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백석,<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페이퍼를 장황하게 몇부작으로 나눠 써야 할지도 모르겠다.
책은 너무나 많은 것들을 풀어 놓았고,나는 그걸 제법 잘 주워 읽었다.
난 김탁환을 참 좋아한다.
그가 황진이를 쓰면 황진이를 읽고,그가 이순신을 쓰면 이순신을 읽었다.
그가 박지원과 북학파의 얘기할 때면 정조의 마음 정도는 되었던 것 같고,
미안스럽게도 <혜초>는 꾸역꾸역 읽었지만 아직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겠다.
노서아 가비는 비교적 가벼운 마음이었다.
<혜초>의 작가의 말에서,'쓰고 싶은 작품과 쓸 수 있는 작품은 다르다' 고 얘기한다.
암튼,나는 <혜초>를 기준으로 어떤 경계를 넘은 것 같다.
처음 이렇게 '작가의 말'로 시작한다.
적의 크기로 나의 부족함을 고스란히 가늠하는 이야기!가장 거대한 적,내 전부를 거는 대결이 아니라면 무엇이 나를 고양시킬까.이 대결을 자랑스러워 하지 않는다면 얻서 어둠을 닮은 빛을 쐴까.단어를 갈고 문장을 벼리고 문단을 박았다.냉혹한 바람에 몸서리쳤다.봄은 없었다.백에 아흔아홉이 가족이라는 핑계,나이라는 변명,세상살이 별거 없다는 위안 따위의 자포자기로 행복을 쌓을 때,한계 밖으로 홀로 질주한 단독자의 표정.그 내밀함을 소설이라는 밀림으로 감싸고자 했다.
이 책 '밀림무정'은 어찌보면 무협지 같고,어찌보면 로맨스물 같기도 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작가의 내공에 혀를 내두를 수 밖에 없었다.
작가의 내공이라는 것이 타고난 재능 같아서 살짝 샘이 나려고 하는데...
이 모든 걸 타고난 재능이라고 치부해 버리기엔,
그의 방대한 자료조사와 고증을 바탕으로 철저히 얽어낸 씨실과 날줄의 결과물이 너무 탄탄하다.
이런 노력의 성과물이라면 존경을 보낼 수 밖에 없지 않나 하는 생각으로 귀결이 된다.
1권 책 표지에 나오는 것 처럼,선굵은 사내의 이야기이다.
(뭋사람들에게 경고를 하는데,이 길어져만 가는 겨울밤 김탁환에 빠져들면 호랑이가 업어가도 모른다=헤어나기 힘들다.)


I can't explain it.That's why.
凡人인 나로서는 솔직히 이해가 안 가는 내용이기는 하다.
호랑이 한마리를 잡기 위해서 7년동안 벼르는 그 과정이 아이러니 컬 하다 싶기도 하지만,
그 세월을 거치면서 같이 성장해 가는 모습을 보는 게 또 소소한 재미이다.
뭐랄까,호적수 라는 말처럼 싸우면서 정이 들게 되는 경우라고나 할까.
나의 적수가 될 때까지 조용히 기다려준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어느 단계에 이르면 귀에 쏙쏙 박히도록 잔소리도 해줄 수 있고,대적도 해줄 수 있을까?
소설 한편으로 달관을 얘기하면, 그를 끝에 두고 우러르면 더 이상의 것이 없을 것 같아 망설여지지만,이런 문장은 부족함이 없다.
