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려라 바퀴! - 제1회 바람단편집 높새바람 11
최정금 외 지음, 양경희 그림 / 바람의아이들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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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녹녹치 않은 어린이 단편 모음집을 만났다. 방정환, 마해송, 강소천, 현덕에 이르는 1920~30년대 어린이 단편집을 대하는 듯했다. 요즘 나오는 대부분의 어린이 단편집은 쉽게 읽히게 꾸며졌다. 또 책에 반은 그림으로 채워 진데 반해, ‘달려라 바퀴’는 과감히 그림을 생략하고 고집스럽게 문학성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1920~30년대 어린이 단편집의 정취가 물씬 풍긴다.
 
그렇다고 내용까지 그 시절을 담았다는 뜻은 아니다. 요즘 우리 생활에서 아이들이 보고 느낄 수 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다만 기존의 동화들에 비해 깊이 있고 폭 넓은 주제를 담았다. 예를 들어 임태희의 ‘개 죽음’에서는 시험 전날 밤 죽어가는 개의 신음 소리 때문에 갈등하는 학생의 모습을 리얼하게 그리고 있다. 이 이야기는 상황 설정에서부터 만만치 않았는데, 독자를 긴장시키는 것은 아이가 시험을 위해 외우고 있는 내용이다.

“ 인권은 인간이 태어남과 동시에 지니게 되는 고유의 권리이다. 다른 말로 천부적 인권, 기본권이라고도 하며.....,”
 
요즘 동화에서 ‘개 죽음’처럼 삶의 자세를 묻는 주제를 등한시하고 아이들에게 밋밋한 이야기만 전하는 이유가 뭘까 생각해 봤다. 아마도 아이들은 쉽고 가벼운 책만 좋아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나 이런 편견은 아이들 동의 없이 어른들의 선호도가 개입된 것이 아닐까 싶다. 시험 전날 밤, 개 신음소리 같은 건 신경 안도록 말이다.    

이 단편집의 주제가 모두 이렇게 심각한 것은 아니다. 역으로 심각해야 할 상황을 어린이의 시각을 통해 우습고 가볍게 이끌어가기도 한다. 유은정의 ‘기도하는 시간’이 그렇다. 병환으로 위급한 아버지와 가족친지를 위해 기도하는 전도사님. 그러나 선미는 오직 기도가 끝나고 먹을 아이크림에만 정신이 팔려있다. 급기야 선미는 전도사님과는 다른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 전도사님이 선영이 언니 기도를 까먹게 해 주세요. 할머니가 언니는 속에 바람이 들어 멋만 부린다고 했습니다. 우리 가족 중에서 하나님이 가장 신경 안 쓰셔도 되는 사람입니다. 선영이 언니는 얌쳅니다. 교회 밖에서는 욕도 엄청 잘 합니다.’

기도가 점점 더 길어지자,

‘선미는 왈칵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전도사님이 친척들 기도까지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선미에게 너무 멀리 계신 것 같았다. 하나님이 가까이 계신다면 오랜만에 아이스크림을 먹는 선미 마음을 이렇게 몰라주실 수가 없었다.’

아이스크림은 녹고 기도는 길어지자, 선미의 마음은 점점 더 조급하다. 그 현장을 얼마나 생동감 있게 그렸던지, 전도사님 기도 소리로 알 수 있는 선미 가족사는 눈물겨운데, 선미의 마음을 읽으면 자꾸 웃음이 난다. 장편 소설에선 그려내기 어려운 위트와 페러독스를 드러내는 순간이다. 어린이 단편에도 이런 게 가능하다니, 신기할 뿐이다.  

단편 동화집의 또 다른 묘미를 느낄 수 있었던건, 하신하의 ‘바람이 머무는 자리’에서였다. 엄마를 그리는 마음을 애잔하게 그린 작품으로, 요즘 동화처럼 직설적이지 않고 사물을 통해 아이의 심정을 그려낸 폼이 일품이었다.

“그놈의 능소화는 탐스러운데 모과는 시들해지더라구. 결국 모과나무가 말라 죽었어. 애써 봤자 소용없는 짓이지.”

