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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이 가는 책들이 많다. 신간을 살펴보면서 추천 대상을 제외하고 몇 권 바구니에 담았다.

이달엔 예술 분야 책이 한 권쯤 선택되었으면 좋겠다. 그런 의미에서 뱀파이어 관련 책을 골랐다.

 

 

 

 

 

 1. 니체 극장

 

 

니체는 말년에 토리노 한 길가에서 연신 채찍질을 당하면서도 꼼짝하지 않는 늙은 말을 부여잡고 울었다지. 집에 와서 어머니에게 그동안 자신은 헛살았다며 인생을 반추했다지. 그리고 영영 입을 다물었다지. 아, 니체여.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한 편의 극을 통해 니체의 삶과 생각을 따라가는 것도 좋을 듯하다. 사실에 기반한 극이라면.   

 

 

 

 

 

 2. 진화 심리학

 

 

사람의 행동은 단순한 논리로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그렇다고 복잡한 논리로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인간의 행동을 설명하는 다양한 논리를 접하는 일은 중요하다. 진화 심리학을 통해서 인간을 진정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보면 좋겠다.

 

 

 

 

 

 

3. 뱀파이어, 끝나지 않는 이야기

 

 

이제 뱀파이어는 정말이지 무섭지 않다. 새롭지 않다. 뱀파이어를 다룬 소설이나 영화가 수두룩하다. 근데 끊임없이 변주되고 재탄생된다. 이유가 뭘까? 뱀파이어의 이야기는 인간 내면의 욕망과 닿아 있다. 영화에서 뱀파이어 소재로 등단하는 일이 잦은 것도 그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오늘날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전하는지 알고 싶다. 끝나지 않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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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 무엇이 가치를 결정하는가
마이클 샌델 지음, 안기순 옮김, 김선욱 감수 / 와이즈베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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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샌델은 침착하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을 암묵적으로 용인하지만 적어도 마음으로 그리하여서는 안 된다고 여기는 것조차 쉽게 그리하여서는 안 된다고 단언하지 않는다. 근거 없는 감정에 호소하거나 휘둘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도리어 그리하여도 무방하다고 혹은 그리하는 편이 더 좋다고 말하는 일부 경제학자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 그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요모조모 객관적으로 논한다. 그것이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다. 예컨대 미국 사회에서 회사의 피보험 이익이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된 이후로 이른바 '청소부 보험(janitors insurance)' 또는 '죽은 소작농 보험(dead peasants insurance)'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계속 증가함에 따라 대상자 본인의 허락도 없이 직원 명의로 납부된 보험금이 곧 회사의 재정 확보 수단이 되고 있는 이상한 현실을 언급한 대목을 보라. 그것은 누가 봐도 삶과 죽음의 윤리에 맞닿아 있는 관계로 다른 문제와는 달리 그 권리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비교적 커서 얼마든지 일반적인 도덕 개념으로 다룰 수 있을 텐데, 그는 섣불리 그렇게 하지 않으며 끝까지 조심스러운 태도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한다. 말기 환급이나 사망 채권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저자는 자신이 굳게 믿고 있는 것도 일단 아닌 척하고 집요하게 파고든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이 책은 아마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단순히 제시하는 것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리고 시장 경제를 맹신하는 사람들을 비판하는 데 그쳤을 것이다. 그러나 돈으로 살 수 있느냐 없느냐를 가름하는 기준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게다가 다수가 옳다고 간주하는 도덕적 가치를 바탕으로 돈을 쓰는 데 제아무리 신중하다고 해도 초지일관 논리적이긴 힘들다. 이는 저자 자신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그래서 그는 끊임없이 묻는다. 이것을 돈으로 사는 행위가 나쁜가?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책을 이루는 내용과 형식이 조응하는 셈이다. 따라서 이 책은 돈으로 재화를 사거나 팔고 그것을 위해 스스로 가치를 결정해본 사람이라면 그다지 낯설지 않은 소소한 물음들로 가득하다. 물론 그 배경은 대개 미국 사회다. 그러한 물음이 유의미한 담론을 끌어내는 지점은 역시나 정의와 관련되어 있다. 여기서 이 책을 해설하고 있는 숭실대 베어드학부대학 학장 김선욱의 말을 빌리는 것이 좋겠다. 알다시피 정의란 '좋음'의 문제가 아니라 '옳음'의 문제에서 출발한다. 좋지만 옳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때 샌델은 옳음에 대한 좋음의 우선성을 중시한다. 옳음의 이념을 완성하려면 좋음의 관점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는 좋음도 무시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새로운 관점에서 해결책을 제시한다거나 혁명적으로 사고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갈수록 시장 논리는 닥치고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고 한다. 