무지 감동을 할 수가 없다.

 

이 책이 내게 그랬다.

장르소설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좀 잔인하다 싶은건 잘 읽지 못한다.

그게 영화라면 좀 더 심각해지는데, 시각적 잔상이 너무 오래 남아 붙들기 때문이다.
이 책은 상상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읽었다.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는 '검은선'으로 만났다.
시각적 잔인성이나, 반전, 충격적인 요소 모든 면에서 '검은선'이 더 심했다.

 

요번에는 좀 덜하다.
그리고 여자가 나오지 않는다. 

장르소설만의 어떤 강렬한 한방을 원하는 사람의 기대에 살짝 못미칠 수 있겠지만,
그랑제의 매력을 아는 경우라면, 이 작품이 best는 아니어도 흠뻑 빠져 들 수 있다.

내 경우, 이세욱 님의 번역이라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문학작품을 만난 듯 설레였고,
두권으로의 분권이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문학동네의 출판 기획력 또한 흠잡을 곳 없었다.

이젠 블렉펜 클럽 시리즈라면 망설이지 않고 골라도 될 것 같다.

이세욱 님의 학문하듯 공들인 번역, 문학동네의 출판 기획력, 장르소설로써의 가독력...

이 셋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물론 이세욱 님의 손을 번쩍 들어주겠지만 말이다.

다른 사람의 번역이었더라면 아무래도 그랑제만의 독특한 매력을 제대로 맛보기 힘들었을거란 생각이 든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와 움베르토 에코의 책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다른 언어 번역본까지 참고하시는 걸 보고,

이 분의 실력(실력을 평가할 깜냥이 안되는 고로)이 아니라 노력과 열정을 존경하게 되었다.

 

그랑제의 前作 두 작품을 번역하셨던 역자 이세욱 님은,

이번 작품에서도 문화적 이질감을 줄이면서도 그랑제만의 독특한 작품성을 제대로 살리고 전달하기 위하여,

작가를 직접 만나 인터뷰를 하기도 하고,

책 속의 인물들이 움직인 공간들을 실제로 방문하여 사진으로 남기기도 하고,
소설 속에 등장하는 종교와 음악에 대해서도 조사를 하여 출판사 온라인 카페에 올려 놓기도 하셨다.

종이로 만든 책 밑에 번역자가 주석을 다는 기존의 방식이,

소설에 불쑥 개입하여 서스펜스를 감소시키게 될까봐... 출판사 온라인 카페를 이용하셨단다.

근데 이건 종이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소외시키는 것 같아 좀 서운해지려한다.
책 하단의 주석이 꺼려진다면 책 뒷면의  몇장을 할애하는건 어땠을까?
책을 두권으로 나눌것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화보집이나 미세레레 CD를 사은품으로 만드는 건 어땠을까?
이런 시청각 자료가 아쉬웠다.

암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그런 것들에 이 책이 가리워진다면 그건 더 아쉬울 그런 책이다.

 

프랑스 소설이다.

파리의 아르메니아 성당에서 벌어진 독일계 칠레인 성가대 지휘자의 살인사건을 다룬 종교와 음악을 넘나드는 소재이다.

 

위의 두 전제만으로도 독서의 방향 잡기가 살짝 혼란스러웠었다.
요번엔 도대체 무얼 갈등의 중심으로 삼으려는 거지?

이념간의 갈등인가, 아님 종교간의 갈등인가, 그것도 아님 다수 민족과 소수 민족 간의 대립인가?
때문에 흠뻑 담금질하기가, 감정이입하기가 좀 머뭇거려졌다.
작가는 이런 문화적 이질감을 염두에 두고 배려한 듯, 아주 세세하고 작은 부분까지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이런 배려들은 개연성이 되어 감정 이입할 수 있는 장점이 될 수도 있다지만,
너무 많은 정보를 제공하려다 보니 만연체가 되어버려 자칫 늘어지고 지루한 감마저 들었다.