 ‘할머니는 마늘을 까다 말고 나를 바라보았다. 할머니는 능소화를 나쁘게 말하지만 내 생각에는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능소화는 태어날 때부터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모과나무가 죽으라고 일부러 힘들게 했을 리가 없다. 능소화는 모과나무와 함께 행복하게 지내고 싶었을 텐데 자기를 업어 주고 키워 준 모과나무에게 미안해서 무척 괴로웠을 것이다.’

홀로된 어미에게 짐이 되는 것이 미안한 아이의 마음이 은유적이라 더욱 애달다. 또 어미에 대한 향수를 기차가 지나갈 때 일으키는 바람으로 느낀다는 설정이라든지, 아이가 바람을 느끼면 서있는 자리를 총총히 글로 그려내, 독자로 하여금 마을 풍경을 떠오르게 하는 품이 기존 동화에선 보기 어려운 것이었다. 비로소 어린이에게도 문학적 감성을 심어 줄 작품들이 나왔단 생각이다.

‘달려라 바퀴’는 14명의 기성.신인 작가들이 모여서 만든 작품이다. 책을 펴낸이는 동인지 성격으로 흐를 위험을 경계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나름대로 까다로운 기준을 정하고 선별하여 단편 동화  집을 만들었다. 이를 시초로 제2회, 제3회 어린이 단편집을 선보일 예정이다. 작품 하나하나의 수준으로 보나, 펴낸이의 각오로 보나, 주목해야 할 어린이 단편 동화집이다. 앞으로 동화의 수준을 한층 향상 시킬 신선한 바람이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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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올림 8
이경화 지음 / 바람의아이들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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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하는 목적은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행위를 통해 자손을 얻기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생식은 안정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생물체가 영원히 살기 위해 취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 플라톤의 [향연]에서 디오티마가 소크라테스에게 -

이 말에처럼 인간을 생물학적으로 본다면 사랑과 성 역시 다른 동물들처럼 안정된 번식을 위해 존재한다. 그렇다면 성 정체성에 대한 문제는 도덕이나 윤리적인 문제를 떠나 존재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다음은 성 정체성을 생물학적 측면에서 해석할 수 있는 글이다.

머 언 옛날, 단순한 분열만으로도 개체를 늘리고 번식을 하던 간단한 방식을 버리고 몇몇 생물들이  유전자를 반으로 나누어 서로 절반씩을 섞어야 번식할 수 있는 복잡한 시스템을 선택하기 시작했습니다. 솟구치는 번식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끊음 없이 제 짝을 찾아 헤매야 하는 고생의 나날이 시작되었지만, 그로 인해 개체는 오히려 폭발적으로 그리고 다양하게 번식을 거듭해서 결국 지구를 가득 메웠습니다. 분열을 버리고 성을 선택한 뒤, 이전 개체에게는 없었던 ‘죽음’이라는 업보를 짊어지게 되었지만, 그 대가로 생명체는 훨씬 더 다양하고 훨씬 더 환경에 잘 적응하는 개체로 진화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 하리하라의 생물학 카페 p115 -

이글에 따르면 동성애는 생물학적 계보를 극복한 사례가 아닐까 싶다. 동성애야말로 번식을 위한 본능적 행위가 아니라, 생물학적 한계를 넘어선 사랑이 아닐까하고 말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글로 옮기기엔 아직 두려움이 앞선다. 이것이 나나 우리 사회가 동성애를 인식하는 경계선이다.

마치 동성애 찬양론자처럼 글을 풀어가는 까닭은 우리 사회의 경직된 성 정체성에 대하여 환기시키자는 의도가 하나이고 다른 이유는 책 ‘나’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이다.

이 책의 주인공 현이는 자신의 성 정체성 문제로 방황한다.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이 앞에 자신을 알아보는 눈빛이 나타난다. 현은 그 눈빛이 자신과 닮아다는 것을 직감한다. 그래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상요에게 끌린다.