좋음 이전의 옳음이 사라지고 있다. 그 결과 전통적으로 비시장 규범이 지배하던 삶의 영역이 점차 시장 규범에 잠식되고 있다. 좋은 것을 좋게 하는 데 문제가 없다는 인식이 비시장 규범을 마구 밀어내고 있는 것이다. 과거에는 전혀 돈으로 거래하지 않았던 대상들이 하나둘 시장의 바다로 뛰어들고 있다. 이 책의 서두에 제시된 목록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없어진 세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제 사랑도 우정도 다 돈으로 살 판이다. 그것이 역효과를 내고 있는 사례가 나오건 말건 시장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돈은 돈을 상상하는 법. 마이클 샌델은 이 책에서 그것이 도덕과 정의의 관점에서 옳지 못하다고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대신 다양한 사례와 그것을 받아들이는 여러 관점을 상세히 열거하여 직접 판단해볼 것을 권한다. 그 과정에서 좋음보다는 옳음을 중시하는 특수한 예가 주는 충격을 효과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이를테면 스위스 핵폐기물 처리장에 관련된 일화가 그러하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것과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백 번 떠드는 것보다 그게 훨씬 효과가 있다. 나는 옳음과 좋음을 모두 만족하는 경제적 활동도 불가능한 것이 아님을 구체적인 사례에서 엿보았다. 그 일화와 그것을 바라보는 저자의 의견을 짧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스위스가 방사능 핵폐기물을 저장할 장소를 정하는 일로 오랫동안 골머리를 앓다가 한때 볼펜쉬센이라는 작은 산악 마을을 고려한 적이 있었다. 그때 일부 경제학자들이 마을 주민들을 상대로 의견을 조사한 결과 과반수인 51퍼센트가 그것을 받아들이겠다고 답했다. 그런데 여기에 매년 보상금을 지불하겠다는 제안을 추가하자 엉뚱하게도 지지율이 25퍼센트로 떨어졌다고 한다. 보상금 인상 제안도 효과가 없었다. 평균 월수입을 훌쩍 넘는 보상금을 약속해도 주민들의 결정은 흔들리지 않았다. 다른 지역사회도 대부분 마찬가지였다. 보상금을 제안할 때보다 그렇지 않을 때 유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은 까닭이 무엇일까? (아주 간단히 말하면) 재정적 인센티브가 오히려 시민의 의무의식을 밀어냈기 때문이다. 마을 사람들은 사적으로 이익을 제공하겠다는 제의를 받고서 시민의 문제를 의회가 오로지 금전으로 해결하려 한다고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라면 얼씨구나 했을 텐데, 스위스 시민들은 공공선에 헌신하는 태도가 남다르다.) 그들은 보상을 하려거든 현금이 아니라 공공재 형식을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방, 공원, 도로 등 모든 사람이 공동으로 이용할 수 있는 재화나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자신들이 지역 사회를 위해 기꺼이 부담을 감수하는 일종의 공공정신을 국가가 참다운 방식으로 존중하길 원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아름다운 얘기다. 거듭 말하지만, 이처럼 돈으로 살 수 있느냐 없느냐를 결정하는 것은 가치를 판단하는 인간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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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을 위하여]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김수영을 위하여 - 우리 인문학의 자긍심
강신주 지음 / 천년의상상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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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시를 읽지 않는 사람들은 대개 시가 난해하다고 말한다. 얼핏 이해할 수 없는 낱말들이 나열된 것을 보고 추상적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시가 난해한 것은 추상적이어서가 아니라 구체적이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시를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읽었는데도 아무런 의미를 끄집어내지 못했다면, 그것이 너무도 구체적이라서 시인의 생각을 읽을 수가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불의의 사고로 자식을 잃고서 슬픈 감정을 유리창에 빗댔다고 하자. 그때 그 감정을 드러내는 유리창은 우리 주변에 널린 사물일지언정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 된다. 다시 말해서 시인에게 유리창은 유리창이 아니다. 이는 누구나 유리창을 보고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게 아님을 뜻하기도 한다. 그것이 꼭 유리창이어야만 하는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자식을 잃고 유리창을 떠올리는 행위는 일반적이라 할 수 없다. 말하자면 이때 유리창은 특수한 개체가 아니며 고정된 사물이 아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어쩌면 그럴수록, 우리가 유리창을 대하는 시인의 마음을 읽을 수 없다고 섣불리 단정하거나 포기해서는 안 된다. 알고 보면 우리는 누구나 자신만의 생각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표출하고 있다. 너와 나는 그렇게 다르다. 시의 가치는 그 다름을 회피하지 않으려는 노력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시를 추상적이라 여기고 그것을 이유로 자신이 시인이기를 마다하는 자세는 결코 옳지 않다.

