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좋다.
햇살 따가운 여름날이 되면 살고 싶어진다.
지루한 장마를 견딜만 한것은 그 뒤에 있을 이런 날들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따가운 햇살이 살갗을 내리찌르면 그걸 자극제 삼아 괜히 액티브해진다.
며칠 전 점심시간에 짬을 내어, 내가 다닌 고등학교를 갔었다.
필요한 서류가 몇개 있었는데,
가까운 동사무소 가서 인터넷으로 발급 받으면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냥 발길이 그렇게 움직였다.
내려쬐는 햇살에 제대로 샤워가 하고 싶었나 보다.
내가 이 학교를 마지막으로 가본게 언제였나?
그러고 보니 대학생때,
사학재단의 비리(?) 정도는 아니고, 선생님들의 처우 관련 시위에 졸업생 몇명이 참여했었다.
고딩들과 담합하여 대자보를 몇번 붙였었고, 그로인해 선생님들께 붙들려가 몇번 야단도 맞았었다.
20년 전의 일이다.
교문 앞에서 점심을 드시고 들어가시던 국어선생님을 맞닥뜨렸다.
선생님께서 '졸업생, 재학생 간담회'때 부를테니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하셨다.
그건 대학에 갓 입학한 새내기들이나 하는건데 생각하면서도, 나는 여우 같은 수작을 부렸다.
"어, 갑자기 제 핸드폰 번호가 기억이 안 나네요. 선생님 번호를 찍어주세요."
그리하여 선생님의 핸드폰 번호를 따는 데도 성공했다, 아흑~.
그 와중에도 선생님이 들고 계시던 책 제목은 훔쳐 보았다.
"선생님도 이 책 읽고 계시네요?"
"너도 읽었구나."
"연분과 운명 얘기, 좋았어요."
말씀은 안 하셨지만, '여전하구나, 너'하시는 표정이었다.

옛 그림 보면 옛 생각 난다
손철주 지음 / 현암사 / 2011년 5월
직장으로 돌아오면서 선생님을 떠올렸어야 하는데, 손철주를 생각했다.
언제부턴가 수사가 화려한 글은 그닥이었다.
손철주도 화려한 수사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다.
활짝 피다 못해 흐드러지는데, 왜 그의 글은 어쩌지 못하겠는 것인지, 원.
그건 그의 화려한 수사가 본질을 과대포장하거나 왜곡시키는 것이 것이 아니라,
본질을 돋보이게 하기 때문이지 싶다.
소박한 그림일수록, 그는 깊이 파고 든다.
그러니 그의 수사라는 것은 소박한 것은 돋보이게, 화려한 것은 한풀 꺾어 숨 죽여...
나 같은 문외한도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더하고 덜어냄이 자유자재다.
옛그림에 옛글들을 접목시킨 건 또 어떤가 말이다.
원래 그림과 글이 짝으로 붙어있던 것이 아닌가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그의 설명 하나 하나가 이치에 닿는 것이 자연스러운 깨달음을 준다.
그런 그가 침 튀기며 하는 이런 프로포즈를 나는 그냥 지나칠 수가 없는 것이다.
정 깊은 우리 옛 그림은 정 주고 봐야 한다. 아름다운 것은 예다운 것이고 예다운 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옛것의 아름다움이 새 것의 아름다움이 되려면 묵은 정을 돌이켜야 한다. 그 정을 찾아 베풀고 싶은 소망이 이 책에 도사리고 있다. 정 나눌 짝이 하마 그립다. 공감하는 그대여, 보라. 그림 밭을 일군 옛 사람의 붓 농사가 어이 저토록 풍요로운지.(7쪽)
선생님을 뵈서 반가웠지만 한편으론 좀 슬펐던 것이, 세월은 비껴갈 수 없는 것인지...좀 늙으셨더라.
나랑 열살밖에 차이가 안 나는데...
그 시절 그리 반짝거리셔서 나를 설레이게 만들었던 그 분이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참, 커트 머리 여고생이 아줌마가 된 자신은 왜 돌아보지 못하는 것인지~ㅠ.ㅠ)
이젠 어디에도 선생님의 흰 진바지를 빨아댈 사람들이 없는걸까?
아니다, 눈처럼 흰 진바지를 입기 거북한 체형으로 바뀌셨을 일인지도 모르겠다.
손철주는 이런걸 예견했었는지, 이런 저런 경계를 하고 있는데...살짝 옮겨보면 이렇다.
청년은 봄맞이가 즐겁고 노년은 봄앓이가 힘겹다. 하여도 젊은이들아, 우쭐대지 말거라.
봄나들이 길에 꽃 아래 취해 쓰러진 노인을 보거들랑 뒷날의 날인가도 여겨라.(21쪽)
이 그림은 추저분하지 않다. 외려 정겹다. 지나는 이도 늙은 양반의 실례를 살짝 고개 돌려 못 본 척 해줄 것 같다. 그것이 넉살과 익살로 눙치는 조선의 톨레랑스다. 무얼 봐서 용서하라고? 코 대고 맡아봐라. 지린내가 안 난다.(29쪽)
손철주는 이렇게도 한마디 건넨다.
사람들아, 숨은 이는 숨게 하고 간 이는 가게 하자. 사라져 그립거들랑 솔바람조차 그분인양 여기자.(45쪽)
손철주의 글들을 읽다보면, 옛사람들은 다 신선이 아니었나 싶다.
옛사람이 하는 건, 옛사람의 그림이랑 글 속에 등장하는 건...죄다 풍류고 신선놀음처럼 여겨진다.
눈이 내릴 때부터 매화를 기다리고,
봄이 되면 밭을 가는게 아니라, 꽃놀이 일색이다.
꽃놀이 가면 술도 한잔 씩 마셔줘야 하고,
나무에 기대 낮잠도 즐겨야 한다.
봄밤엔 낚싯대를 드리우고 달빛도 낚아줘야 한다.
꽃놀이에 술독에 빠진 이들만 나왔으면 아쉬울 뻔 했는데...
밭가는 소, 개울가에서 빨래하는 처자 등도 교묘히 섥어 넣는다.
혜원의<연못가의 여인>을 보곤 '조선판 쩍벌녀'라고 너스레를 떤다.
김두량의 <늙은개>는 한가로움이 제대로 배어있다.
물을 보면 몸을 담글 생각을 하기 마련인데, 옛날엔 어쩐일인지 그저 구경만 한다.
겨우 발을 담그고는 '조금 벗고도 한껏 시원한 피서, 탁족의 즐거움이다'라고 얘기한다.
웃통 벗어던지고 짚신도 삼아야 하고, 매미가 시끄럽게 울어도 주어야 한다.
장대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 삿갓 쓰고 도롱이를 입은 이의 입성을 향하여 맨발에 하의실종이라고 눙친다.
'손에서 촉촉한 먹색이 우러남은 그린 이의 마음이 젖었던 까닭이다.(151쪽)' 같은 문장은 훔쳐오고 싶다.
가을은 추석과 풍요, 겨울은 새해 기원의 그림들이 한몫한다.
개인적으로, 조중묵의 <눈온날>이라는 그림을 처음 만났는데 참 좋았다.
눈온날, 화가는 밖에서 안을 들여다 보며 그림을 그리고 있다.
창문가에 팔을 괴고 눈구경을 하는 사람이 있어 그림에 온기가 돈다.
소나무는 매화나무가 있어, 화가는 창문가의 선비가 있어 외롭지 않을게다.

