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 심은데서 콩이 나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말처럼 들린다.
하지만,콩을 심었다고 해서 콩이 다 나는 건 아니다.
여러가지 조건(물,공기,햇빛,온도,영양분 등)이 있어야 콩이 날 수 있다.  

잔뜩 벼르던 김선주의 <이별에도 예의가 필요하다>를 읽었다.
이분을 키운 8할이 사람이라는 말이 허투루 나온 말이 아니구나 싶게,이분의 또 다른 직업은 '남의 얘기 들어주기'란다.
왜 그랬는데,그래서,어떡하지,그렇구나,그러니까,흐흠,아이고,어쩌지......
이런 추임새를 해 가며 이야기가 끊어지지 않게 격려하고 공감하고 맞장구치고 고개를 끄덕이고 혀를 차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감정이입이 되어 황홀경에 이른단다.
 
나도 어찌보면'남의 얘기 들어주기'가  직업인지라 생각해본 건데,
내 경우는 이런 추임새라기 보다는 질문의 형태를 띤다.
겉으론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하는 사람의 이면을 파악하기 바쁘다.
 "왜 그랬는데,어떡하지,어쩌지"따위의 소리는 맘 약하게 보일까봐 한번도 해보지 못했다. 

여기저기 실렸던 글을 모아놓아서인지 어디선가 접했던 글들이 많다. 
살짝 동질감도 느끼고,마냥 부럽기도 했지만...나랑 견해나 입장이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모여있는 글들을 통해 문체의 개성을 알아차린 것만으로도 내겐 큰 수확이다.  

내게 가장 큰 깨달음을 준 건<자장면과 삼판주>였다.
감사하게도 내겐 '자장면과 삼판주'같은 스승과 지인들이 좀 있다.
이젠 내가 또 다른 이들의 '자장면과 삼판주'가 되어야 할 차례이다.

언제부턴가 쓸만한 새싹이 없다고 툴툴거렸었다.
근데 되짚어 생각하니,내 주변의 새싹들을 쓸만하게 키우지 못한 건 내게도 일말의 책임이 있다.
이분이 인용한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를 보면 이렇다.
"인류에 대한 사랑을 말하는 사람일수록 구체적인 인간을 사랑하지 못한다.개개인의 인간을 독립된 인간으로서 사랑하기 어렵다."
이분은 이 뒤에 다른 얘기를 하고 있지만,난 내 자신에 비추게 된다.
난 그 새싹들이 언젠가 나를 치고 올라와 내 근간을 흔들어 놓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었나 보다.
때문에 새싹들은 뭉뚱그려 새싹들이었지,콩인지 팥인지 구별하려 들지 않았었다.
이건,어쩜
'나를 뺀 다른 사람과 살아있는 모든 생명을 위해 기도한다'고 말하는 모습을 충격이었다
하는 부분과도 일맥상통한다.
자신을 위해 기도하면 개인의 이해가 상충하기 때문에 조물주도 모든 사람이 만족할 수준의 응답을 해줄 수 없지만,자신을 빼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면 모든 사람들을 만족시킬 것이라는 대답이다.그들은 그러한 지혜를 어디서 얻었을까.(59쪽) 
나를 빼고 나면,'콩 심은데서 콩이 날 수 있도록' 여러가지 조건을 기꺼이 제공할 수 있겠다.

속이 시원하다 못해 통쾌했던 부분도 있었다.
괜찮은 남자는 다 유부남이라고 은근슬쩍 남의 남자를 넘보는 경우도 있다.괜찮아 보이는 유부남도 실은 너희가 옛날 같으면 쳐다보지도 않았을 변변치 않은 남자였다,다 마누라들이 잘 챙겨서 멋있어 진것이라고 하면 그런가 하는 표정을 짓는다.(150쪽) 

자기 나이에 0.7을 곱해야 생물학적 정신적 사회적 나이가 된다고 하면서,눈앞이 환해지는 것 같았다고 너스레를 떠는 부분도 좋았다.
개인적으로 힘이 되었던 그래서 누군가에게도 들려주고 싶은 건 <자기를 위한 잔칫상을 차려라>라는 글이었다.

>> 접힌 부분 펼치기 >>

마이클 코넬리의 신간이 나왔다.
<콘크리트 블론드>란다.
마이클 코넬리는 그저 재밌을 따름이지만,
이 책의 역자 '이창식'님도 내겐 어떤 의미로든...콩심은데서 콩이 날 수 있게 하는 힘이다.
(근데,출간된 책이,것도 신간이 배송되는 데 일주일씩이나 걸리는 건 어떤 이유에서일까?)


 

 

콘크리트 블론드
마이클 코넬리 지음, 이창식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11월

(표지는 오른쪽이 쫌 더 낫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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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11-24 11:53   좋아요 0 | URL
그러나 결코 눈을 사르르 감고 관능에 몸을 맡기거나 영혼이 떨리는 듯한 충일감에 젖어드는 사랑의 순간이 오더라도 한 쪽 눈은 분명히 뜨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아, 뭔가 뒤통수를 호되게 맞은 기분이에요. 네네, 양철나무꾼님. 한 쪽 눈은 분명히 뜨고 있을게요. 그럴게요.

저도 이 책 사서 읽어봐야겠어요.

양철나무꾼 2010-11-24 23:53   좋아요 0 | URL
ㅎ,ㅎ,ㅎ...이 분 후배들이 가장 좋아하는 여성 언론인이래요.