(난 어찌되었든(?) 장르소설의 생명은  긴장감과 급박함이라고 생각하는 부류인가 보다~ㅠ.ㅠ)

 

근데, 가만 생각해 보니...감정 이입을 할 수 없었던 이유가 이런 자세한 설명 때문이 아니라, 갈등의 경계가 모호한데 있었다.
연쇄살인범을 추적하는 두형사(한 번도 신분을 제대로 드러내지 않았던 비밀과 고통을 품은 카스단과 마약을 투여하면서라도 잊으려 애썼던 트라우마를 가진 볼로킨)가 등장하는데 그럼 그들은 善인가?
결국 惡이 파멸되는 것으로 나오는데, 그렇다면 악은 완전 사라지는 것일까?
본인도 모르게 악을 행사하는 그 어린 합창단원은 악인가, 선인가?

그리고 과거 악을 경험하고 악에 충분히 노출되었던, 그리고 지금 자신들의 의지로 악에 대항하고 있는 두 형사는 악인가, 선인가?

 

내가 기실 궁금한건, 두 형사와 본인도 모르게 악을 행사한 어린 합창단원의 지금이 아닌 '미래'이다.
장르소설을 읽다보면, 간혹 모든 인간이 통째로 편먹고 외계생명체나 로봇과 갈등과 대립을 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인간들 사이'에서 국가나 종교나 이념적 이해관계에 따라...갈등과 대립을 하고, 동지나 적이 되기도 하며, 선악을 나누기도 한다.

이 선악을 나누는 차이는 대단한 것이 아닐 때도 있으며, 때론 아주 사소하기도 하고, 심지어 경계선에 있어서 구별이 모호한 경우도 있다.

 

선과 악은 낮과 밤, 또는 빛과 그림자이다.
낮이 없으면 밤이 없듯이, 선이 없으면 악은 존재 할 수가 없다.
이렇듯 선과 악은 상대적인 개념이다.

우리는 히틀러가 600만명의 유태인을 학살 했다고 해서 극악하다고 한다.
그런데 구약을 읽다 보면 하나님은 자기를 안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부족을 침략하여 약탈, 강간, 살인하라고 하고...심지어는 임산부의 배를 가르고 태아를 꺼내라고 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극악하다고 하는 히틀러의 만행과, (비록 구약에 기록될 뿐이지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선하고 선하신 것으로 알고있는 하나님이 행한 업적과 무엇이 다른가?

그렇기 때문에 한가지 기준이 필요하겠다.
선과 악은 시대적 문화적 배경에 따라서 달라져야 하며, 또 인간의 선악은 '인간'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

 

성가곡 '미세레레'에서 '칼 오르프'의 '카르미나 브라나'를 떠올리다.

 

'미세레레'는 '그레고리오 알레그리'가 작곡한 성가곡 제목에서 따온 것으로,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뜻의 라틴어란다.

예전에도 몇번 들어본 적이 있지만, 주의 깊게 듣지 않아서 그런지...항상 음악이 귀를 비껴간다는 느낌이 들었던 터라,

성가곡 한곡으로 이런 소설을 만들이낸 그랑제가 대단하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주의깊게 듣다보면 감동과 매력의 요소가 여럿 있을테지만, 내가 찾아낸 것은 여자인 나도 내기 힘든 곱고 높은 미성 정도였다.

여성이 금지되었던 당시 교회음악에서 이처럼 높은 음이 사용된 것은 뛰어난 카스트라토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추측되는데...그렇게 본다면, 자신의 성을 제대로 발현하고 살지 못하는 것은...그것이 제 아무리 신을 향한 그것이라 할지라도,

더우기 자신의 성에 눈을 뜨기 전의 소년들이어서 '불쌍히 여기소서'가 꼭 그들에게 맞춤한 것처럼 느껴졌다.

성가곡 '미세레레'에서 영감을 받아 씌여진 소설 '미세레레'또한, 그래서인지 변성기를 거치기 전 소년들의 목소리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된 수단이자 도구가 된다.

이쯤에서 생각나는게 칼 오르프(CARL ORFF)의 카르미나 브라나(Carmina brana)이다.

