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킨 마스크 - 그래도 난 내가 좋아! 작은 곰자리 2
우쓰기 미호 지음, 장지현 옮김 / 책읽는곰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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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동화에는 나는 누구일까? 나는 어떤 가치를 지니는 사람인가? 나는 어떤 쓸모가 있을까?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와 같은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는 주제들이 많다. 그 대표적인 동화로 권정생의 강아지 똥을 들 수 있다. 아무 쓸모도 없어 보이는 강아지 똥이 예쁜 꽃을 피우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되는 소중한 거름이 된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강아지 똥’이 아무리 훌륭한 거름이라 하더라도 이왕이면 세상 향해 뽐 낼 수 있는 모양새와 향기를 지녔다면 좋았지 않았을까? ‘강아지 똥’이 하는 일이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남들이 알아주지도 않고 더럽다 여기는 거름 같은 존재가 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동화 속에 존재하는 ‘강아지 똥’을 가엽게 여길지라도 닮고 싶지는 않을 거란 말이다.


치킨 마스크도 ‘강아지 똥’처럼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는 그림동화이다. 치킨마스크는 올빼미 마스크처럼 계산을 빨리하지도 못하고 글씨도 예쁘게 쓰지 못한다. 햄스터처럼 멋진 걸 만들거나 장수풍뎅이 마스크처럼 씨름을 잘하거나 개구리 마스크처럼 노래를 잘 부르지도 못한다. 그래서 늘 자신이 없다. 이런 치킨마스크에게 기회가 찾아온다. 다른 친구들의 마스크를 골라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치킨마스크는 올빼미처럼 수학문제도 잘 풀 수 있게 되었고 햄스터처럼 근사한 작품을 만들 수도 있다. 뭐든지 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치킨마스크는 새로운 고민에 빠졌다. ‘나는 도대체 뭐가 되고 싶은 걸까?’ 치킨마스크는 치킨마스크를 다시 썼다. 그리고 자가가 할 일, 자기를 필요로 하는 일, 자기가 하고 싶을 일을 찾아낸다.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는 『강아지 똥』과 『치킨마스크』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뭘까? 이 두 동화의 공통점은 자신을 누군가 필요로 한다는 것, 그것으로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다는 것이다. 차이점은 『치킨마스크』에서 치킨마스크는 다른 삶을 살아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고 자기 선택에 따라 다시 치킨마스크가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강아지 똥’은 그렇지 못했다. 꽃을 피우는 거름이 된다는 사실에서 가치를 찾지만 다른 선택에 여지가 없이 숙명처럼 자신 운명을 받아드리고 행복해 한다.


이런 ‘강아지 똥’의 모습은 너무나 순종적이고 희생적이며, 순고해서 종교적인 성인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그에 비하면 『치킨마스크』는 성숙되어가는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자아를 찾고자하다, 다양한 가능성 앞에서 결국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내 당당히 친구들에게 돌아가는 치킨마스크의 모습은 성숙해 가는 다분히 인간적인 모습이다.


아이들은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부러워하지 않고 꽃을 피우는 거름이 된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하는 ‘강아지 똥’에게 감동을 느낀다면, 자신의 길을 찾아 씩씩하게 친구들에게 다가는 ‘치킨마스크’에겐 공감을 느낄 것 같다.


이 책에서 마스크는 여러 가지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다양한 기회, 각자의 특기가 그것이라 할 수 있다. 필자는 이 마스크가 다양한 특기를 길러주는 마스크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든 꾸준히 노력하면 특기를 기를 수 있다. 그러나 ‘치킨 마스크’는 친구를 좇아 경쟁적으로 특기를 기르기 보다는 자기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한다.


불행이도 우리 아이들에겐 이와 같은 고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것 같다. 다른 친구들과 비교하고 경쟁하기에 급급하여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생각할 겨를이 없는 것이다. 지난여름 작가 은희경이 한 말이 생각난다. “일찍 자신이 무엇을 잘하는지 알면 살아가는데 유리하다” 우리 아이들도 이제는 남들이 하는 것을 좇아가기보다 자기가 무엇을 잘하고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를 먼저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치킨 마스크』단순한 구조의 뻔 한 스토리 같지만, 많은 생각을 하게하는 그림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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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와 통하는 정치학 - 고성국 박사가 들려주는 정치와 민주주의 10대를 위한 책도둑 시리즈 1
고성국 지음, 배인완 그림 / 철수와영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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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학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나와 내가 소속된 사회에 정치가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에 대해 알고 싶어서 일 것이다. 이 물음에 답을 얻기 위해서 저자는 또 다시 ‘그럼 정치가 뭐냐?’ 는 질문을 던진다. 그 해답을 얻기 위해선 인간을 불안전한 존재라는 사실을 전재로 한다.


