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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배신 - '긍정의 배신'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워킹 푸어 생존기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배신 시리즈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최희봉 옮김 / 부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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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배신>은 저임금 노동 현장에서 발버둥을 치고 있는 워킹 푸어의 현실을 조명하면서 자본주의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출간된 지 10년이나 지났는데 아무 것도 나아진 게 없다는 것이 그저 슬플 따름이다. 사실 상황은 더 심각하다. 이제는 일자리를 구하는 것조차 몹시 힘들어서 조건과 처우가 어떠하다고 불평할 수도 없는 분위기다. 몇 가지 문화적 차이를 제외하면, 이 책은 요즈음 한국 사회를 말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서 저자가 몸소 어렵게 얻은 사실들은 알면서도 모르는 내용이다. 이건 말장난이 아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산다는 것이 뭔지 모르는 저자와 같은 사람들은 물론이고, 책에 등장하는 노동자들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삶을 사는 사람들도 비슷한 처지에 놓인 다른 이들의 삶을 속속들이 알기란 어려운 법이니까.

 

바버라 에런라이크는 잠입 취재를 어떤 결론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으로 여기지 않는다. 이는 제법 중요한 사실이다. 그것은 책의 가치를 높이는 일이며, 그의 글을 읽는 즐거움이기도 하다. 이른바 르포르타주를 지향하는 글들은 대개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확실하게 전달할 요량으로 손에 쥔 사실들을 직선적으로 나열하거나 다분히 의도된 답을 도출하려는 데 반해 그녀는 끝에 이르러 제 의견을 드러내기 전까지 거의 입을 다물고 있다. 말하자면 판단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는 셈이다. 물론 4장에서 워킹 푸어가 처한 비루한 현실을 다방면으로 지적하면서 그 원인을 나름대로 분석하고는 있지만, 결국 함께 생각해볼 것을 종용하는 쪽으로 결론을 맺는다.

 

다만 1, 2, 3장에서 직접 보고 듣고 느낀 것이 4장에서 제대로 수렴되었는가 묻는다면, 그것은 확신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세 번의 특수한 경험을 하나로 뭉뚱그린다고 해서 보편적인 결론을 끌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의 그 주관적인 의견만으로도 우리는 많은 것을 깨닫는다. 머리로 생각하는 것보다 몸으로 느끼는 것이 더 위대하다는 것은 노동이 알려준 진실이다. 어쩌면 노동이 배신하지 않는 것은 그것뿐인지도 모른다. 그럴지니 사서 고생한 이에게 어찌 아니 박수를 보내리요. 이 책은 노동을 탐구하는 노동이 만든 결과물이다.

 

 

* 바버라 에런라이크는 재밌게 말할 줄 아는 사람인 것 같다. '희망의 배신(가제)'도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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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파이어, 끝나지 않는 이야기]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뱀파이어, 끝나지 않는 이야기
요아힘 나겔 지음, 정지인 옮김 / 예경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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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파이어는 왜 죽지 않고 살아날까?

 

 

박찬욱 - 박쥐 (2009)

 

 

이 책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뱀파이어의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다. 그들은 한때 실제로 무서운 존재였고 응징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섬뜩한 뱀파이어를 두고 아름다움을 논하기 시작했다. 시대에 따라 인식의 변화는 있지만, 결국 그것이 어떤 상징으로 이해되면서 이른바 뱀파이어 이야기가 오늘날까지 진화한 셈이다. 그것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살피기 전에 과연 그러한 존재가 또 있었는지 짚어볼 일이다. 위대한 캐릭터라면 늘 곁에 라이벌이 있듯 뱀파이어에게는 좀비가 있다. 사실 좀비의 역사는 뱀파이어의 그것에 비하면 초라하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좀비물과 뱀파이어물은 동시에 부흥기를 맞았고 거의 비슷한 정도로 생산되고 있다. 그 두 캐릭터가 등장할 때 기본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 은유는 이제 사람들에게 제법 친숙하다. 그래서 대중문화에서는 그것을 더욱 적극적으로 소비하려는 태도를 보인다. 요즘 극장에 가면 몇 작품 걸러 좀비와 뱀파이어를 만나곤 한다.