'그레고리오 알레그리'의 '미세레레'가 종교적인 음악이라면,

그 무렵 음악을 했던 칼 오르프(CARL ORFF)는 유럽을 짓누르고 있던 종교의 권위를 마음껏 조롱하는 음악을 했다.

 

카스단은 곡명과 작곡자 이름의 대비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불쌍히 여기소서' 라는 뜻의 미세레레라는 제목은 비통한 느낌을 주는 데에 반해서 알레고리라는 이름은 명랑함, 축제, 환희를 연상시켰다. 

 그때 갑자기 헤드폰에서 아주 높은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날카롭고도 부드러운 목소리. 그 부드러움이 너무나 기이하고 강렬해서 듣는 사람의 내면에 있는 무언가를 깨뜨리고 순식간에 목이 메게 하는 목소리. 누구도 따라 올라갈 수 없는 높이에 다다른 소년의 목소리. 마치 세상 위로 솟구치듯이 화음들에서 떨어져나가 아주 높은 선율을 따라가는 목소리.

 카스단은 눈앞이 흐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세상에, 망인의 집에서 한밤중에 헤드폰을 쓰고 외과용 장갑을 낀 채로 바닥에 앉아 눈물을 흘릴 판이었다.ㆍㆍㆍㆍㆍㆍ레지스 마주아에라는 어린 성가대원의 힘이었다. 소년은 오로지 목소리 하나로 듣는 사람의 가장 깊은 곳에 감춰진 슬픔을 되살리고 사라진 사람들을 다시 불러낸 것이었다.(1권/73쪽)

 

미세레레- 번역과 편집에 대하여


번역의 훌륭함은 앞에서도 얘기했었고, 옥의 티를 살펴 보겠다.

나무딸기 빛깔의 모조가죽(1권/11쪽)

 raspberry는 라즈베리로 적어주면 되지 않을까? '나무딸기'가 오히려 어색하고 겉도는 느낌이었다.

 (맞춤법, 외래어 표기 용례집'일반 용어'참조) 

 

"그래, 고막과 가운데귀를 뚫었어.

ㆍㆍㆍㆍㆍㆍ

 살인자는 양쪽 귀에 어떤 뾰족한 것을 난폭하게 찔러넣은 것으로 보여.

ㆍㆍㆍㆍㆍㆍ"(1권/39쪽)

위에서 '가운데귀'를 '중이'로 고쳐주는게 나을 것 같다.

귀의 세부 명칭중에 '중이'가  '가운데귀'로 대치될 수 있는 것은 맞지만...
'가운데귀'가 됐을 경우, 밑에 나오는 '양쪽 귀'와 관련 '가운데 귀'로 오해의 소지가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에게도 아킬레스건이 있었다. 아이언맨은 심장에 결함이 있고 슈퍼맨은 신비의 물질 크립토나이트에 민감한 것처럼ㆍㆍㆍㆍㆍㆍ(1권/128쪽)

이 부분도 좀 아쉬웠다. 아킬레스건은 '약점'이라는 뜻으로 쓰였을텐데...

의약학 용어와 음악용어가 짬뽕이 되어 나오는 내용 전개 상, 아킬레스건이라고 하니 해부학적 부위가 먼저 생각났다.

 

다음은 말 그대로 오자이다.

 

그 결핍과 그에 따른 기능장애는 오르지(오로지) 마약으로만 치료할 수 있었다.(1권/203쪽)

 

유대인 대학살을 주도했던 하인리히 힘러는 트레블린카 강제스용소를 방문하면서 제 거동이 (편)한 것에만 신경을 썼다.(1권/365쪽)

 

되작이다, 궁굴렸다 , 베돌이, 버르집다, 기신기신, 동을 달다, 뭇매를 놓고... 같은 표현 만으로 충분히 이세욱님의 우리말 벼리는 실력을 가늠할 수 있었다.

 

미세레레 - '불쌍히 여기소서' 기원의 대상

 

"그는 우리와 차원이 달랐소. 달라도 이만저만 달랐던 게 아니오."

ㆍㆍㆍㆍㆍㆍ

"그는 이를테면ㆍㆍㆍㆍㆍㆍ내부로부터 고통을 가하는 기술에 훤했소."