“인간은 완전해지고자 하는 열망과 노력 때문에 모든 면에서 여타의 생명체와는 다르게 생활해왔습니다. 인간만이 경제를 영위하고 의식적으로 사회관계를 형성합니다. 인간만이 문화와 예술을 창조하고 종교생활을 합니다.”


“‘완전한 인간’들이 사는 곳에는 정치도 경제도 사회, 문화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모든 것은 인간들이 자신의 불완전함을 극복해가는 과정에서 만든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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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완전한 인간들이 사회를 이루고 살면 필연적으로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합니다. 서로 생각과 이해관계가 달라 갈등의 생길 수밖에 없고 이 갈등을 방치하면 마침내는 ‘힘의 논리’가 생겨 힘 있는 사람이 마음대로 하는 상태가 됩니다. 누구도 안전하지 못한 상태가 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불안전함으로부터 발생하는 ‘불안정성’을 극복하기 위해 인간은 사회 구성원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규칙과 원칙을 정하게 되었습니다. 사회에 ‘질서’가 만들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전체 과정을 ‘정치’라 부릅니다.”


따라서 사회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은 관심여하에 관계 없이 정치와 밀접하게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있다. 국가가 사회로부터 분리되어 국가라는 체제를 이루기 시작한 것은 근대에 들어서이다. 국가체제가 형성되지 않았던 근대 이전엔 군대나 세무서, 재판소 같은 국가 기구들이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지방영주나 지방 관리들이 그 역할을 담당했다. 근대이후로 군대나 세무서, 재판소 같은 공적 영역은 국가가 담당하고, 집, 학교, 직장, 종교 단체 따위는 사적 영역은 사회가 담당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책에서는 정치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의 해답을 인간이 지닌 특성과 생존을 위한 ‘질서’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 정리하면서 하고 있다. 또한 국가라는 개념을 사회와 공적영역이 분리되는 체계를 갖추기 시작한 시점을 기준으로 형성되었다고 보고 있다. 그렇다고 본다면 근대 이전의 고려나, 신라, 로마, 중세 기독교시대의 나라들을 국가라고 볼 수 없는데 나라와 국가의 차이점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oo나라’라고 하면 국가처럼 독립된 공적영역은 없어도 조세제도와 병역제도가 갖추기 마련인데 사회단체로 분류하여 설명하기도 어렵지 않을까하는 의문이 든다.


“중요한 것은 이런 후퇴와 새로운 문제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이를 극복하고 역사를 진보의 방향으로 밀고 왔다는 사실입니다.”

라는 말을 부연 설명하기 위해 경주의 석빙고와 오늘날의 냉장고를 예로 들고 있다. 신라시대 석빙고는 임금들만 먹었는데 오늘날엔 냉장고가 보급되어 모든 사람들이 왕처럼 얼음을 먹는다. 이것은 과학기술의 진보 덕분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정치적인 면에서도 진보되어 왔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자유를 누리고 살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과학적진보가 그렇듯이 물질적 혹은 편리성에 대한 발전을 진정한 진보라고 볼 수 있는가는 의문이 생긴다. 이 책 말미에서 저자가 언급했듯이 빈부의 격차가 5:1 정도까지는 모든 사람들이 인정할 수 있는 수준이지만 그 이상이 되면 구조적인 모순을 의심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사회는 어떠한가? 빈부의 격차가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말이다. 또한 우리가 누리는 자유가 진정한 자유인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움직여지는 체제로부터 소외되지 않고자 몸부림치다가 결국 자신의 삶은 잃어버리는 것이 현대사회의 세태 아닌가, 보이지 않는 권력과 경쟁으로부터 예전보다 더 자유로울 수 없고 불평등의 구조가 심화되고 있는 것이 현대의 사회가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류가 문제를 인식하고 극복하려는 의지만큼이나 지배하려는 의지를 구조적으로 발전시켜왔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오늘날의 사회구조를 진보라고 보기 어렵다는 생각이다.


이 책을 읽으면 우리 사회와 구조와 정치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제목 처럼 10대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정치학 책이었다. 특히 내게 좋았던 부분은 ‘8장 권력을 정당화하는 이론은 어떤 것들이 있나요?’ 었는 데, ‘왕권신수설’에 뒤집는 홉스의 이론과 로크의 ‘저항권 이론’ 은 루소의 ‘사회계약설’ 에 대해 쉽게 이해하고 정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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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 이슬람은 전쟁과 불관용의 종교인가 고정관념 Q 9
폴 발타 지음, 정혜용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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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모래사막에 둘러싸인 건조한 땅에서 오아시스를 의지하면 사라가는 중동사람들을 살아가게 한 힘은 종교의 힘과 동서양을 잇는 교역일 것이다.