상요는 자신이 게이라는 것을 가까운 친구에게 털어 놓았다. 그로인해 상요가 게이라는 사실이 학교에 알려지게 되고 그날 이후 친구들이나 선생님들은 상요를 전염병 환자를 대하듯 멀리하고 혐오스럽게 바라본다. 어느 날 상요는 부모님에게도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털어 놓는다. 상요의 아버지는 식칼을 상요 앞에 던진다. ‘차라리 죽어라.’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이상, 상식적인 사고를 갖은 부모라면 자식에게 죽기를 권할 수 없다. 하지만 상요 아버지에게만 탓할 수는 없다. 상요 아버지의 그런 행동은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통념이 얼마나 뿌리 깊이 박혀있는 보여주는 단면일뿐이다. 상요가 게이라는 사실은 우리사회에서 더 이상 정상적인 인간으로 살아가기 어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상요는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거나 가해를 한 일이 없는데도 마치 죄인처럼 살아야 했다. 다만, 사회 통념에서 벗어난 성적 성향을 가졌다는 게 상요의 죄이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생활양식을 문명화했다고 자랑한다. 그로인해 인간의 존엄성을 운운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인간의 문명이 인간 스스로를 구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인간이 만든 문명이 인간의 존엄성을 상징하려면, 최소한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는 한에서 자유를 보장해야 할 것이다. 부당한 대우를 받아야할 정당한 근거 없이 사회적 관습에 의해 사회구성원으로써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은 피부색으로 구분하는 인종차별과 크게 다르지 않다. 

청소년 소설로 동성애에 관한 책이 나와 있는 것을 보니, 우리사회가 소수자에 대한 인권문제를 진지하게 접근하고 있는 것 같아 반가웠다. 특히, 청소년기는 성에 관해 가장 민감할 때이고 자신에 대한 정체성에 대해 의문을 갖는 시기이다. 이 책은 자신의 성 정체성 때문에 고민하는 친구나 그런 친구들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우리가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보여주고 있다.

책 내용 중 인상 깊었던 것은 동성애에 관해 우리 사회가 얼마나 삐뚤어진 시각을 바라보는지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라디오 방송에서 가볍게 주고받는 유머용 멘트에 동성애자를 비하하는 내용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사용한다는 것을 하나의 예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나 스스로도 그런 멘트가 잘못 됐다고 생각해 본적이 한번도 없다는 사실이다. 아니 아마 그들처럼 종종 동성애를 폄하하는 농담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이 책을 통해 현(동성애자)의 귀로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들으니, 가슴이 움찔했다. 그런 의미에서 소수자들을 대변하는 책들이 많이 나와야 사회를 바라보는 입장 차이를 일반인들이 알 수 있고 반성할 수 있을 것 같다.

한 가지, 작가를 칭찬한다면 청소년 소설이 지녀할 가치를 충분히 발휘하고 있다는 점이다. 비극으로 끝난 실존 인물을 그려낸 ‘상요’, 이런 비극적인 현실을 살아내고 있는 숨겨진 게이 ‘현’, 우리사회가 지녀야할 게이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 여진. 이 인물 중 문제를 풀어나가는 열쇠는 여진에게 있었다. 여진을 통해 동성애를 대하는 태도가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 희망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청소년 소설은 이제 고전문학만을 답습할 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길을 가야 한다는 생각이다. 더 이상 사회문제를 현상 들어내기, 문제제기에만 머물 것이 아니라, 작가 나름대로 가치관을 갖고 문제해결 방안을 그려 내야한다. 물론 그것이 언제나 정답일 수는 없지만, 적어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청소년들이 막연히 시니컬해지는 일이 없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기성세대의 문학과 청소년의 문학은 그 추구하는 바가 달라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저자는 '나’에서 이 점을 충분히 담아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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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영엄마 2006-07-13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수양버들님의 리뷰는!! 리뷰 잘 읽고 갑니다. ^^

수양버들 2006-07-13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이예요!
잘 지내시죠?
 
문화콘텐츠란 무엇인가 살림지식총서 217
최연구 지음 / 살림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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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변화을 가장 민감하게 느끼지는 것이 새로운 용어가 아닌가 싶다. 남들이 흔히 쓰는 용어가 생소하게 들릴 때 새로운 변화를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 자주 듣게 되는 컬덕트(cul-duct), 컨버전스(clnvethence), 하이브리드(hybrid), 트랜드(trends), 유비쿼터스(ubiquitous), 콘텐츠(contents)  따위의 용어들 앞에 주눅이 든다. 이런 신종 용어들을 큰 테두리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이 문화 콘텐츠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문화콘텐츠란 무엇인가’에서는 문화 콘텐츠의 개념을 정의하고 문화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객관적인 자료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또 현재와 미래에 문화콘텐츠로 인해 생겨나는 산업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콘텐츠란 ?

