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조선일보 DB
진리는 문장 아닌 마음에… 제자들에게 강조했지만
일반인에겐 책읽기 권유
古書부터 현대물리학까지 1만여 장서 목록 직접 작성
빌리면 안 돌려줄 만큼 아껴
16세기에 목판 인쇄한 희귀 고서(古書) '십현담요해(十玄談要解) 언해본(諺解本)'
<아래 작은사진>이
성철(性徹·1912~1993) 스님의 장서 가운데서 발견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본지 9월 16일자 보도
"책을 읽지 말라!" 조계종 종정(宗正)을 지냈던 성철 스님이 남긴 말 중에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못지않게 유명한 가르침이다. 사람들은 이 말을 '지식에 묻혀 지혜를 그르치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하곤 한다.
그런 성철 스님이 대단한 장서가였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의아해했다. 어떻게 된 것일까? 그 중요한 고서는 왜 스님이 입적한 뒤 16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나온 것일까?
경남 합천 해인사(海印寺) 백련암(白蓮庵)의 감원(監院·암자의 가장 높은 스님)인 원택(圓澤) 스님은 이곳에서 입적 때까지 성철 스님을 모셨던 승려다. 그는 "그것은 큰스님께서 신도들이나 일반 승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수행과 참선의 길에 들어선 승려에게 하신 말씀인데 잘못 알려졌다"고 말했다.
성철 스님은 생전에 선방(禪房)에서 도를 닦는 승려들을 위해 '수자오계(修者五戒·수행자를 위한 다섯 가지 가르침)'를 남겼다. '잠을 많이 자지 말라(2~3시간 정도만 자라)' '적게 먹어라(끼니마다 70% 정도만 먹고 간식은 먹지 말라)' '말을 하지 말라' '돌아다니지 말라', 그리고 '책 보지 말라'였다.
화두(話頭)에 대한 공부를 통해 마음과 근본을 깨쳐야 할 수행자들은 뒤를 돌아보지 말고 일심(一心)으로 정진해야 한다는 의미였다고 원택 스님은 설명했다. '진리는 문장이 아니라 오직 자기 마음에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철 스님은 일반인에게는 오히려 부처님의 말씀과 교리를 알기 위해 책을 읽어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했다는 것이다.
성철 스님이 장서를 수집하게 된 것은 1947년 경남
양산의 내원사(內院寺)에 머물 때부터였다. 이때
청담(靑潭) 스님의 소개로 신도 김병용씨로부터 희귀 불교서적 1000여 권을 기증받았다.
1980년대 중반까지 스님은 계속 책 수집과 독서에 힘을 쏟았다. 1만권의 장서 중 고서가 3000권, 현대 서적이 7000권이었다. 성철 스님은 모든 장서의 목록을 직접 공책에 만년필로 적었다.
불교서적뿐 아니라 역사, 철학, 현대물리학 관련 서적까지 있었다.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찾아와 '책 좀 빌려 달라'고 하면 스님은 "예서 보고 가거라"고 할 뿐 절대 빌려주지 않았다.
"책 갖고 가서 돌려주는 것 못 봤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너한테 좋은 책 있나?"며 남에게서 빌린 책 역시 돌려주지 않을 정도로 무척 책을 아꼈다고 원택 스님은 회고했다.
-
1970년대까지는 맞상좌였던 천제(闡提) 스님이 책을 구해 오는 임무를 맡았고, 1980년쯤부터 원택 스님이 임무를 넘겨받았다. 몇 달에 한 번씩 서울에 올라가 명동 등에서 일본과 대만에서 나온 불경과 학술서를 구해 보따리로 싸 들고 돌아왔다고 한다.
성철 스님은
일본의 불교 월간지 '대법륜(大法輪)'을 구독하면서 거기 나온 신간 서적을 눈여겨봤다가 구해 오도록 했다. 그는 해인사 방장(方丈)으로 있을 때 보름에 한 번씩 법문(法問)을 열었다.
그때마다 법문 자료를 찾기 위해 서고를 자주 드나들며 경전을 자주 읽었다. 성철 스님은 책을 무척 빨리 읽기로도 유명했다. 어느 날 한 노승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원택 스님에게 이렇게 물었다.
"느그 스님은… 팔만대장경을 거꾸로 읽는다면서?" 한 번 경전을 보면 한눈에 서너 줄씩 들어올 정도였으니 뒤에서부터 읽어도 뜻을 알 수 있을 경지였다는 것이다. 원택 스님은 "큰스님은 그만큼 총명하셨다"고 회고했다.
성철 스님은 한문과 일본어에도 무척 능통했다. 그는 생전에 이렇게 말했다. "내 평생 남에게서 배운 것이라곤 일제시대 소학교 6년 동안 일본어를 배운 것하고 서당에서 '통감(通鑑)'을 배운 것뿐인데, 한문 문리(文理)가 통하고 난 뒤로는 남에게서 배운 적이 없었다." 그 뒤로는 독서를 통해 지식을 축적했다는 얘기였다.
백련암에 있던 성철 스님의 서고는 이불장처럼 생긴 보관함 안에 책을 수북이 쌓아 놓는 형태였다. 스님은 1992년 "내가 너무 힘들어서 농짝 문을 열고 닫을 수 없다"며 도서관처럼 꽂을 수 있도록 새로 지으라고 했다. 그러면서 새 서고 건물에 '고심원(古心院)'이라는 이름을 지어 줬다.
건물을 다 짓고 막 문을 달려고 할 때 성철 스님이 입적했다. 원택 스님은 "더 이상 서고를 이용할 분께서 계시지 않았기 때문에 그 건물은 기념관으로 쓰고 책들은 모두 임시 서고로 옮겨 지금까지 보관했다"고 말했다.
스님이 생전에 하도 귀하게 여긴 책들이라 함부로 손을 댈 수도 없었다. 그러고 나서 그 책들은 점차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졌다.
성철 스님 생전에는 해마다 가을이면 책들을 모두 꺼내 말리는 거풍(擧風·바람을 쐼)을 했다. 상좌(上佐·스승의 대를 이을 승려들 중 가장 놓은 사람) 네댓명이 달라붙어 온종일 작업했다. 하지만 10년 넘게 이 일이 중단되다 보니 책에 습기와 곰팡이가 생겨났다. 성철 스님은 젊은 시절 출가할 때 속가(俗家)의 부인이 임신한 것도 모르고 집을 나섰다.
유일한 혈육으로 남은 그의 딸 불필(不必) 스님은 5~6년 전부터 "책들을 저대로 놔둬서야 되겠느냐"며 걱정했고, 원택 스님은 마침내 큰 맘 먹고 올봄부터 책 정리를 시작했다. '십현담요해'는 이 과정에서 발견됐다. 성철 스님이 남긴 장서 목록은 현재 전산화 작업 중이다.
- ▲ 성철 스님 사진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