 

 

그런데 지겹지가 않다. 요즘 난다 긴다 하는 시리즈물도 세 편만 나오면 그 이상 어떤 성과를 거두긴 힘든데, 그토록 오랜 역사 속에서 몇몇 요소를 제외하면 크게 다를 것도 없는 캐릭터에 계속 열광하는 이유가 뭘까? 작품이 그다지 훌륭하지 못해도 매력적인 뱀파이어가 나오는 것만으로 흥행하는 경우가 있는 걸 보면 뭔가 마력을 숨기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크게 두 가지로 해석된다. 하나는 그 이야기가 대중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전개되고 부분적으로 변주되는 터라 어느 정도 보증된 재미를 느끼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사회적 맥락의 의미를 풍성하게 만드는 키워드가 날이 갈수록 늘어나는 점이다. 후자는 새로운 뱀파이어를 탄생케 하는 조건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좀비와 뱀파이어가 어떻게 다른지 비교해보자.

 

 

동유럽에서 온 신비로운 귀족 혹은 구 유럽 앙시에레짐의 유물을 은유하는 뱀파이어와 아프리카에서 납치되어 강제로 이주를 당한 흑인노예들이 식민 지배를 받으면서 발전시킨 부두교에서 유래한 좀비는 출생부터가 다르다. 좀비는 유럽과 미국의 제국주의의 그늘 속 존재로서 백인들을 잠식한다. 젠더, 인종, 노동자 등 확실히 정치성이 뚜렷한 좀비와 견주었을 때 뱀파이어는 그 오랜 역사만큼이나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된다. 특히 뱀파이어는 일반인으로 위장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한때 에이즈와 동성애, 공산주의와 간첩 등의 은유로 각광받았다. (참고: 2012 Cine-Vacances Seoul 김숙현) 그래서일까? 좀비는 여전히 무섭지만, 뱀파이어는 때로 아름답다. 두 캐릭터는 똑같이 죄의식에서 비롯되는 두려움로부터 탄생했는데,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태도가 이렇듯 사뭇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Bram Stoker - Dracula (1897) 

 

 

이 책이 뱀파이어의 역사를 하나씩 설명하는 과정에서 답을 하고 있다. 미신에 대한 합리적인 재평가, 현실에서 예술로의 이입, 타나토스와 에로스의 만남. 이를테면 젊음을 유지하고자 다른 사람의 피를 마시는 설정 따위가 가질 수 없는 것을 매혹하는 행위로써 이해되는 것이다. 흔히 밤을 발견했다고 말하는 낭만주의로부터 뱀파이어는 그렇게 자유를 얻었다. 죽음을 무조건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데서 벗어나자 죽음의 세계로 손짓하는 뱀파이어도 더 이상 악한 존재로 여기지 않게 되었다. 그 불씨를 당긴 것은 단연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1897)'다. 인간의 상상력을 반영하는 뱀파이어 영화들의 조상이다. 그 상상력이란 달의 관능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dvard Munch - white night (1901)

 

 

뱀파이어가 등장할 것 같은 밤의 정취는 줄곧 새로운 작품을 양산했다. 이 책은 그것을 연대순으로 정리하고 있다. 가볍게 읽기에도 나쁘지 않지만 워낙 많은 작품을 다루는 터라 참고서로 활용해도 좋을 것이다. 앞으로 뱀파이어 영화를 보거나 뱀파이어 소설을 읽으면서 이따금 뒤적인다면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것 같다. 뱀파이어물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 뱀파이어의 역사가 끝나지 않는 것은 흥미롭다. 이 책은 뱀파이어를 잘 몰라도 그런 흥미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즐겁게 읽을 수 있다. 오랜만에 예술 서적을 말 그대로 재밌게 읽은 것 같다.

 

 

* 김연아가 2012-2013 시즌에 선보일 새 쇼트 프로그램도 'Kiss of the Vampire'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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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8 11: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8-28 16: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인문/사회/과학/예술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날이 더우면 독서도 힘들다. 그래도 힘내야지.

지난달에 비해 새로 나온 책이 많은 것 같아 고르는 재미가. 

여기서 선택되지 못한 것들 가운데 몇 권 정도는 사서 읽으려고 했는데 쉽지가 않군.