 

그렇다면 시의 구체는 시의 핵심이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가장 구체적인 것이 가장 단독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진정한 시란 모든 것을 포괄하고 정돈하는 '특수성 < 일반성'의 회로를 벗어나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단독성 = 보편성'의 회로를 회복하려는 의지의 발현이라고 말한다. 좋은 시가 의지의 문제라고 할 때, 구체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것은 시를 쓰는 기술보다 시를 쓰는 태도와 관계가 깊다고 할 수 있다. 시()가 곧 시작(詩作)인 것이다. 그로부터 저자는 언어의 숙명과 시인의 소명을 논한다. 고로 시를 사랑하는 철학자 강신주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은 단연 김수영이다. 그가 좋은 시에 관해 이야기할 때마다 김수영의 정신을 강조한 데서 익히 그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는데, 이 책에서는 아예 그것을 전면적으로 다루고 있다. 사람들이 시작보다 시를, 그러니까 과정보다 결과를 보고 시의 가치를 평가하는 데 따른 못마땅한 속내를 드러내면서. 그런 까닭에 그가 다소 거친 어조로 김춘수보다 김수영이 위대하다고 말할 때 눈살을 찌푸린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오해하지는 말지어다. 김수영의 시가 김춘수의 시보다 월등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시작에 관한 것임을 이 책의 부제가 일찍이 밝히고 있다. 저자는 김수영이 우리 인문학의 자긍심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기실 인문학 정신은 시가 아니라 시작에 가깝. 그러므로 저자의 목표를 감안할 때, 그런 비교는 제법 타당하다. 더군다나 이 책은 시평이 아니다. 시를 사랑하는 한 철학자의 순수한 고백이다.

 

저자가 이렇게 시인 김수영을 좋아한다고 고백한 이유가 까? 그것이 한 권의 책으로 설명되어 있는 셈이지만, 그중에서도 나는 사람들이 갈수록 시를 읽지 않는다는 데 주목하고 싶다. 이는 제2의 김수영이 등장하지 않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알다시피 오늘날 시인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해마다 신춘문예를 통해서 시인은 계속 탄생하고 있고, 달마다 따끈따끈시집이 서점에 새롭게 진열되고 있다. 그러나 시는 널리 읽히지 않는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람들은 점점 시()에서 시작(詩作)을 떠올리지 못한다. 시는 그저 시를 쓰는 것을 업으로 하는 사람의 전유물이라 여긴다. 이를테면 내가 상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표현에 감탄하면서도 소설을 보고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것과 달리 시를 읽고 시를 쓸 생각을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지 않은가. 시는 단순한 낱말 놀이가 아니거늘 울림이 없는 겉멋에만 현혹되거나 울림을 내면화하지 못하는 꼴이다. 사람들이 시가 담고 있는 것을 자기 삶의 놀이터로 끌어들이지 못하는데, 시는 그런 현실에 아랑곳없이 홀로 비약을 꿈꾼다. 서정주처럼 아름다운 표현을 구사하거나 이상처럼 형식적인 실험을 선보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김수영은 우리 모두가 시인이 되기를 바랐다. 따라서 그를 인문학의 자긍심으로 추앙하는 저자의 고백은 많은 이들에게 시의 가치를 일깨우는 일이 될 것이. 그런 의미에서 책의 제목 '김수영을 위하여'에서 김수영은 1921년에 태어난 '김수영'인 동시에 시를 사랑하는 세상의 모든 '김수영'을 가리킨다.

