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걸어서 온다 - 윤제림 시집
윤제림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4월
평점 :
품절


시란 자고로 한 편씩 천천히 음미해야 되는 거라고 스스로에게 당부했던 말들이

어느 순간 사라져 밥 한 숟갈을 씹지도 않고 꿀떡 삼키고 벌써 손으로는

다음 숟가락에 김치를 얹고 있었다.

몇 끼니를 굶은 것처럼 허겁지겁 먹고 보니 배가 부른 듯도 하고 체한 것도 같다.

누가 눈치를 주는 것도 아닌데 그가 만든 밥을 나는 쪼그리고 앉아 그리 먹었다.

 

'그래서? 그 다음엔?'을 연발하며 다음 시를 급하게 읽어보는 나를

보는 사람이 없기가 다행이다. 얼마나 민망한 일인지.

생전 밥이라고는 쳐다 본 적도 없는 사람처럼 그리 식탐을 내다니..

윤제림의 시가 어렵지 않기에 가능한 일이다.

어렵지 않지만 가슴을 쿵쿵 치며 지나간다.

죽음과 삶이 뒤엉켜있지만 무겁지는 않고 마치 양쪽 발목에 하나씩

모래주머니를 차고 걷는 것처럼 적당한 무게감에 조심스레 발을 딛게 만든다.

 

그가 바라보는 시선에선 무명 씨도 이름을 갖는다.

나와 동행을 하게 된 어떤 여성은 숙영이 되어

 

지금 어딘가엔,

저 얼굴 그리는 사람이 필경 있겠다

'꿈에라도 한 번 봤으면

잠깐이라도 보았으면.......'

그 사람한테 미안하다

그 얼굴을 내 혼자 보고 있다

서울에서 목포까지.

<숙영과 나는 지금> 중에서

 

<관광버스가 보이는 풍경>에서 일행을 놓친 이들은 '코끼리'와 '밀양댁'이 되고,

<철수와 영희>에서는 공원에 다정하게 앉아 김밥을 먹는 노인부부가

철수와 영이가 되어 나타난다.

 

이런 따뜻한 시선은 2부에서 보여준 죽음을 다룬 시에서도, 동남아에서 온 신부들과

노동자들에게도 골고루 가닿는다.

그가 말했듯 '바람도 없는데 풍경소리가 여간 시끄러운 게 아'(<졸업> 중에서)니다.

조용조용한 말씨로 잘못을 타이르고 있는데도 박달나무 몽둥이로 맞는 느낌이다.

 

손목

 

나 어릴 때 학교에서 장갑 한 짝을 잃고

울면서 집에 온 적이 있었지

부지깽이로 죽도록 맞고 엄마한테 쫓겨났지

제 물건 하나 간수 못 하는 놈은

밥 먹일 필요도 없다고

엄마는 문을 닫았지

장갑 찾기 전엔 집에 들어오지도 말라며.

 

그런데 저를 어쩌나

스리랑카에서 왔다는 저 늙은 소년은

손목 한 짝을 흘렸네

몇 살이나 먹었을까 겁에 질린 눈은

아직도 여덟 살처럼 깊고 맑은데

장갑도 아니고 손목을 잃었네

한하운처럼 손가락 한 마디도 아니고

발가락 하나도 아니고

손목을 잃었네.

 

어찌할거나 어찌 집에 갈 거나

제 손목도 간수 못한 자식이.

저 움푹한 눈망울을 닮은

엄마 아버지 아니 온 식구가, 아니

온 동네가 빗자루를 들고 쫓을 테지

손목 찾아오라고 찾기 전엔

돌아올 생각도 하지 말라고.

 

찾아보세나 사람들아

붙여보세나 동무들아

고대로 못 붙여 보내면

고이 싸서 동무들 편에 들려 보내야지

들고 가서 이렇게 못 쓰게 되었으니

묻어버려야 쓰겠다고

걔 엄마 아버지한테 보이기라도 해야지

장갑도 아니고

손목인데.

 

-<손목> 전문-

 

 

귀가 어두워져서 걱정이라는 시인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바람이 하는 말, 나무가 하는 말, 아이와 노인, 귀신과 저승사자가 하는 말

모두 제대로 못 들으셨다  쳐도

아직 여덟 살 아이처럼 맑은 눈과 따뜻한 마음을 갖고 계셔서 정말 다행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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