*최대한 관대하라.가족 중 누군가가 사냥 도중 목숨을 빼앗기더라도 복수 운운하며 그 맹수를 쫒지 마라.승부가 공정했다면 살고 죽는 것 또한 자연의 이치다.허나 제 집을 침범한 짐승과는 목숨을 걸고 맞서라!세상 끝까지 추격하여 급습의 대가를 치르도록 하라.(128쪽)
*호랑이를 사냥할 때 가장 중요한 덕목은 견딤이다.호랑이에 대한 두려움을 견디고 살을 에는 추위를 견디고 시간을 견딘다.오랫동안 견디며 단 한 순간만을 생각한다.(158쪽)
*명령을 바꾸기 어렵다면,목숨을 걸고 그 명령을 지키는 것이 군인의 본분이다.(179쪽)
*호랑이 추격의 비결.호랑이의 순발력은 들짐승 중에서 으뜸이지만 지구력은 늑대나 풍산개보다도 못하다.호랑이가 걸을 때 산은 뛰고 호랑이가 쉴 때 산은 걷는다.더 적게 자고 더 적게 먹고 더 자주 발을 놀린다.(194쪽)
*큰 고통을 견딜 때는 미리 상황을 각오하고 집중하게 된다.어찌할 수 없는 아픔인 경우에는 그냥 두고 볼 수밖에 없다.작은 고통은 자꾸 딴 생각을 하게 만든다.조금만 바꾸면 이 고통이 사라지지 않을까 기대하지만 대부분의 고통은 크든 작든 쉬사라지지 않는다.한쪽을 막으면 다른 쪽이 터지는 둑처럼,산은 시린 어금니로 침을 모았다.이가 아프기 시작한 뒤부터 같은 다짐을 반복했다.모신나강은 섬세한 무기다.조준도 정확해야 하지만,몸과 총이 하나로 움직여야 원하는 지점에 탄환을 꽂을 수 있다.어깨 먼쿰이나 총의 반동을 떠안는 어금니가 튼튼하지 않고는 토끼 한마리 맞히지 못한다.(330쪽)
김탁환의 묘미하면 뭐니뭐니 해도 수려한 문장이다.
옛날엔 수사가 화려하다 못해 현란하다 싶었는데,이제는 흐드러지거나 넘치지는 않는 것 같다.
*바람이 점점 심해졌다.절기와 방향에 따라 저마다의 이름이 붙었지만 개마고원의 겨울바람은 한두 이름으로 가두기엔 너무 크고 빠르고 시시각각 달랐다.새된 피리 소리인 듯,둔중한 북소리인 듯,먹잇감을 발견한 호랑이의 콧김 소리인 듯,달아나기 시작한 아기 노루의 굽 소리인 듯,대포 소리인 듯,기관총 소리인 듯,님 잃고 흘리는 눈물이 이별 편지에 떨어지는 소리인 듯,재회를 기뻐하며 달려오는 여인의 창 넓은 모자가 떨어져 구르는 소리인 듯,기억을 토막토막 쪼개고 감각을 갈기갈기 찢었다.(166~167쪽)
이런 문장은 참 좋다.
이쯤 되어버리면,무협이라기 보단 로맨스물이라고 볼 수 밖에 없질 않을까.
마른 국화꽃잎 한줌을 가지고도 은은함을 머금을 수 있게 해주고 행복을 선사하고 그리하여 세상 그 누구보다도 따뜻함을 누릴 수 있게 하는 힘,그가 단지 소설 속의 주인공이라서 다행이다.
*잔을 건네받은 그미는,산이 일러준 대로 조심조심 입김으로 꽃잎을 잔 가장자리로 보낸 뒤,은은한 꽃향기를 코로 들이마시고는, 잔을 기울여 차를 한 모금 입안에 머금었다.차 한 잔이 얼마나 큰 행복을 선사하는 지,그미는 그 순간 처음 알았다.(218쪽)
*그런데 지금 산은 그미와 발맞추어 걷는 중이다.바람이 불 때,나뭇가지가 흔들릴 때,멀리서 번개가 내리쳐 산과 계곡의 윤곽이 드러날 때,그미는 꼭 쥔 손에 힘을 주며 어깨까지 떨었다.산은 그미의 손을 감싸며 다독였다.말이 필요없었다.산의 엄지가 그미의 손바닥을 쓸자,그미가 살짝 얼굴을 들었다.산이 웃자 그미도 서너 박자 늦긴 했지만 따라 웃었다.(364쪽)
이런 섬세한 눈을 가진 사람이기도 하다.
-아프면 아프다고 바로 말하오.괜히 참고 걷다가 덧나지 말고.
......
-왼쪽으로 계속 기울며 걷기에......오른쪽에 전혀 무게를 싣지 못하기에 알았소.(220쪽)
내가 아무래도 이해할 수 없었던 건,나이 스물 셋으로 나오는 주인공 '산'이 살아남은 자의 미안함을 알까 하는 거였다.나이 사십을 넘긴 작가는 알 수도 있을 마음이지만,스물을 갓 넘긴 사내가 그 마음을 알 수 있을까?하긴 흰호랑이의 마음도 헤아리니까?(또는 이것도 전지적 작가 시점이라고 해야할까?)