 

 

 


 

 

 

이 책에 언급되는 시들 가운데 두 편의 시에서 나는 특히 김수영의 얼굴을 보았다.

아래의 시를 되뇌면서, 우리 모두 제 힘으로 도는 팽이가 되자.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풀이 되자. 눈밭에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거미(1954) - 김수영

 

내가 으스러지게 설움에 몸을 태우는 것은 내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으스러진 설움의 풍경마저 싫어진다.

 

나는 너무나 자주 설움과 입을 맞추었기 때문에

가을바람에 늙어 가는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 버렸다.

 

 

 

서시(1957) - 김수영

 

나는 너무나 많은 첨단의 노래만을 불러 왔다

나는 정지의 미(美)에 너무나 등한(等閑)하였다

나무여 영혼이여

가벼운 참새같이 나는 잠시 너의

흉하지 않은 가지 위에 피곤한 몸을 앉힌다

성장(成長)은 소크라테스 이후의 모든 현인들이 하여 온 일

정리(整理)는

전란(戰亂)에 시달린 20세기 시인들이 하여 놓은 일

그래도 나무는 자라고 있다 영혼은

그리고 교훈(敎訓)은 명령(命令)은

나는

아직도 명령의 과잉을 용서할 수 없는 시대이지만

이 시대는 아직도 명령의 과잉을 요구하는 밤이다

나는 그러한 밤에는 부엉이의 노래를 부를 줄도 안다

 

지지한 노래를

더러운 노래를 생기 없는 노래를

아아 하나의 명령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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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6월이다. 어째 지난달에 비해 읽고픈 책이 많지가 않다.

내가 아는 게 많지 않은 탓이다. 관심의 촉수를 넓게 내뻗지 못하는 느낌이 든다. 

 

 

 

 

1. 아름다운 외출 / 실라 로보섬

 

간만에 코미디 영화 한 편을 봤다. 여자 주인공이 다 주워 담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것도 맞는 말만 딱딱 골라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그런 당당함이 멋있었다. 제 논리를 펼치는 데 한 치의 주저가 없는 캐릭터였던 터라 흥미로웠는데, 그럼 그렇지 무슨 일이 있어도 가정을 지키는 결말로 마무리되었다. 그게 화목한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연출자의 태도가 영 마뜩잖았다. 아름다운 외출을 꿈꾸는 데 그치는 게 아니고 몸으로 행동하는 여성들을 스크린에서 보는 건 아직 무리인가 보다. 그래서 이 책을 골랐다. 실천의 역사를 쓴 위대한 여성들을 만날 요량으로.

 

 

 

2. 남자, 그림이 되다 / 가브리엘레 툴러

 

요즘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볼 때 어떤 이미지를 떠올릴 때가 잦다. 특히 몸과 관련된 그림들. 이 책은 남자(의 육체)가 그림이 되는 순간을 그러모았다고 해서 눈길이 간다. 뒤러, 코코슈카, 마그리트 등 유명 화가들이 그린 작품들을 보고 어떤 이야기를 펼칠지 궁금하다. 또한 그림으로부터 남성성의 역사를 읽어내는 것도 그 시도 자체가 새롭진 않으나 재밌을 것 같다. 여자가 그림이 되는 순간은 그간 꽤 접했던 것 같은데, 그에 비하면 남자의 경우는 그렇지가 못하다. 그것도 이 책을 고른 이유가 될 것이다.