인터넷이나 컴퓨터 통신 등을 통하여 제공되는 각종 정보나 그 내용물을 의미 한다. 다시 말하자면 콘텐츠가 영어를 해석하듯 단순히 ‘내용이나 목차’라는 의미가 아니라 ‘테크놀로지를 전제로 하거나 테크놀로지와 결합된 내용물’을 말한다.

‘원론적으로 콘텐츠는 미디어를 필요로 한다. 바꾸어 발하면 미디어는 기술의 발현물이다. 텔레비전이라는 미디어는 기술의 산물이지만 여기에는 프로그램 영상물이라는 콘텐츠를 담고 있어며, 책이라는 기술미디어에는 지식 콘텐츠를 동반한다. 결국 미디어와 콘텐츠는 분리될 수 없는 변증법적 결합물이다’

문화를 내용물이라 한다면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은 그릇이다. 시대 변화에 따라 내용물이 바뀌면 그걸 담아내는 그릇이 바뀐다. 문화와 기술이 결합된 형태를 콘텐츠라 할 수 있다.

‘기술은 물질영역이고 문화는 정신영역에 가깝다. 얼핏 기술과 문화는 물질과 정신의 관계처럼 상이하거나 대조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얼굴보다는 마음, 형식보다는 내용, 기술보다는 문화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아날로그적인 생각이다. 얼굴과 마음, 형식과 내용, 콘텐츠와 미디어, 기술과 문화는 따로 떼어놓을 수도 없거니와 떼어놓는다고 해도 큰 의미가 없다. 디지털 시대에는 사실 기술과 문화를 기술적으로 구분하는 것조차 쉽지가 않다.
  역사의 큰 흐름을 돌아보면 시대의 문화를 만들어 온 것은 기술이었다. 큰 흐름에서 보면 문화가 기술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기술이 문화를 만든다. ‘기술결정론’(technological determinism)이라는 사회과학이론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새운 문화를 만들어 논 일차적인 요인은 언제나 기술변동이었다.‘

따라서 문화적인 변화와 트렌드의 변동을 읽기 위해서는 기술변화의 추이(推移)를 살펴봐야한다.

문화 콘텐츠 산업을 ‘문화콘텐츠의 기획, 제작, 유통, 소비 등과 이에 관련된 산업’이라 정의할 수 있으며, 그 예로 영화, 게임 애니메이션, 만화, 캐릭터, 음악/공연, 인터네/모바일 콘텐츠, 방송 등을 들 수 있다. 그렇지만 문화 콘테츠는 학문적 편향에 따라 다르게 정의 내리고 있으며, 심승구 교수 경우는 ‘문화콘텐츠란 곧 문화의 원형 또는 문화적 요소를 발굴하고 그 속에 담긴 의미와 가치(원형성, 잠재성, 활용성)을 찾아내어 매체와 결합하는 문화의 창조과정이다’라고 정의 하기도 했다.

문화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

이 책에선 문화에 따라 어떻게 사회가 달라지는 극명한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1960년대를 가나와 한국의 경제 상황은 놀랍도록 비슷했다고 한다. 30년이 지난 뒤 한국은 세계 14위의 경제규모를 가진 산업 강국으로 발전한 반면 가나는 1인당 GNP는 한국의 15분의 1 수준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결과의 원인으로 한국인들이 검약, 투자, 근면, 교육, 조직, 기강, 극기정신 등을 하나의 가치로 여기고 있다는 점을 주목하고 있다.
 
  또 막스 베버는 자본주의가 서구에서 탄생하고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서구사회가 합리성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라 보고 있다. 특히 베버는 서구문화의 근간이 되는 종교라는 요소가 자본주의 정신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 주장한다.