아무래도 내가 가장 좋았던 건 '어초문대'의 고사를 따라 그렸다는 정선의<어부와 나무꾼>이 아니었나 싶다.

옛 그림을 보면 옛 생각이 난다는 데,
난 옛 사람을 봤더니 또 다른 옛 사람이 생각 났다.
오랫만에 만난 사람을 옛 사람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고,
떠오르는 옛 사람과 옛 생각이 있는 것도 보니, 이제 나도 나이를 좀 먹었는가 보다.
그런 것들을 선명하지 않은 익숙함이나 타성이라고 하여 깔고 뭉개는 것이 아니라, 연륜이라는 반짝이는 혜안으로 빛내고 싶다.
항상 그가 보고싶어 창문을 열어놓지만,
그것은 높은 곳에서 불어오는 맑은 바람에 대한 기다림 정도이고,
기실 멀리서 그의 모습이 보인다든지, 목소리가 들린다든지 하면...창문을 닫아걸만큼 난 용기가 없다.
하지만 그와 내가 속한 세계 사이에 교집합이 존재하다보니,
낯선 이에게서 바람에 묻혀오듯 그의 안부를 듣게 되면 뭉클하고 마음 아프다.
"너무 늙어 보이고 뱃살도 나오고...푸석푸석하고, 암튼 이상하더라구."
그럴테지, 수 년을 내 손으로 빚어놨던 사람인데...
CST, 알렉산더테크닉, 회맹판테크닉, 튜닝 포크에, 편도처치까지...
이름을 열거하기 힘들 정도의 온갖 처치로 그를 자극하고 깨어있게 했었는데,
그게 하루 아침에 단절되니 그럴 수도 있을테지~
실상 내가 궁금한 건, 그의 외양이 아니라 그의 내면이다.
늙어보이고,
뱃살이 나오고,
살은 푸석거리고,
이빨이 몽창 빠져 틀니를 했다고 해도 용서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사람들 사이에 있을 때 그를 반짝반짝하게 만들어 주던 그것,
가볍고 여유로운 걸음걸이,
상대방을 향한 작은 배려의 행동들,
뱃 속 깊숙한 곳에서 터져나오는 웃음소리,
그런 것들이 우러나는 따뜻한 마음을 아직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하다.
그렇다면, 세월이 더 한참 흘러...
내 몸은 늙어 사랑할 수 없더라도 마음만은 여전히 그를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아, 그러고 보니 생각났다.
그 옛날, 선생님 딸내미 이름을 공모하였었는데, 내가 지었던 '다솜'이라는 이름이 채택되어...이름값을 받기로 했었다.
이름값은 그간 내가 선생님께 받은 가르침으로 퉁쳐 버릴테니,
이제 스무살이 되었을 다솜아, 아빠 셔츠와 바지 좀 깔끔하게 다려드리면 안되겠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