척박 땅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자신들에게 주어진 자연환경을 원망하기 보다는 신의 뜻으로 받아 드릴 수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 연유로 그들의 다신을 숭상했던 고대 종교와 달리 일찌감치 유일신을 강조했으며, 그 어떤 종교보다 강력한 규율을 요구하고 있다.

유럽이 종교적 권위에 억눌려 암흑기를 맞이하는 동안 이슬람 문화에선 그리스 문화를 받아들여 문명의 꽃을 피운다. 그러나 유럽이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근대라는 새로운 물결을 거쳐 동안 새로운 문명을 만드는 동안, 이슬람권 국가들에선 정교분리를 이루지 못하여 대부분의 나라들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 결과 국제 경제를 지배하고 있는 원유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국가적으로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는 것이 이 책의 저자가 제기한 이슬람문명의 현주소이다.

이런 저자의 관점은 진화론적 역사관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현대 사회학자들에 의해 진화론적 역사관이 비판을 받고 있으며 근대 또는 근대성에 대해서 비판을 받고 있다. 그렇다면 진화론적 입장이 아닌 새로운 입장에서 정교분리를 이루지 못한 이슬람 문화권을 어떻게 볼 수 있을까? 또한 근대성에 영향을 더 물든 이슬람문명은 현대 문명 국가 보다 올바른 지향점을 갖고 있는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필자는 갖고 있지 않다. 또한 독서량에 부족하여 관련된 의견을 접하지 못했다. 다만,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방송이나 인터넷을 통해 새로운 정보를 접하는 이슬람인들이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쉠 아그하잘 같은 사람은 “종교는 단순히 이민의 아편일뿐만 아니라 권력의 아편이다.”라고 선언하기도 하였다. 이 책에선 이슬람을 근대화해야 하는가, 아니면 근대성을 이슬람화해야 하는가? 이 두 방향에서 논의가 진행 중이라고 하는데 필자가 궁금한 것은 ‘이슬람이 근대화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에 있다. 이슬람이 근대화를 이루와 정교가 분리되고 중세이후 후퇴해온 과학문명을 발전시킨다면 그들은 어떤 미래를 만들 나갈까? 근대성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보안하여 새로운 문명을 창출할 것인가, 아니면 서방세계에서 저지른 오류를 답습할 것인가? 의문이 아닐 수 있다.

이번에 『이슬람』과 함께 같은 출판사 시리즈물인 『팔레스타인』과 『유대인』을 읽어 중동지역을 문제점을 전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기르는 계기를 가졌다.

『유대인』발견한 아이러니는 현대 자본가를 만들어낸 것이 유대인이라는 사실과 이런 자본주의에 가장 강력하게 대항하는 공산주의 이론을 만든 마르크스나 볼세비키 혁명가들 역시 유대인이라는 사실이다.

또 하나의 아이러니는 유대인에 대한 세계인의 동정과 비난의 근원이 민족주의에 있다는 것이다. 오랜 세월에 걸쳐 떠돌이 생활을 하며 핍박받아 오던 유대인은 2차 세계대전 나치에 의해 대량학살이 자행된다. 너무나 참혹한 경험을 하게 된 유대인들은 유대민족을 지키기 위해 시온주의를 만들어 결국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만들게 된다. 그로 인해 팔레스타인들이 자신들이 살던 고향을 버리고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으니, 유대인은 민족주의로 인해 받은 피해를 민족주의로 극복하는 동시에 애매한 팔레스타인에게 앙갚음을 한 것이다.

이 일은 남의 일이라고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20세기에 힘으로 다른 나라의 땅을 점령하여 국가를 세웠다는 것, 그런 사실을 강대국인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묵인하고 승인하며 경우에 따라선 지원하고 있다는 엄청난 사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실이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 것은 중국이라는 대국이 수정자본주의로 선회하면서 중화사상을 버리지 않고 서남공정에 이어 동북공정을 전략화하고 있는 상황이고 일본이 미국과 친밀하게 지내면서 군사력을 확장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유대인이 고대에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다른 나라를 침략해 국가를 세우는 것을 정당화하고 국제적으로 용인한다면 중국이나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할 수 있는 근거의 선례로 악용될 수 있다.