‘종교개혁의 지도자 루터는 세속적인 직업 노동을 ’이웃 사랑의 외적 표현‘으로 여겼는데 세속적인 직업 활동을 긍정적으로 말했다는 자체가 엄청난 변화였다. 한편 또 다른 종교개혁가 장 칼뱅 (Jean Calvin)은 인간의 구원을 전적으로 신의 소관으로 돌리는 예정론을 주창하면 루터보다 더 세속적인 관심을 제시했다. 그에 따르면 누가 어떻게 구원을 받을지는 이미 신에 의해 예정되어 있고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이를 확인하는 길은 현실세계에서 성실하고 금욕적으로 살아 성공하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결국 프로테스탄티즘에서는 세속적인 성공이 신의 구원과도 같은 것이었다. 프로테스탄티즘의 기본 윤리인 금용은 경제적인 성공이나 이익 추구를 합법화시켰던 셈인데, 배버는 이런 프로테스탄트의 윤리가 자본주의의 정신과 연결된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문화사회학의 선구자인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이라는 문화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설명하면서 문화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하고 있다.

미래 사회에 문화 콘텐츠가 중요한 이유 ?

문화 콘텐츠 사업은 미래산업이고 전략산업이라고도 한다. 19세기, 서구 자본주의가 태동해 발전하던 시대, 노동자들의 생활은 열악했다. 그래서 ‘8시간 일하고, 8시간 자고, 8시간 인간답게 사는’ 세상을 원했다. 그러니 당시로서는 칼 마르크스의 등장은 필연적인 시대적 요청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시대가 변했고 노동시간은 줄어든 반면, 여가시간은 늘어나고 있다. 미래 산업은 여가를 어떻게 즐기는 가가 관건이다. 이러한 시대의 추이에 따라 발 빠른 사람들에 의해 ‘문화’와 ‘상품’이라는 ‘컬덕트’(cul-duct)라는 말이 생겨나고 있다.

컬덕트의 대표적인 예로 미디어를 통해 메시지나 콘텐츠를 접하는 것을 들 수 있다. 요즘 주가를 높이고 있는 영화산업이나 와이브로, DMB등이 좋은 예이다. 그런데 이런 경쟁력 있는 콘테츠를 만들어가는 힘이 과학기술과 더불어 축적된 문화에 있다. 문화라는 내용을 개발하여 과학기술을 접목해 나갈 때 미래 산업을 이끌어 나갈 수 있다는 게 이 책의 요지이다.

문화 콘텐츠가 대세라는 견해에 대해서는 문화 상대주의 입장에서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겠다. 문화 콘텐츠 사업이 미래를 주도 하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가 논의 대상에서 배제된 것이 아쉽다.

문화 콘테츠 산업의 잠재력과 가능성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 문화 콘텐츠 산업은 시장 규모가 크다. 시장 규모는 점점 커지고 있고 성장속도도 빠르다. 둘째, 문화콘텐츠 산업은 고부가가치 산업이다. 일예로 게임업체의 수익률은 자동차나 전자산업을 추월하고 있다. 셋째, 문화 콘테츠 산업은 파급효과가 큰 사업이다. 기술적 변화를 거쳐 생산, 유통되면서 새로운 수요를 계속 창출해 추가적 이익을 발생시키는 윈도우 효과가 크다. 넷째, 문화 콘텐츠 산업은 해외시장 진출이 상대적으로 용이해 미래의 수철 역군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저자는 문화 콘텐츠 산업에 대한 로드맵이 필요하며, 선택과 집중을 통한 문화 콘테츠 산업을 지원 육성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이 책은 문고판으로 분량도 100쪽이 체 안 되는 책이다. 적은 분량에 문화 콘텐츠에 대해 다양하게 접근하고 있다. 그래서 내용이 알찬 반면, 진행속도가 빨라 단번에 숙지(熟知)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그래서 줄을 치게 되고 다시 읽게 되는 야무지 책이다.

