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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의 슬하 ㅣ 창비시선 330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1년 5월
평점 :
새벽에 빗소리에 놀라 잠이 깼다.
그리고 이 시집을 읽었다.
얼마전 친구가 '사람을 쬐고 싶어서'라고 하며 시 한편을 보내주었었다.
처음 나간 모임에서,
처음으로 맥주에 소주를 말아서 석잔을 마시고 난 다음 날 아침,
비몽사몽간에 읽으면서 처음 보는 시인인데 좋아 바로 주문을 했었는데...
나중에 맑은 정신에 돌이켜보니 이 시인의 시들을 본적이 있었다.
유독 육체와 가족 속의 아버지에 관한 시가 많았었는데,
눈물 글썽글썽한 눈으로 육체와 가족을 바라본 것마냥,
왜곡되고 굴절되어 표현되는게 거북하게 느껴져 한쪽으로 접어놨었던 시인이었다.
그런데 요번 시집 <저녁의 슬하>에서는 눈물을 그쳤는지...시에서 느껴지던 왜곡과 굴절이 사라졌다.
사람을 쬐다
사람이란 그렇다
사람은 사람을 쬐어야지만 산다
독거가 어려운 것은 바로 이 때문, 사람이 사람을 쬘 수 없기 때문
그래서 오랫동안 사람을 쬐지 않으면 그 사람의 손등에 검버섯이핀다 얼굴에 저승꽃이 핀다
인기척 없는 독거
노인의 집
군데군데 습기가 차고 곰팡이가 피었다
씨멘트 마당 갈라진 틈새에 핀 이끼를 노인은 지팡이 끝으로 아무렇게나 긁어보다가 만다
냄새가 난다, 삭아
허름한 대문간에
눈가가 짓물러진 할머니 한 사람 지팡이 내려놓고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 바라보고 있다 깊고 먼 눈빛으로 사람을 쬐고 있다
사람을 쬐어야 산다고 하면서도, 온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것이 무미건조하기 이를 데가 없다.
보도 블록 사이 민들레로라도 살기를 꿈꾸었지, 갈라진 시멘트 마당 이끼로는 아닐텐데...
부질없다 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긁어보는 수고를 한다.
사람이 두렵다.
타인이 두렵기도 하지만,
내 자신이 그토록 차갑고 모질 수 있다는 사실이 두렵다.
어젠 또 다른 친구 하나가 나 때문에 속상해서 다른 이를 붙잡고 울었다고 한다.
그 친구는 내가 '정이 너무 깊고 헤퍼서 그렇다'고 했다.
속상해 하는 친구를 보금고 편히 울 수 있도록 어깨를 빌려주지도 못하는 나를 한참 잘못 판단한거다.
나는 타인이 두렵기도 하지만,
내 자신이 차갑고 모질 수 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아 벽을 쌓거나 속으로 파들어 갈 뿐이다.
다만 먼 눈빛으로 사람을 쬐고 싶을 뿐,
그조차 들킬까 해를 등지고 서 내 그림자가 만들어낸 어둠 속에 나를 가둔다.
시인은 눈물을 닦고 시 속으로 걸어 들어 간다.
자신의 직접 경험이니 이번 시집은 넘치지 않는다.
사람의 체온이, 온기가 차갑고 모진 칼날이 될 수도 있지만...
그 또한 받아들여야 하는 날도 있다고 눙친다.
옆구리
옆구리가 전부다
물고기는
비늘 뒤덮인 옆구리로 살고 비늘 뒤덮인 옆구리로 죽는다
봐, 죽어서도 저렇게 제 옆구리를 먹인다
맞아, 아내 몰래 가끔 만나던 그 여자랑
생선구이집에 가서 노릇노릇 옆구리 익힌 거 뜯어먹으며 생각했었지
연애란 네 옆구리 파먹는 거
산다는 건 지금 누가 네 옆구리 쿡쿡 찌르는 거
어두운 밤길 가다가
예고도 없이
무언가가 쑥 들어오면
어떡하지? 그러면 그것도 옆구리로 받아야지
그래 그것도 괜찮겠어 번쩍번쩍
빛나는 칼을 맞고 쓰러져
물고기처럼 둥글고 슬픈 눈으로 너를 쳐다보는 것도
119 구급차에 누워 내 삶의 옆구리로 피가 펑펑 빠져나가는 걸 느껴보는 것도
가장 좋았던 시는 '발톱 깎는 사람의 자세'였다.
그렁그렁하던 눈물을 닦았을 뿐만 아니라, 무장해제하고 쓴 유일한 시가 아닐까 싶다.
다른 시들은...
발톱 깎는 사람의 자세
발톱 깎는 사람의 자세는
둥글다네
나는 그 발톱 깎는 사람의 자세를 좋아한다네
사람이 사람을 앉히고 발톱을 깎아준다면
정이 안 들 수가 없지
옳지 옳아 어느 나라에선
발톱을 내밀면 결혼을 허락하는 거라더군
그 사람이 죽으면 주머니 속에 발톱을 넣어 간직한다더군
평생 누구에게 발톱을
내밀어보지못한 사람은 불행한 사람
단 한번도 발톱을 깎아주지 못한 사람은 불행한 사람
발톱을 예쁘게 깎아주는 사람은
목덜미가 가늘고
이마가 예쁘고 속눈썹이 길다더군 비가 오는 날이면
팔베개도 해주고 지짐도 부쳐주고 칼국수도 밀어준다더군
그러니 결혼을 안할 수가 있겠어
그러니 싸움을 할 수가 있겠어
발톰깎는 사람의 자세는
고양이에 가깝고
공에 가깝고
뭉쳐놓은 것에 가깝다네 그는 가장 작고 온순하다네
나는 그 발톱 깎는 사람의 자세를 좋아한다네
그의 다른 시들은,
칼날을 자기 자신에게 들이댄 채로 썼나 보다.
그래서 그는 전작들에서 쉽게 시 속으로 걸어 들어 가지 못하고 그렁그렁한 눈물을 매달고 있었나 보다.
칼날을 자기 자신에게 들이대고 시 속으로 걸어 들어 갔다는 얘기는...자해하듯 썼다는 얘기니까 말이다.
제대로 감정이입한 시가 있다.
시에선 문장부호가 잘 쓰이지 않는걸로 알고 있는데, 슬프다 뒤에 온점(.)까지 '쾅'하고 찍어 넣는다.
나는 피 흘리며 읽고 또 읽는다.
새는 왜 우는지?
물고기를 잡아 배를 따보면 알 수 있다 부레가 있고 쓸개가 있고 창자가 있다는 거,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대가리를 뒤져도 생각을 찾을 수가 없다 뇌를 찾을 수가 없다
슬프다.
다음번엔 새 대가리를 쪼개 찾아봐야지 울음이 어디 있는지 찾아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