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프의 빨간 노트 - 내 식탁 위의 소울풀 레시피
정동현 지음 / 엑스오북스 / 2015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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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결혼 기념일이었다.

결혼기념일이 뭐 대단한건 아니어서 그냥 넘어가도 무방하지만,

아들이 있을땐 패밀리 레스토랑을 다녔던 터라,

추억이 돋는고로,(표현을 일부러 가볍게 해봤다, ㅋ~.)

패밀리 레스토랑은 가지 못하고,

그냥 이름 난 레스토랑에 다녀왔다.

주문을 하는데 고기의 굽기 정도를 묻지 않길래,

남편이 예약하면서 미리 주문을 넣어놨으려나 짐작을 했고,

그래도 낭패를 보면 안 되겠다 싶어 고기를 웰던으로 구워달라고 했다.

그런데 웬걸 이베리코 돼지고기여서 다 바싹 구워져 나온단다.

속으론 돼지고기를 이렇게 비싼 돈을 주고 먹을 필요가 있나 따위의 생각을 했지만,

겉으론 '정식은 분위기로 먹는 거지' 라고 하며 남편을 향하여 한껏 공치사를 해주었다.

 

결국 맛도 모르고 먹었고,

제일 맛났던 것은,

후식으로 나온 내가 이름을 아는 티라미슈 케잌 손가락 마디 만큼과

오후에 먹으면 밤잠을 이룰 수 없어 자제하는 아메리카노 한잔이었다.

 

그리고 정동현 님의 '그릇을 비우고 나면 많은 것이 그리워졌다'를 읽으며 기억해둔 '셰프의 빨간 노트'를 읽었다.

 

이 책엔 여러가지 요리들이 나오는데,

내가 이름을 아는 경우도 있었고,

처음 들어본 이름도 있었다.

이름을 들어봤더라도 나라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불리우면 거의 다른 요리가 된다고 봐야한다.

 

여기서 스테이크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데,

정동현 님의 꿀팁대로라면 난 촌놈 대접은 따논 당상이다.

물론 저 날은 돼지고기여서 덜 민망했지만,

아무리 고급 부위를 시켜도 난 피 보는 게 싫어 웰던으로 주문하는 부류이니까 말이다.

 

굽기 정도에 따라 이런 재밌는 표현이 나온다.

물론 온도계를 쓰면 정확하게 구울 수는 있겠지만 한 번에 스테잌크를 200장씩 구워내야 하는 스테이크 하우스에서는 한가한 소리다.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보는 수밖에 없다. 지글거리는 고기를 맨손으로 계속 누르다 보면 손가락도 스테이크와 함께 익는 거 같다. 아기볼처럼 말랑말랑하면 레어, 발 뒤꿈치처럼 단단하면 웰던이다. 미디엄, 미디엄 레어는 그 사이 어디쯤이다. 그나마 얇은 고기면 그럴듯한 비유가 되겠지만 고기 두께가 5센티미터 넘어가면 사정이 달라진다. 감과 경험으로 판단해야 한다.(73쪽)

암튼 웰던은 최소 20분은 걸리고, 주문이 밀리는 건 다 웰던 때문이고 하는 얘기가 계속 된다.

뭐, 하지만...

난 앞으로도 고기를 먹을 일이 있으면 돼지고기보다는 소고기를,

그것도 웰던으로 먹겠다.

발뒤꿈치처럼 단단하고 질긴 고기를 먹는 것이, 피를 보고 피 비린내를 맡는 것보다 내 정신 건강엔 나으니 말이다, ㅋ~.

 

글을 재밌게 잘 쓴다.

삼겹살 콩피를 처음 먹었을 때 느꼈던 환희와 충격은 아직도 강하게 내 머릿속에 각인돼 있다. 그것은 전통과 열정과 집착이 만든 맛의 환희였다. 조리와 요리, 평범함과 비범함의 차이를 증명하는 작품이었다. 지금도 그때 생각이 나면 "셰프란 모름지기 말이야"하면서 친구들에게 삼겹살 콩피 만드는 과정과 맛에 대해 신나게 썰을 푼다. 그런데 눈치 없게 "우리도 한 번만 맛볼 수 없을까" 묻는 인간이 꼭 있다. 콩피를 만드는 그 지난한 과정을 듣고도 말이다. 그런 부탁을 하는 이가 남자면 나는 이렇게 응대한다.

"그냥 구워 먹어, 인마."(88쪽)

 

지난 번 책을 읽으면서도 느꼈던 것인데 글을 잘 쓰는데,

계산에 의해 짜맞춘 것처럼 단정하다.

정동현 님과 개인적인 경험이 달라서 어떤 문장이 나올지까진 몰라도,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떤 식으로 글을 끝맺게 될 지는 예측 가능하다.

지난 번 읽은 글이 나중에 쓰여진 것이고,

이번 글이 먼저 쓰여진 글인데,

이 글을 읽고나니,

글의 끝맺음을 예측하는 맛으로 '그릇을 비우고 나면 많은 것이 그리워졌다'를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어졌다.