기술과 문화에 따른 시대의 변화는 자연이 아닌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지만, 인간 스스로 제어하기 어렵다. 그러나 시대변화 자체를 두려워하거나 변화가 발생시키는 부작용만 듣고 걱정하는 것은 큰 도움이 안 된다. 일반인들도 변화추이를 감지하고 그 변화가 어떤 일을 만들어 내는지 구체적으로 알아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래야 변화에 따라 우리 사회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부작용을 최소화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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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그인하시겠습니까? - 국어시간에 쓴 중학생 소설 모음 아침이슬 청소년 4
이상대 엮음 / 아침이슬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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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그인 하시겠습니까?>는 신월중학교 학생들이 쓴 단편소설을 엮은 것이다. 모두 열편의 단편으로, 한 학교 학생들이 쓴 것이지만 우리나라 대부분의 중학생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 책 속엔 잦은 전학으로 힘들어하는 아이도 있고, 권력의 서열화로 치욕을 당하거나 당당히 맞서는 아이도 있다. 또 가정불화로 엄마와 헤어진 아빠가 밉다고 했지만, 사실은 미워할 수 없다고 속내를 털어놓는 작품도 있다. 혼자 있는 것이 외로워서 컴퓨터를 찾는다는 아이, 공부만하라고 잔소리 하는 부모를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지 은근슬쩍 떠보고 아이도 있다.

이 책은 엮은 선생님은 아마 아이들의 그런 고민을 짐작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아이들의 모습을 작품화하면 그 어떤 소설보다 현장감 있는 작품이 탄생할 거라 믿었다.

‘처음에 중학생들과 소설을 쓴다니까 주변 사람들은 대부분 시답잖은 눈치였다.

“소설? 겨우 코흘리개 면한 것들을 데리고 ? 괜한 고생이지.”

그러나 나는 은근히 믿는 구석이 있었다.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상상력으로 번뜩이는 열다섯, 열여섯 시절. 얼마나 은밀하며 한편으로는 얼마나 혼란스런 나이인가. 존재감을 위한 자기 번민으로 가슴은 또 얼마나 터져 나갈 듯한가. 그런 가운데 한 부분이라도 소설로 옮겨낼 수 있다면 완성도에 상관없이 참으로 흥미진진한 터였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이런 타이틀로 글을 쓰자고 주문했다.

- 당신들이 중딩을 알아?

과연, 아이들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이 책에서 아이들의 주요 관심사는 놀이문화이다. 이처럼 요즘 아이들에게 학교생활 중 가장 중요하게 느껴지는 것이 친구관계와 놀이문화가 아닐까 싶다. 왜냐하면 단순히 지식만 얻으려고 한다면 도서관을 찾거나 인터넷을 이용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요즘 학교에서도 전인교육을 통한 인성교육을 중요시한다. 그런데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인성교육을 드려다 보면, 교과에서 배우는 내용과 생활이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성교육에 있어서 학습과 생활이 분리된 현상에 대해서 학생뿐만 아니라, 그들을 바라보는 선생님이나 부모들조차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니 더 큰 문제이다. 청소년은 친구 관계를 통해 인격이 형성해 나간다는 점을 고려해 볼때, 다양한 성향의 아이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 학교에서 인성교육을 지도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그런데도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이론 교육에 치중하거나 형식적인 봉사활동 따위만 하고 있다.

학교는 이제 아이들의 인격형성을 가정이 책임져야 할 문제로 여겨 방치해서는 안 된다. 아이들에게 인성에 문제가 발견된다면 학교도 일정 부분 책임을 느껴야 한다. 아이들이 부모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하는 사람이 선생님이다. 그들은 부모보다 선생님 말씀에 더 귀를 기울인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들은 아이들 인성교육에 더욱 힘써야 한다. 일년에 한 가지씩만 인성교육을 위해 목표를 세우고 꾸준히 지도한다면 아이들은 조금씩 달라질 것이다. 적어도, 학교가 학습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

이렇듯 학교생활을 통한 인성교육을 강조하는 또 다른 이유는 가정에서 아이들에게 바른 가정교육을 시킨다 해도 학교를 가면 달라지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하지 않으려면 불의를 보고도 못 본 체해야 한다. 때론 친구를 배반해야 하는 것이 아이들 세계다. 그런 그들에게 얻어맞더라도 비굴해지면 안 되고 바른 언행만을 강요하는 것은 무책임한 행동이다. 이처럼 학교에서 생기는 문제는 학교에서 책임지는 자세가 가져야 한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를 보면서 청소년들이 저항하기 힘든 사회구조에 벗어나기 위한 방편으로 사이버 세상을 찾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들 내부에선 현실의 것들을 갈망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현실로부터 소외시키는 또 다른 요소는 미래이다. 미래를 보장받기 위해 현재에서 소외되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도 현재를 즐길 수 있는 문화가 필요하다. 그래야 아이들도 사이버가 아닌 현실을 살아 갈 수 있다.