ㆍㆍㆍㆍㆍㆍ
"하르트만은 자기 자신을 상대로 그 기술들을 실험했소. 그는 신비주의자였어요. 고통을 통한 회개, 그것이 아마 그가 추구한 길이었을 거요. 그는 벌을 삶의 목적이자 수단으로 생각하는 광신자였소. 제 몸을 훼손하고 저 자신을 고문하는 진짜 미치광이였소."(1권/355쪽)

 

"ㆍㆍㆍㆍㆍㆍ증오는 인간이 가장 널리 공유하고 있는 자질이죠."

"여전히 이해가 안 가는군요."

연구원은 팔짱을 끼었다. 미소가 번질 듯 말 듯 입가에 매달려 있었다. 그 미소는 종유석 끝에 달린 차가운 물방울과 비슷했다. 물방울이 아슬아슬하게나마 종유석에 붙어 있는 동안에는 그것이 생생하게 반짝인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하지만 물방울이 땅바닥에 떨어져 부서지는 순간 그것의 참모습이 드러났다. 그건 한방울의 눈물이었다.(1권/387쪽)

 

"그것도 장사라면 장사지. 하지만 그는 아주 특이한 상품을 팔고 있소.ㆍㆍㆍㆍㆍㆍ고통이라오."(2권/84쪽)
"우리 클럽은 어릿광대 놀음이오. 나는 이제 고통에 대해서, 진짜 고통에 대해서 말하려는 거요."

"무슨 차이가 있지?"
"공포를 느낀다는 점에서 다르지요. 여기에서는 모두가 시늉만 하는거요. 손만 들어올리면 당장 고통이 멎는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소. 진짜 고통이 언제 시작되는 줄 아시오? 고통을 가하는 자의 의지 말고는 아무 제약이 없을 때요. 그 정도는 되어야 비로소 고통에 대해 말할 수 있소."(2권/105쪽)

세상은 그리 만만하고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다.
누구나 나름대로의 고통을 갖고 살아간다.

육체적 고통의 해소를 위해서 병원이, 정신적 고통의 해소를 위해서 종교가 생겨나게 된다.

'미세레레' 같은 종교음악만 해도 그렇다.

불특정 다수의 일반적 고통을 특정한 몇몇의 깊숙한 통증으로 바꾸어 놓는 것을 '고문'이라고 하는데,

얼마전 별세하신 김근태 님의 고문기술자로 명성을 날렸던 이근안의 목사직을 두고 말이 많았었다.

나는 그때 고문을 했었던 과거의 행위나 그런 그가 목사가 된 것이 문제가 아니라,

뉘우치지 못하고 현재까지 이어지는 그의 태도와 정신 상태가 문제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는 얼마전까지도 자신은 '고문기술자가 아닌 애국자이며, 자신은 그 중 꽃'이라는 웃지 못할 소리를 했었다.

 

암튼 그는 목사직에서 면직되었다.

'고통을 가하는 자의 의지 말고는 아무 제약이 없'는 진짜 고통 자체를 두려워 하고 불쌍히 여기기도 해야 할텐데...

나는 이근안이 생각나서 그런지, 고통을 받는자보단 고통을 주는자가 가여운 것 같다. 

 

미세레레 - 죽음과 중독 사이 

 

한순간 카스단은 죽은 사람의 영원한 안식을 부럽게 여겼다. 예전에 생각하기로는 나이가 들면 죽음에 대하여 참을 수 없는 불안과 공포를 느끼게 되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실상은 그 반대였다. 해가 갈수록 어서 죽고 싶은 마음, 자석에 이끌리듯 죽음에 다가가려는 마음이 새록새록 더해갔다.(1권/12쪽)

 

그는 비로소 깨달았다. 커피 끓이는 일에 각별한 정성을 들이는 것이 마약을 준비하는 의식과 닮았다는 것을.(1권/81쪽)

 

데파코트는 기분 장애를 치료하는 약이고, 세로플렉스는 신세대 항우울제다. 그런데 두 약이 합쳐지면 신비로운 평형이 이루어진다. 덕분에 그는 기분 장애의 늪에 빠지지 않고 비교적 평온하게 살아갈 수 있었다.(1권/88쪽)