 

 

 

1. 코뮤니스트

 

가장 인간다운 세상을 추구했던 고결한 이념이 왜 처참한 독재로 추락했을까? 이런 질문으로 시작된다. 공산주의라는 이념의 태동과 발전, 성공과 몰락을 한 권의 책으로 조망할 수 있다면. 긴 시간을 하나의 렌즈로 포착하는 책은 역시 흥미롭다.

 

 

 

 

 

 

 

 

2. 또래압력은 어떻게 세상을 치유하는가

 

누구나 학창 시절에 또래압력이라는 걸 경험했을 것이다. 이런 종류의 힘은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그동안 그것은 주로 역기능 면에서 조명되었다. 그런데 이 책은 뜻밖에도 그것으로부터 무려 사회적 치유책을 논한단다. 어떤 내용인지 궁금하다.

 

 

 

 

 

 

 

 

3. 가족 기담

 

엊그제 옴니버스 공포 영화를 하나 보고 왔는데 5편 가운데 2편이나 고전을 차용하고 있었다. 해와 달, 콩쥐팥쥐. 고전은 다각도로 들여다볼 수 있는 여지가 풍부한 것 같다. 여름밤에 읽기 좋지 않을까 싶다. 작년에 읽었던 <전을 범하다> 생각도 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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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연 2012-08-05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몰라서 들어오긴 했는데.. 확인은 하였습니다만 먼댓글 달아주세요ㅎㅎ

트리플 2012-08-05 23:34   좋아요 0 | URL
포스트가 아직 안 올라온 줄 알았는데 이미 있었군요. 완료했습니다. :)
 
[어쩌다사회학자가되어]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어쩌다 사회학자가 되어 - 피터 버거의 지적 모험담
피터 L. 버거 지음, 노상미 옮김 / 책세상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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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을 읽은 소감을 말하려면 우선 형식부터 거론하지 않을 수가 없다. 지적 회고록으로서 사건을 회상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어 한 사람의 인생을 파노라마처럼 되돌아볼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특징이다. 마치 전기 영화를 볼 때 플래시백을 이용해서 지나간 시간을 천천히 훑는 것과 비슷하다. 물론 피상적인 수준은 아니다. 과거를 본인이 직접 서술하는 터라 아주 세밀한 사항까지도 군데군데 적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보통의 전기는 대중에게도 널리 읽힐 목적으로 그 사람의 행적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범주 내에서 묘사하지만, 피터 L. 버거의 모험담은 사뭇 다르다. 스스로 인간에 대한 관심이 남다른 사람이라고 고백하는 데서 알 수 있듯 그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동안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달았다. 일찍이 사회학자의 길을 걷기로 마음먹었더라면 책상에 앉아서 공부하는 쪽을 택했을 텐데, '어쩌다 사회학자가 되어' 그는 계속 다양한 경험을 쌓는 데 흥미를 느꼈다. 이는 이 방면에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도 제법 의미가 있는 점이다. 그래서 역자는 심지어 사회학이 뭔지 잘 몰라도 이 책을 읽는 데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썼다. 맞는 말이다. 다른 학문도 아니고 사회학이라면, 더구나 저자처럼 세상을 바라보는 끝없는 호기심이 계속해서 흥분을 일으키는 경우라면, 이른바 인문적 지식 같은 건 없어도 그만이다. 이 모험담을 따라가는 데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과문한 나는 그때 그 사람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를 상세히 언급하는 순간을 마주할 때마다 그 정황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한 채 오로지 필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만으로 상상을 하는 것에 살짝 한계를 느꼈다. 어려운 내용일지언정 집중적으로 설명하는 방식이었다면 그것을 나름대로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겠지만, 이와 같은 경우는 한 사람의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지점들만 딱딱 줄을 이어 나가듯 연결되고 있기 때문에 나로선 알맹이를 제대로 잡아내지 못한 아쉬움이 남았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나만의 지엽적 문제다. 그 대신 이런 교훈은 분명히 얻을 수 있다. 사람이 살다 보면 처음에 의도했던 것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일은 많지 않다. 언제나 선택의 갈림길에 놓이고 정해진 시간에 떠밀려 불가피한 선택을 하게 된다. 그러나 선택된 우연은 우연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게 참 신기한 일이다. 우리가 우연의 우연을 거듭하면서 점점 더 깊고 먼 곳으로 세상을 향해 항해할 때 깨닫게 되는 진실이란 저자가 삶을 사는 방식과 대동소이하다. 어쩌면 책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저마다 제 과거의 한 조각을 떠올릴 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책의 재목이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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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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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책을 읽는 것'에 관한 책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고쳐 읽는다는 것이고, 고쳐 읽는다는 것은 고쳐 쓴다는 것이며, 책을 고쳐 쓴다는 것은 법을 고쳐 쓴다는 것이고, 법을 고쳐 쓴다는 것은 곧 혁명이다.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은 이렇게 요약된다. 나는 이 한마디를 듣고자 긴 강을 건너왔다. 자, 책을 읽는다는 것은 곧 혁명이다. 그런데 왜 책을 읽지 않을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 저자의 주장이 옳은 말이라 전제한다면, 우리에겐 혁명을 정면으로 마주할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책을 읽기는 하되 제대로 읽지 않으면 혁명의 씨앗은 싹트지 않는다. 그래서 갈수록 "문학은 죽었다."와 같은 소리를 내뱉는 이들이 늘고 있다. 오로지 자신이 걷고 있는 시간에 비추어 책을 '제대로' 읽는 행위에 대한 가능성을 포기한 셈이다.