 

남편이 내게 강추하는 메뉴 중 하나가 양고기이다.

난 어릴 적 경험에 없는 음식은 시도해 보지도 않는 경향이 있는데,

양고기가 그렇다.

먹어보지 않았으니 식감은 알 수 없고,

짙은 향 때문에 시도해 보지도 않았다.

이 책에 이런 구절이 나오는 걸 알면 남편은 완전 좋아하겠다.

이런 양고기의 고품격도 모른 채 난 양고기는 아냐, 라며 손사래부터 치면 나만 손해다. 전통 있는 모든 음식에는 깊은 풍미와 미묘한 매력이 있다.(95쪽)

 

이러니 저러니 해도 내가 그의 책을 읽은 건 이런 따뜻한 문체 때문이다.

이런 따뜻함이 그가 의도한 것이라고 해도,

이런 미괄식 문장을 원했다고 해도,

내가 이 글에서 얻으려고 했던 게 따뜻한 온기라는 점은 바뀌지 않는다.

 

내가 살던 마카롱 빛깔의 그 산동네는 이제 관광객이 북적이고 영화 로케이션 장소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여전히 가난하다. 화려한 색의 집에서 무채색의 인생을 살아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샤걸의 그림 속 파스텔 톤 색들이 아름다운 것도 그 뒤를 조용히 받치고 있는 침묵의 음영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행복해서 마카롱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 안에 밝음이 필요하기에, 조그만 행복을 원하기에, 그 작은 것을 입 안에 넣는지도 모른다.(255쪽)

 

예전엔 쿨한 문장이 지적으로 보여 그런 글들에 열광했던 것도 같은데,

언제부턴가 적당한 온기를 지닌 따뜻한 문장이 좋아진다.

쿨한 문장은 나누다 보면 자칫 미지근해지기도 한다.

따뜻한 문장은 나눌수록 더 따뜻해진다.

 

'셰프의 빨간 노트', 이 책은 '내 식탁 위의 소울푸드 레시피'라는 부제를 달고 있어서,

내 소울푸드는 뭘까 잠깐 생각해보았다.

어쭙잖게 한때는 패스트푸드나 인스턴트 식품을 소울푸드라고 했던 적도 있는데,

이젠 그 정도는 아니다.

예전처럼 먹는게 즐겁지 않기도 하지만,

그럴수록 먹으면 힘이 나는, 나를 일으켜 세우는 음식이 있는 것도 안다.

언제 기회가 될지 모르겠지만,

다음엔 나의 소울푸드를 한번 털어놔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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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02 16: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2-02 17: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hnine 2019-12-02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한번 올려주세요. 양철나무꾼님의 소울푸드요.

양철나무꾼 2019-12-05 12:52   좋아요 0 | URL
소울푸드는 추억인데,
추억 돋아서 아프다지만,
언젠가 가슴에 빨간 약 바른 듯 올릴 수 있는 날이 오겠지 싶습니다.

전 언젠가 님 서재에서 보았던 대나무 찜기에 담겼던 만두였나, 송편이었나...가 떠오릅니다.
참 정갈했었는데...^^

수연 2019-12-02 1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양철나무꾼님 소울푸드 궁금해요. 저도 귀 쫑긋.

양철나무꾼 2019-12-05 12:54   좋아요 0 | URL
수연 님, 오래간만이예요.
어쩜 댓글도 이리 재치발랄하답니디까?^^
귀 쫑긋이라니.
이뻐요~^^

단발머리 2019-12-02 1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요... 저도 양철나무꾼님 소울푸드 이야기 듣고 싶어요^^

양철나무꾼 2019-12-05 12:56   좋아요 0 | URL
추억 속의 소울 푸드는 인스턴트 식품이나 간편 식품 위주인데,
이 참에 함 소울을 재정비 해보려구요.
소울도 예전 같지 않고,
식성도 바뀌어서요.
단발머리 님의 소울푸드 얘기도 궁금합니다~^^

북프리쿠키 2019-12-02 2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읽다보니 적당한 온기를 지닌 따뜻한 사람이 그립네요~

양철나무꾼 2019-12-05 13:32   좋아요 1 | URL
갑자기 신영복 님의 글이 생각나요.
감옥살이 중 겨울엔 옆 사람의 온기가 고맙게 느껴지는데,
여름엔 옆사람의 체온이 증오로 다가온다고 했던가요?^^
그런 의미로 봤을때 여름보다 겨울이 나은건가요?
개인적으로 전 더위는 잘 안 타는데, 추위는 엄청 타거든요~^^

Nussbaum 2019-12-02 2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은 날이 꽤 차갑게 느껴졌는데 몸과 마음이 따뜻해졌다니 다행입니다.

양철나무꾼 2019-12-05 13:34   좋아요 1 | URL
오늘도 좀 추운데, 낼부터 주말까진 더 춥대요.
내복도 챙겨입고 옷도 껴입고.
따뜻한 차 같은 것도 손에라도 쥐고 있어야 겠어요~^^

2019-12-20 23: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2-27 16: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2-30 20: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1-06 16:4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