현재는 인터넷 공간 '김선주학교'에서 게으른 교장노릇을 하면서 매일매일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를 고민 중.다시 미쳐 돌아가는 세상이 온 것 같지만 역사는 뒤뚱뒤뚱 거리면서도 앞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확신 때문에 아직도 살고 있음

책 날개의 프로필도 멋지구리하구요~^^

프레이야 2010-11-24 10:42   좋아요 0 | URL
타인의 이야기 들어주기, 추임새 넣어가며.
이거 쉽지 않지요. 저도 정말이지 이거 실천하고 싶어요.
말을 끝까지 들어주지 못하고 잘라서 나의 말을 하고 싶고
반박하고 싶고 비판하고 싶고, 이런 나쁜 습관 고치고 싶어요.
고개 끄덕이며 들어주기, 나도 남에게 그걸 바라면서 나는 그걸 못하다니 말에요.
감정의 이면을 들여다보려는 양철님, 범상치 않은 걸요.^^(농담반 진담반)
아무래도 이 책 사야겠어요. 이곳저곳에서 좋은 평가가 많으네요.^^

양철나무꾼 2010-11-24 23:55   좋아요 0 | URL
실상에서의 저는 그래서 좀 답답하다는 소리를 들어요.
기껏 고개 끄덕여가며 들어놓고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다고 말이죠~ㅠ.ㅠ

2010-11-24 1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1-24 23: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잘잘라 2010-11-24 12:37   좋아요 0 | URL
백마 탄 왕자는 10대에도 20대에도 환상이고 서른에는 망상이다. 흑흑.. 그럼 마흔에는 퐝상 노망? ㅎㅎ 어릴땐 안믿던 백마탄 왕자님, 저는 오히려 나이들수록 가까이 느껴지는데... ♪어허 이거참, 예랄랄라아~~~

양철나무꾼 2010-11-25 00:05   좋아요 0 | URL
저는 이렇게 해석했었어요.
10대,20대--->환상
30대-------->망상
40대-------->빵상
50대-------->청상
BG는 '이것참 야단났네,예럴랄라~~~'이건가요?^^
댓글이 참 재밌어요~

다이조부 2010-11-24 12:44   좋아요 0 | URL

이 책 저도 읽고 싶은 목록중에 있는데 반갑네요 ㅋ

양철나무꾼 2010-11-25 00:06   좋아요 0 | URL
올리시는 리뷰들 보고 관심 있으실 것 같았어요~
관심 가져도 좋을 듯 해요~^^

Arch 2010-11-24 13:05   좋아요 0 | URL
나만의 잔치상을 차리라니, 전 밥은 이렇고 반찬은 이렇게 하라는 주문인줄 알았어요. (아치 멍충이) 좋은 글이에요. 나무꾼님 고마워요. 언젠가 이 책을 읽을 날이 오겠죠!

양철나무꾼 2010-11-25 00:13   좋아요 0 | URL
나'만'의 잔치상이 아니라,나를 '위한' 잔치상입죠~
언젠가 이 책을 꼭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그전에 인터넷'김선주 학교'를 검색하시면 해갈은 하실 수 있을 듯~^^

글샘 2010-11-24 20:52   좋아요 0 | URL
콩 심으면 콩 납니다. ㅎㅎㅎ
콩은 보통 논두렁 같이 별로 쓰임새 없는 땅에다 곡괭이 자루 거꾸로 들고 쿡쿡 쑤신 다음에 두어 개씩 넣어 두고 쿡쿡 밟아 두면 여지없이 잘 자라는 식물이거든요.
하기야... 그냥 잘 자라는 것처럼 보이는 콩도... 자연의 섭리에 따라 온도와 습도와 조건을 맞춰 싹이 트고 열리고 하는 것이겠지요.
멋진 유부남... 맞는 말이네요. ㅎㅎ 다 아내들이 인간 만들어 놓은 사람.

인류에 대한 사랑... 이렇게 큰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욕 많이 듣죠. 실존의 인간에 대해서는 약한 경우가 많거든요. 제 주변에서도 큰 사람들이 욕을 많이 듣습니다. 작은 부분에 취약하니까요.
저는 작은 인간이면서 작은 부분도 잘 못챙기는 뭐, 그런 사람입니다.
멋진 이야기가 많네요. 잘 읽었습니다. ^^

양철나무꾼 2010-11-25 00:20   좋아요 0 | URL
전에 포박자 때도 그랬는데,개떡 같이 말해도 콩떡 같이 들어주시는군요.
콩심으면 콩이 나는 것과 콩심으면 콩이 나게 하는 힘,
하지만,인연론과 연기설까지 들어가면 좀 심오해지잖아요.^^

cyrus 2010-11-25 18:36   좋아요 0 | URL
제 동생이 추천하길래 한 번 읽어봤는데,, 생각보다 좋은 글도 있었지만,,
몇 몇 글은 공감이 가지지 않는 것도 있더라고요, 그래도 저도 남성이지만
여성과 관련된 글들을 무척 공감이 가고 여러가지 생각도 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양철나무꾼 2010-11-30 00:58   좋아요 0 | URL
네,저도 그랬어요.
공감이 가는 글과 공감할 수 없는 글이 적당히 버무려져 있더군요.
암튼,<자기를 위한 잔칫상을 차려라>는 많이 좋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