따라서 팔레스타인문제는 물론이고 요즘 국제사회에 이슈가 되고 있는 티베트 독립문제에 대해 국가적 차원에서 지지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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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돼지들이 아주 똑똑했어요 느림보 그림책 12
이민희 지음 / 느림보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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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돼지들이 아주 똑똑했다. 그들은 지금 사람처럼 건물을 지울 줄도 알았고 생활에 유익한 여러 가지 물건도 만들 줄 알았다. 돼지들은 사람처럼 춤을 출줄 알았다. 돼지들은 더 많은 시간을 즐기기 위해 대신 일해 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돼지들이 생각해 낸 건 다름 아닌 사람이다.’

‘사람들이 일하는 동안 돼지들은 즐겁게 놀 수 있었다. 그러나 돼지들은 계속 춤만 추었고 사람들은 점점 똑똑해 졌다. 결국, 돼지들은 사라졌다. 똑똑해진 사람들은 할 일도 많아졌다. 돼지들처럼 대신 일할 누군가 필요했지요. 그래서 로봇을 만들어 일을 시켰어요. 사람들은 이제 집안에서 리모콘만 누르고 일은 로봇이 해요.’

그림 동화 『옛날에는 돼지들이 아주 똑똑했어요.』를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그렇다면 이제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미야자와 겐지’의 『주문 많은 식당』, 『거미와 민달팽와 너구리』에서 느꼈던 섬뜩함이 느껴지는 그림동화이다. 또한 독자 스스로 주제를 유추하게 하는 글의 구조도 많이 닮아 있다. 단순한 글과 그림에 강렬한 이미지와 의미를 담고 있어, 아이들과 짚어 가면 읽으면 좋겠다.

특히, 이 책에서는 명화를 패러디 한 것이 인상적이다. 노예를 부리던 시절의 사람들을 ‘부지발에서의 춤을’ 패러디하여 춤추는 돼지로 표현했고, 위험한 환경 속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마천루에서 점심을’를 패러디 했다. 이 밖에도 ‘모나리자’,‘생각하는 사람’,‘절규’ 등을 패러디하고 있어, 그림을 보는 재미와 함께 현대사회의 문제점을 고민하게 한다.


2006년 ‘한국안데르센상’ 대상 수상작


“심사 위원 만장일치로 대상에 선정된 <옛날에는 돼지들이 아주 똑똑했어요>는 현대 문명의 풍자로서 작가의 유니크한 감수성이 간결한 문장과 쉽고 편하게 느껴지는 조형언어로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풍부하다기보다는 모자람이 없는 이 작품은 마치 ‘이 그림책을 감상하는데 지장을 주는 요소가 있으면 지적해 주세요.’라고 부리는 듯합니다.”


- 2006 한국안데르센상 심사평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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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를리외르 아저씨 쪽빛그림책 2
이세 히데코 지음, 김정화 옮김, 백순덕 감수 / 청어람미디어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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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리외르란 제본업을 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로 오늘날엔 ‘특별한 한 권을 위해 제본하는 수공예적 예술’이라는 아트 장르로 보고 있다. 도서전에서 볼 수 있었던 ‘북아트’가 우리에겐 생소했던 반면 유럽에서 오랜 전통을 갖은 예술 장르였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짐작할 수 있었다.

수많은 신간 서적이 쏟아져 나오니 책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풍부해 졌다고 할 수 있지만, 책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의 양식은 그렇지 못하다. 그런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책에 대한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책이 바로 『나의 를리외르 아저씨』이다.

자기가 보던 식물도감을 소중히 여기는 소녀와 그런 소녀의 마음을 알아주고 소녀만의 특별한 식물도감을 제본해 주는 를리외르 아저씨, 책은 오랫동안 멀리 떨어져 있는 낯선 사람들과 공감대를 형성해 주고, 노인과 아이를 이어주는 공감대를 형성한다. 이런 기묘한 만남과 소통을 글이 아닌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어 그림책을 읽는 묘미를 제대로 살리고 있다.

400년을 살아 온 아카시아 나무를 보면서 꿈을 키웠던 를리외르 아저씨께, 책을 제본해준 고마움의 표시로 소녀는 자신이 키운 아카시아 묘목을 선물한다. 400년이 넘은 아카시아 나무처럼 꿋꿋이 전통을 지켜온 를리외르 아저씨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소녀는 꿈과 희망을 의미하는 아카시아 묘목을 선물한 것이다. 전통을 잊지 않고 삶의 양식을 지켜 나가면서 새로운 꿈을 키우겠다는 잔잔하면서도 철학적인 메시지가 전하고 있다.

그림이 글의 배경에 머무르지 않고 그림으로 전체 스토리를 이끌어가고 있어, 그림책을 읽는 재미를 백분 활용한 수채화가 아름다운 그림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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