그렇지만 불행히도 우리 아이들은 그렇게 성숙한 사회를 살고 있지 않다. 그래서 그들은 선택한 것은 사이버라는 극히 한정된 공간의 놀이문화다. 그마저 어른들에게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한다. 아이들이 컴퓨터를 찾는 또 다른 이유는 외로워서, 다른 놀이가 없어서 라고 한다. 정말 그럴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학원을 다니느라 바쁜 친구나 형제를 대신하고 직장 다니는 부모를 대신해 놀아주고 대화를 나누어주는 것이 컴퓨터가 아닌가. 더욱이 그들은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할 권한도 없다.

아이들은 학교는 물론이고 학원에서도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획일적인 학습을 제공받는다. 이런 학습은 학생들에게 창의적이거나 자율적인 학습의지를 발현시킨 수 없다. 그런 그들이 가상의 트랙을 떠도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그 안에서 숨겨진 욕망과 힘을 발산한다.

이제 사이버 세상은 청소년들에게 유일한 놀이 공간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들은 일상생활에서도 사이버 상의 언어를 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현실세계를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 그들의 현실 속의 번뇌가 <로그인 하시겠습니까?>에서 잘 들어 난다.

청소년이 쓴 소설의 가장 큰 장점은 현장성에 있다. 기성세대가 쓴 청소년 소설의 경우 옛일을 추억한다든지, 요즘 청소년의 마음을 추측해서 표현한 것이다. 그러니 현장성이라는 측면에서 자신의 언어로 자신들의 문화를 표현한 청소년 소설을 따라 갈 수 없다. 이런 점에서 <로그인 하시겠습니까?>는 그 누구보다도 청소년들이 반가워할 작품이다. 어른들도 자녀들 마음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반면, 청소년이 쓴 소설이라 소재가 단순하고 사유의 깊이가 얇다. 그러나 중학생이 시도한 소설이라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상황 전개나 전체 구성 면에서 소설적 테크닉을 보이기도 해 대견하다. 상황이나 심리 묘사도 차분히 잘 전개하고 있다. 무엇보다 그들이 쓰는 언어에서 경쾌함과 생동감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어른들은 어린이나 청소년들을 보면 ‘학창시절이 가장 좋은 때다’라든가, ‘너희가 무슨 걱정이 있겠냐.’고 한다. 그러나 나의 학창시절은 정말 아무 걱정 없이 좋은 때였는가, 그렇지 않았다. 어른이 되어 지나고 보니, 학창시절 고민들이 시시해 보이는 것뿐이지, 당시 겪었던 고통의 무게를 저울로 달아본다면 지금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나이가 들면서 고통을 이겨내는 방법을 터득했기에 조금은 여유를 갖게 될 수 있다.

또 나이가 들면서 오래된 사진이 빛을 바래듯, 어릴 적 통증의 강도가 옅어진다. 거기에 고운 빛을 덧칠하여 당시의 아픔을 아름다움으로 미화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사실과 다르게 '그 때가 좋았어.' 라고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읽다보면 우리가 겪었던 청소년기의 아픔의 강도를 다시 느낄 수 있다.

앞으로도 청소년 작가들이 많이 나왔으면 한다. 이 책은 좀 가볍게 시작했지만, 이런 시도를 계속하다 보면 점점 더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을 것이고 기성세대와의 소통도 원활해지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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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05-13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당선 축하드립니다. 중 1이 된 큰딸이 있어 그 또래 아이들의 관심사나 생각을 읽고 싶어요. 추천합니다.

수양버들 2006-05-13 1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emhy311 2006-05-14 0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 드립니다.

수양버들 2006-05-14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

아영엄마 2006-05-15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양버들님 축하드립니다~ ^^

수양버들 2006-05-15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하늘바람 2006-05-16 0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잘 쓰셨네요 축하드려요

수양버들 2006-05-16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마늘빵 2006-05-20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양버들님 drumset 입니다. 반갑습니다. 오늘 즐거웠습니다.