 

카스단은 두 개의 잔에 커피를 따르고 욕실로 갔다. 9시 30분. 약을 먹어야 할 시간이 지나 있었다.ㆍㆍㆍㆍㆍㆍ평소보다 늦었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시간을 맞추지 못해서 약효가 떨어질까봐 늘 전전긍긍해온 터였다. 그는 물 한 잔을 곁들여 알약을 먹었다. 그러면서 볼로킨을 생각했다. 누구에게나 저마다의 마약이 있는 셈이었다.(1권/337쪽)

 

"신경증이란 마약을 복용하지 않는 사람의 마약이다."

볼로킨은 가방을 고쳐메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을 이해한 것은 아니었지만, 자기 자신을 놓고 보면 한 마디를 덧붙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저는 두 가지를 아우르고 있어요. 마약중독자이면서 신경증 환자이니까요ㆍㆍㆍㆍㆍㆍ(2권/31쪽)

죽음과 중독의 공통점은 둘 다 치명적이라는 거다.

카스단과 볼로킨은 겉으로 소리내어 얘기하고 있지는 않지만, 각자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고, 그 트라우마로 인해 한사람은 약물에, 다른 한사람은 마약에 중독되어 생사를 넘나들었던 경험이 있다.

그리고 연쇄살인범을 수사해 나가는 과정에서 그들은 각자의 트라우마에 부딪히게 되고, 그 트라우마를 눈물겹게 이겨낸다.

 

퇴직하고 나서 처음 얼마동안 카스단은 인터넷에 취미를 붙였다. 이 새로운 소일거리를 통해서 즐거움을 얻을 수 있으리라 지레 기대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이내 환멸을 느꼈다. 웹의 세계는 피상적이고 뉘앙스나 깊이를 일절 고려하지 않는 듯했다. 이를테면 패스트푸드 같은 정보가 범람하는 세계였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말하는 '인간을 소외시키는 기계'였다. (1권/177쪽)

 

"아뇨. 이제는 아스키코드라는 특별한 부호체계를 가지고 컴퓨터에게 말을 걸어야 해요. 차원이 다른 거죠. 꽤 복잡해 보이지만 이것 나름의 논리를 파악해야 해요. 기계들에게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는 그것들의 언어로 말을 걸어야 하고 그것들의 논리를 따라야 해요."(1권/180쪽)

위의 글, 컴퓨터를 대하는 태도로 미루어 볼때 짐작할 수 있듯이 카스단과 볼로킨의 중독을 받아들이는 입장은 다르다.

카스단은 이내 환멸을 느끼고 인간을 소외시키는 기계라고 무시해 버리지만,

볼로킨은 중독의 대상을 분석, 파악하고 논리로 이해, 초월하려고 한다.

 

이런 데서 살다보며 모두가 똑같은 방식으로 생활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도 먹는 것도 똑같아지지 않을까? 아니면 그 반대일까? 이 마을 사람들은 여기에서만이라도 똑같은 삶을 살기 위해서 한데 모인 것일까? 카스단은 현대 사회가 어쩌면 거대한 사이비 종파와 비슷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부드럽고 은밀하고 고통스럽지 않게 세뇌가 이루어지느 사회. 광고, 텔레비젼 뉴스, 쇼핑센터 따위를 바탕으로 사람들을 획일적으로 길들이는 사회. 어떤 의미에서 복제인간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우리가 죽어도 철학적 의미의 인간은 개개인을 초월하여 계속 존재할 것이었다.(2권/116쪽)

 

여자들은 특유의 파라볼라 안테나로 그가 어느 여자의 남자도 될 수 없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딴 세상' 사람이었다. 몸과 마음이 온통 무언가에 철저하게 중독되어 있는 남자였다. 매력적이지만 어느 누구도 붙잡을 수 없는 존재, 세상에 그보다 더 탐나는 것이 있을까?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자살자처럼 이 세상에서 빠져나가려는 사람은 언제나 낭만적으로 보이게 마련이다.(2권/175쪽)

난 위 부분에서 생각이 좀 달랐는데, 볼로킨은 자살자가 아니라 초월자로 분류되어야 하는게 아닐까?

