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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파이어, 끝나지 않는 이야기
요아힘 나겔 지음, 정지인 옮김 / 예경 / 2012년 6월
평점 :
뱀파이어는 왜 죽지 않고 살아날까?
박찬욱 - 박쥐 (2009)
이 책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뱀파이어의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다. 그들은 한때 실제로 무서운 존재였고 응징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섬뜩한 뱀파이어를 두고 아름다움을 논하기 시작했다. 시대에 따라 인식의 변화는 있지만, 결국 그것이 어떤 상징으로 이해되면서 이른바 뱀파이어 이야기가 오늘날까지 진화한 셈이다. 그것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살피기 전에 과연 그러한 존재가 또 있었는지 짚어볼 일이다. 위대한 캐릭터라면 늘 곁에 라이벌이 있듯 뱀파이어에게는 좀비가 있다. 사실 좀비의 역사는 뱀파이어의 그것에 비하면 초라하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좀비물과 뱀파이어물은 동시에 부흥기를 맞았고 거의 비슷한 정도로 생산되고 있다. 그 두 캐릭터가 등장할 때 기본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 은유는 이제 사람들에게 제법 친숙하다. 그래서 대중문화에서는 그것을 더욱 적극적으로 소비하려는 태도를 보인다. 요즘 극장에 가면 몇 작품 걸러 좀비와 뱀파이어를 만나곤 한다.
그런데 지겹지가 않다. 요즘 난다 긴다 하는 시리즈물도 세 편만 나오면 그 이상 어떤 성과를 거두긴 힘든데, 그토록 오랜 역사 속에서 몇몇 요소를 제외하면 크게 다를 것도 없는 캐릭터에 계속 열광하는 이유가 뭘까? 작품이 그다지 훌륭하지 못해도 매력적인 뱀파이어가 나오는 것만으로 흥행하는 경우가 있는 걸 보면 뭔가 마력을 숨기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크게 두 가지로 해석된다. 하나는 그 이야기가 대중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전개되고 부분적으로 변주되는 터라 어느 정도 보증된 재미를 느끼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사회적 맥락의 의미를 풍성하게 만드는 키워드가 날이 갈수록 늘어나는 점이다. 후자는 새로운 뱀파이어를 탄생케 하는 조건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좀비와 뱀파이어가 어떻게 다른지 비교해보자.
동유럽에서 온 신비로운 귀족 혹은 구 유럽 앙시에레짐의 유물을 은유하는 뱀파이어와 아프리카에서 납치되어 강제로 이주를 당한 흑인노예들이 식민 지배를 받으면서 발전시킨 부두교에서 유래한 좀비는 출생부터가 다르다. 좀비는 유럽과 미국의 제국주의의 그늘 속 존재로서 백인들을 잠식한다. 젠더, 인종, 노동자 등 확실히 정치성이 뚜렷한 좀비와 견주었을 때 뱀파이어는 그 오랜 역사만큼이나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된다. 특히 뱀파이어는 일반인으로 위장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한때 에이즈와 동성애, 공산주의와 간첩 등의 은유로 각광받았다. (참고: 2012 Cine-Vacances Seoul 김숙현) 그래서일까? 좀비는 여전히 무섭지만, 뱀파이어는 때로 아름답다. 두 캐릭터는 똑같이 죄의식에서 비롯되는 두려움로부터 탄생했는데,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태도가 이렇듯 사뭇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Bram Stoker - Dracula (1897)
이 책이 뱀파이어의 역사를 하나씩 설명하는 과정에서 답을 하고 있다. 미신에 대한 합리적인 재평가, 현실에서 예술로의 이입, 타나토스와 에로스의 만남. 이를테면 젊음을 유지하고자 다른 사람의 피를 마시는 설정 따위가 가질 수 없는 것을 매혹하는 행위로써 이해되는 것이다. 흔히 밤을 발견했다고 말하는 낭만주의로부터 뱀파이어는 그렇게 자유를 얻었다. 죽음을 무조건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데서 벗어나자 죽음의 세계로 손짓하는 뱀파이어도 더 이상 악한 존재로 여기지 않게 되었다. 그 불씨를 당긴 것은 단연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1897)'다. 인간의 상상력을 반영하는 뱀파이어 영화들의 조상이다. 그 상상력이란 달의 관능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dvard Munch - white night (1901)
뱀파이어가 등장할 것 같은 밤의 정취는 줄곧 새로운 작품을 양산했다. 이 책은 그것을 연대순으로 정리하고 있다. 가볍게 읽기에도 나쁘지 않지만 워낙 많은 작품을 다루는 터라 참고서로 활용해도 좋을 것이다. 앞으로 뱀파이어 영화를 보거나 뱀파이어 소설을 읽으면서 이따금 뒤적인다면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것 같다. 뱀파이어물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 뱀파이어의 역사가 끝나지 않는 것은 흥미롭다. 이 책은 뱀파이어를 잘 몰라도 그런 흥미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즐겁게 읽을 수 있다. 오랜만에 예술 서적을 말 그대로 재밌게 읽은 것 같다.
* 김연아가 2012-2013 시즌에 선보일 새 쇼트 프로그램도 'Kiss of the Vampire'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