수양버들 2006-05-21 0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저도 반가웠습니다. 모처럼 만난 자리데 일찍 나와야 되서 미안해요.
아프락사스님 알라딘에선 유명한 분인가봐요.
저는 알라딘엔 리뷰만 올렸지 다른 건 할 줄 몰라서 ^^
편안한 주말 보내세요.
 
집 근처의 벌레들 - 가만히 앉아서 찾아보자 과학은 내친구 21
고바야시 토시키 지음, 다카하시 기요시 그림, 엄기원 옮김 / 한림출판사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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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근처의 벌레들>이란  책제목을 보자, 곤충과 벌레를 구분하는 영역이 궁금해 졌다. 국어사전을 찾아 보니, ‘벌레’는 ‘곤충을 비롯하여 기생충과 같은 하등동물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라 되어 있다. 그러니 곤충은 벌레라는 개념에 포함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는 곤충과 벌레의 관계를  바꿔 쓰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예를 들면, ‘곤충의 세계’라든지, ‘곤충세계에서 살아남기’라는 제목을 붙이고 속내용은 절지동물 중 다지류에 속하는 지네나 거미류를 다루고 있거나, 환형동물에 속하는 지렁이를 넣은 경우가 그렇다.

아이들은 학교 교과에서 곤충은 6개의 다리를 가지고 있으며, 몸통은 머리, 가슴, 배로 나누어 졌다고 배운다. 그런데도 일반적으로  곤충과 벌레를 같은 영역으로 다루거나, 곤충 안에 다른 동물을 포함시키는 경우가 흔하다. 이렇게 단어의 개념을 애매하게 사용하다 보면, 어린이들에게 혼선을 줄 수 있으니 ‘벌레의 세계’, ‘벌레세계에서 살아남기’로 제목을 바꾸고 내용을 분류하는 것이 좋겠다.
 
<집 근처의 벌레들>는 제목에 벌레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개념를 바로 했으며 지네, 거미, 지렁이, 먼지벌레 따위를 다루고 있다. 유치원생부터 초등학교 1~2학년을 대상으로 만들어진 이 책은 흙과 나무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벌레들 모습을 그려 설명을 달았다. 현광색이 들어 있지 않은 약간 누런 속지에 그린 그림은 원색을 피하고 은은한 색을 써으며, 수채화로 섬세하게 표현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편안한 느낌을 준다.

벌레에 대한 설명으로 먹이, 번식, 몸의 구조와 기능 따위의 기본적인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했다. 벌레들을 실제크기로 그려 어린이들이 현장에서 쉽게 실물을 발견할 수 있게 배려하였다. 책 마지막에는 이 그림책에 나오는 벌레들을 기르는 법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주변에 사소한 것들을 놓치고 엉뚱하게도 특이하고 거대한 것에만 관심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에게 ‘희귀 곤충 전’은 보여주면서, 정작 우리 주변에 있는 벌레들을 관찰할 기회는 주지 않으니 말이다. 이처럼 예전엔 일상생활에서 보고 느꼈던 것을 요즘 아이들은 책이나 박물관을 통해서 습득한다. 이런 방법은 자기 주도적인 학습이 되기 어렵고, 학습자가 일방적으로 수렴하는 학습이 되기 쉽다. 또 생활과 동떨어진 학습은 특이하거나 엽기적인 것을 선호하게 한다.

어린이나 청소년들이 컴퓨터나 환타지의 가상세계에 빠져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어려서부터 실체를 접하기 보다는 책이나 다른 도구로 외부의 지식과 정보를 습득하기 때문에 현실보다는 가상세계를 더욱 친근하게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어린이들의 본래의 관심사는 생활주변에 있다. 그래서 어린이들에게 가상세계보다는 생활주변의 사물들을 익숙하게 할 필요가 있다.

<집 근처의 벌레들>은 제목 처럼 집 근처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벌레들의 여러 모습 담아 어린이들을 생활주변에 관심을 갖게 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책 속에 펼쳐진 생명들의 놀라운 모습을 직접 찾아보고 관찰할 때 책의 의미가 살아날 것이니, 책 속에만 의지하지 말고 아이들에게 생활주변의 벌레들을 관찰할 기회를 주는 것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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