아니다, 자살자는 어쩜 이 세상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세상을 살고자 한 사람의 다른 이름일 수도 있겠다.

 

이들은 어느새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죽지만 않는다면,

그것이 약물이 되었든지 마약이 되었든지 또는 그보다 더한 것에 세뇌와 중독이 된다고 할지라도 해독제와 해쳐나올 의지만 있으면 된다는 것을 깨달아 간다.

 

여기서 얘기되는 선과 악은 모호하다.

여러사람에 의해 획일적이고 보편적이며 똑같은 방식으로 존재하는 게 '선'이다, 하지만 매력은 없다.

어느 누구에게도 속할 수 없고 붙잡을 수 없는, 그래서 탐나는 존재가 '악'이다.

 

난 이쯤에서,

多數가 움직이는 것만으로 善처럼 보이지만,

기준을 어느 쪽으로 정하느냐에 따라 선악이 뒤바뀔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도 얘기해 보고 싶은데...

그 다수라는 것의 기준을 정하는 것조차 애매모호하므로 자중하도록 하겠다.

 

"더 일반적으로 말해서 목소리는 우리 몸의 상태를 드러내는 징표일세. 또한 우리 영혼을 담는 그릇이기도 해. 알겠어? 목소리가 정신분석학의 중심에 놓이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네. 정신분석학적인 작업의 요체는 내면에 깊이 감춰진 과거의 트라우마를 밝혀내는 것이지만, 그렇게 트라우마를 의식의 표층으로 떠올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 정신이 해방되기 위해서는 트라우마를 말로 나타내야 해. 목소리에는 카타르시스 효과가 있어. 목소리는 불교에서 말하는 '큰수레'와 같은거야. 자기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깨닫고 목소리를 내는것, 그것이 자유를 얻기 위한 단 하나의 길일세. 자네도 그 길로 가는 게ㆍㆍㆍㆍㆍㆍ"(2권/24쪽)

 

이 부분은 참 중요한 내용인데, 더 모호한 느낌이 든다.

목소리의 중요성을 얘기하고 있는데,

목소리가 우리몸 상태의 발현이며, 우리 영혼을 담는 그릇이며, 그래서 우리를 끌고 가는 견인차 역할을 한다는 거다.

근데, 이부분은 잘못 읽어내면 '큰수레'라는 용어 때문에 '대승불교'로 해석될 수가 있다.

불교를 얘기할 때 '큰수레' '작은수레' '대승' '소승'등은 대구를 이루는 상대적인 개념으로 쓰이는 예가 있기 때문에,

'불교'와 '큰수레'라는 단어를 같이 사용하여야 할때는 이같은 혼란을 초례할 수 있으니, 사용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참고로, 불교에서 말하는 큰수레는 '다함께'라는 의미의 '큰수레'이다.

  

"트라우마를 억압하면 우울증에 걸릴 수밖에 없어. 인간의 영혼은 육신과 똑같은 방식으로 기능해. 만약 외부에서 들어온 어떤 이질적인 요소가 생래적인 방어기제를 통해 배척되지 않으면, 부패나 괴저 같은 것이 생겨나게 마련이지."

"그러면 그때 가서 잘라내면 되겠네요."

"네 정신에 관한 얘기야. 정신을 잘라낼 수는 없어."(2권/24쪽)

 

내가 툴툴거리면서도 이 책을 손에서 내려놓을 수 없었던 이유는 바로 이 구절 때문이었다.
언젠가 템플스테이 같은 것에 참가할 기회가 있었는데...이러저러한 이유로 일정을 끝마치지 못한 낙오생이었다.
거기선 불교의 참선과 비교하여 얘기하고 있었는데...
불교의 참선도 물론 좋은 자기수련 방법이지만,

그 방법은 앙금을 가라앉히는 방법이어서,

실생활과 부딫혀 문제가 생겼을때는 미꾸라지가 흐려놓은 흙탕물처럼 혼란스럽기 그지없다고 했었다.