 

현재를 좇는 자는 언젠가 현재에 따라잡힌다. / 비트켄슈타인

 

사사키 아타루는 문학은 죽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끝을 모르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문학은 텍스트 이상의 것이다. 그가 위대한 문학의 길을 걸어온 사람으로 일컫는 이는 루터, 무함마드, 니체, 도스토옙스키, 프로이트, 라캉 등이다. 그들은 식자율이 열에 하나 겨우 표기를 인식하는 수준에 불과했던 시대에도 문학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들의 생각은 당시로선 읽힐 수 없거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깊은 잠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날 문학의 종언을 고하는 이들은 책을 덮고 하늘만 쳐다본다. 스스로 접어버린 혁명을 가능성을 신에게서 찾는 것이다. 이를테면 멸망의 판타지에 사로잡히는 이상한 행위들. 죽음에 대한 공포와 죽음에 대한 선동이 난무한다. 죽음으로 모든 것을 성취하려 한다.

 

그러나 인간은 결코 죽음을 경험하지 못한다. 인간에게 죽음 이후의 세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종말이 두려운 것은 이 세계가 무너지고 다른 세계가 올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죽음을 전후로 무언가가 바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죽음은 언제나 미확정인 채로 끝이 난다.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나는 확인할 길이 없으니까. 단적으로 모리스 블랑쇼는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죽을 줄을 모른다." 제아무리 죽음에 가까이 다가서도 그 결말을 직접 지켜볼 방도는 없다. 오랜 세월 예술이 그토록 죽음을 무수히 모사한 이유도 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죽음에 안도하는 자세를 취해서는 안 된다. 신에 의지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옳지 못하다. 그래서 저자는 이렇게 외친다.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1883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는 자신의 철학적 사상을 담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출간했다. 그러나 이내 출판사의 버림을 받았고 자비로 찍은 40부 가운데 겨우 7부만 지인들에게 보내졌다. 그래서 니체가 패배했는가? 그럴 리 없다. 그 책이 지금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읽히고 있는지 굳이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문학은 혁명이다. 독서를 그저 고상한 취미쯤으로 여기거나 영화를 단지 단순한 오락거리로 취급하는 이들은 딱하다. 그러한 세태에 젖어 벌거벗은 문학을 하는 이들은 더 가련하다. 오해가 없기를. 쉽게 읽히는 것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가볍게 읽히는 것이 나쁘다는 말이다. 이 책은 툭하면 문학이 죽었다는 얘기로 시작해서 실없는 소리를 해대는 이들에게 문학이 배태하고 있는 혁명의 씨앗을 새삼 일깨운다.

 

자신이나 자신의 작품을 지루하다고 느끼게 할 용기를 가지지 못한 사람은

예술가든 학자든 하여튼 일류는 아니다. / 니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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