*개마고원 포수들은 무거운 죽음일수록 가볍게 날렸다.그렇지 않고는 쉼없이 닥치는 불행을 견디기 어렵다.산도 곧 망나니춤에 합류했다.
......
살아남은 자의 미안함으로 가득 찬 춤이었다.미안하구나,이 싱싱한 새벽 공기를 나만 맡아서.미안하구나,언 몸 녹여주지 못해서.미안하구나,낯선 골짜기에서 썩어가게 해서.미안하구나,머리끝까지 차오른 두려움 풀어주지 못해서.미안하구나,벼락 같은 최후를 미리 알려주지 못해서.미안하구나,담배 한 개비의 여유도,문장 하나의 그리움도,미소 하나의 즐거움도 더 이상 허락할 수 없어서 .오늘도 미안하고 내일도 미안하고,영영 미안하구나 미안하구나 미안하구나.(271쪽)
작가는 '미안하구나''아팠겠구나'같은 단어를 반복해서...그 마음을 읽는 이에게 고스란히 전한다.
읽는 것만으로도 미안함을 알겠고 아팠겠구나 한마디에 상처가 치유되는 힘을 얻는다.
때문에 '미안하고 아플 때' 이 책을 찾게 될 것 같다.
*남자란 마음의 흉터에는 둔감하지만 손등의 흉터엔 민감한 족속이라고 햇던가.산의 손도 흉터투성이였다.산은 그미의 흉터 하나하나에 제 손등의 흉터를 덧붙여 비교했다.
......그 아래엔 겹겹의 고통이 숨어 있었다.아팠겠구나.정말 아팠겠어.엄지 아래쪽 이 상처.이 죽은 피들!(295쪽)
사실,내가 이 책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는 이것이다.
살아남은 자의 대처법을 알려주어서이다.
주홍은 흐린 날의 저물 무렵을 아꼈다.구름의 등이 붉게 빛나는 동안,대학 실험실에서,시호테알린의 밀림에서 그미는 가장 먼 곳에서부터 다가오는 어둠을 향해 후우후우 소리 내오 입김을 불어대곤 했었다.밤이 오면 혼자 남을 것이고 혼자 밥을 먹고 책을 읽거나 글을 쓸 것이다.그리고 홀로 남아서,혼자가 아니었던 순간들을 어루만질 것이다.그미는 구름의 등이 더 오래 빛나기를 바라며 노래를 흥얼거렸다.가사는 이미 잊고 멜로디만 겨우 혀끝에 걸려 고드름을 타고 내리는 물방울처럼 똑똑 떨어졌다.붉은 빛은 신기하게도 검은 빛으로 바로 탈바꿈하지 않고 푸른 냄새,푸른 맛,푸른 빛을 잠시 뿜었다.낮의 마지막 핏줄인지도 몰랐다. (303쪽)
이가을,또는 이 겨울 마른 국화꽃 한줌 전해주는 것 같아서,
<국화 옆에서>를 밀어내고 내가 요즘 읽는 시 한편~
*국화차는 예로부터 불로장수의 차로 전해오고 있다.특히 간장을 보하고 눈을 밝게하며 머리를 좋게 한다.신경통,두통,기침에 유효하고 피부를 윤택하게 한다.
들국화/김 용 택
나는 물기만 조금 있음면 된답니다
아니, 물기가 없어도 조금은 견딜 수 있지요
때때로 내 몸에 이슬이 맺히고
아침 안개라도 내 몸을 지나가면 됩니다
기다리면 하늘에서
아, 하늘에서 비가 오기도 한답니다
강가에 바람이 불고
해가 가고 달이 가고 별이 지며
나는 자란답니다
그렇게 세월이 가고
찬 바람이 불면
당신이 먼데서 날 보러 오고 있다는
그 기다림으로
나는 높은 언덕에 서서 하얗게 피어납니다
당신은 내게
나는 당신에게
단 한번 피는 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