거기선 우리가 택해야 할 방법은, 앙금을 가라앉히는 방법이 아니라 앙금을 잘라내어 없애는 방법이라고 했었다.
그때 난, 잘라내어 없애는 것까지는 아니고 가라앉혀 놓았다가
가끔 끄집어내 추억할 수 있는 방법을 택하고 싶어서 결국 그 수련회의 낙오생이 되었었다.

 

그걸 여기서 이렇게 '정신을 잘라낼 수는 없어'하는 한 구절로 요약해주니, 명쾌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암튼 장황하게 늘어놓았지만,

결국 끝에 가서 惡이 파멸되는 것으로 나오는데, 그렇다면 악은 완전 사라지는 것일까?
그 전에 노출 되어 악에 물든자와 중독된 자가 생기게 마련인데...그들은 어떻게 되는걸까?

시인 황지우는 '산경'에서 '그대 비록 악(惡)을 이기지 못하였으나 약(藥)과 마음을 얻었으니 아픈 세상으로 가서 아프자' 고 노래하였다.

산경의 이구절을 미세레레의 해답으로 대신해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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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케 2012-01-27 18:36   좋아요 0 | URL
유럽 작가들은 참 다양하게 기독교적 리츄얼이나 코드들을 소재나 알레고리로 활용하네요.
그런 자산들이 있음을 부러워 해야 하는지, 그런식의 소비를 씁쓸하게 생각해야 하는지 ㅎㅎ
그랑제는 예전에 <크림슨 리버>만 읽었는데 이 책도 보관함으로...
Miserere Mei Deus 개인적으로 그레고리안 찬트를 좋아해서 듣던 곡이군요.
이 시기의 성가들은 신에 대한 '허심한 고백'같은게 느껴져서 좋아요.
요즘처럼 '복이나 주셈'하는 기운이 없어서 더욱 더.


숲노래 2012-01-27 19:23   좋아요 0 | URL
착한 마음도 나쁜 마음도
모두 나한테서 비롯할 테니
나쁨도 착함도 사라지거나 없어지지는 않으리라 느껴요..

순오기 2012-01-27 21:04   좋아요 0 | URL
명절때 고창은 잘 다녀가셨나요?
오랜만에 새글 올라와 반가워요~~ ^^

2012-01-27 21: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라로 2012-01-28 00:09   좋아요 0 | URL
오랫만이세요!! 잘 지내시는거죠????
명절은 잘 보내셨나요???
암튼 이 리뷰를 읽고 어찌 미세레레를 안 읽을 수 있겠어요!!
꼭 읽어볼꼐요.^^

마녀고양이 2012-01-28 12:27   좋아요 0 | URL
아고 머리야....
왜이리 개념들이 어려운게야. 한두줄 댓글로 언급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니,,, ^^

하지만 가라앉히기, 참기, 억압하기, 글쎄....
불교에서 부모나 자식과 연을 끊어야한다는거 있잖아, 나는 그게 과연 자연스러운 방법일까? 그건 회피 아냐?
머 그런 생각을 해. 물론, 내가 워낙 불교 교리에 무식하다보니, 이렇게 함부로 말하면 안 되는거겠지만.
주말 잘 지내길..

2012-01-28 12: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12-01-28 13:47   좋아요 0 | URL
컴퓨터 잉크가 닳겠어요. 이런 리뷰는 프린트로 뽑아서 천천히 음미하며 읽어야 하니까요. ㅋ

2012-01-28 21: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이리시스 2012-01-31 01:50   좋아요 0 | URL
장르소설을 이렇게 감상적으로 리뷰쓰시는 분은 드물 거예요!
명절 잘 보내시고, 일주일도 잘 보내시고, 여전히 잘 계시죠?
저야말로!!!
어린 제가 더 많이 와서 안부를 여쭤야 하는 거라(고 생각하지만) 또 불쑥 숟가락 얹기가 어려운 마음^^

이 책도 그저 그렇겠지 했지만 꼭 읽고 싶게 만드는 리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