 

 

 

3. 취향의 정치학 / 홍성민

 

피에르 부르디외의 <구별짓기>를 해제하는 책이란다. 고대 로마 때부터 취향의 문제는 인간의 삶에 매우 중요한 화두였다. 취향에 관한 한 논쟁할 수 없다는 격언은 상이한 취향들 사이에 우열이란 있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인데, 역설적으로 '취향'은 '구별'을 낳았다. 계급적 분류에 따라 취향이 다르게 작동하는 건 지금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내용에 관해 감이 잘 잡히진 않지만 취향의 정치학을 맛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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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연 2012-06-06 1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자 그림이 되다, 는 특이하네요. 그러게요, 여자가 그림이 되는 순간은 많았던 것 같은데.

트리플 2012-06-18 11:17   좋아요 0 | URL
그렇죠? ㅎㅎ 책이 선정되었더군요. 아직 예술 분야에서는 뽑히지 않고 있네요.
 
윤리 21
가라타니 고진 지음, 송태욱 옮김 / 사회평론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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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가라타니 고진. 문학 비평가로서 그 이름이 제법 귀에 익은 것과는 달리 여지껏 그가 쓴 책을 읽은 적이 없었다. 한국 인문학계에 가라타니 고진이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은 각종 비평집에서 확인되는 사실이다. 그는 서양 근현대 사상의 틀을 비서양인의 시선으로 재해석하여 인류 보편의 철학적 문제를 정교하게 탐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동양인으로는 드물게 문학 비평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그가 비판적 지식인으로서 어떤 이야기를 펼치는지 궁금하여 그나마 내가 평소에 가장 관심을 갖고 있는 소재를 다룬 책 한 권을 골랐다. <윤리 21>은 기존의 철학자가 펼친 사상적 근거를 내세워 윤리의 문제를 새로운 시각으로 조망하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일종의 사회 비평이다. 그 영역이 일본 사회 중심이긴 하지만 전쟁과 혁명은 비단 일본만의 문제가 아닌 터라 일반적으로 읽히고 있으며, 특히 식민 행위를 어떻게 반성하는 것이 옳은가를 논하는 만큼 우리로선 흥미로운 담론이 아닐 수 없다. 지난 20세기를 전쟁과 혁명의 세기라고 한다면 2000년에 출간된 이 책의 의미는 남다른데, 저자는 여기서 20세기의 윤리를 돌아보고 21세기의 그것을 내다보고 있다. 양은 적은 편이지만 단락별로 다양한 논의를 담아 정리하기가 만만찮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 책에 대한 평을 쓰려는 게 아니고 저자가 말하고 있는 내용을 내가 이해한 범위 내에서 최대한 구체적으로 풀어보고자 한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이 책을 독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자 책이 지닌 가치를 설명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일 것이다.

 

범죄자나 깡패가 등장하는 영화를 대하는 관객의 반응을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사람에 따라 호오의 정도가 다르긴 하지만 아무리 잔인한 행위가 스크린에 전시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실제 행위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연출된 것이므로 누구든 영화를 보면서 적당히 거리를 두게 마련이다. 일상 생활에서는 폭력을 혐오하면서도 영화나 소설에서는 그들을 지지하고 동일시하는 경우가 많은 까닭이 여기에 있다. 예를 들어, 여러 가지로 억울한 일을 당했던 주인공이 꾀하는 복수가 자극적이면 자극적일수록 관객은 더욱 통쾌한 기분을 맛본다. 이것이 이른바 미적 판단이다. 그 근거를 칸트는 '무관심'에서 찾았다. 말하자면 도덕적이고 지적인 관심을 배제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런 영화나 소설을 즐기는 것은 ㅡ 심지어 때로 현실에서도 그러한 시각이 나타나는 것은 문화적으로 훈련된 탓이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도덕과 이성의 체계를 뒤흔드는 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그로부터 관심을 떼는 훈련을 한다. 잔인한 게임에 자주 노출되는 것도 그것을 부추긴다. 입에 담기조차 힘든 끔찍한 범죄가 점점 늘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그렇게 관심을 배제하는 일은 자연스럽다. 어쨌든 그것은 통상의 관심을 별도로 떼어놓고 보는 것이므로 예술 작품을 대하는 태도로 이어진다. 영화의 호불호를 나누는 결정적 요인이 되기도 한다는 뜻이다. 어떤 영화를 오로지 잔인해서 싫다고 말한다면 관심을 배제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뜻하고, 폭력적 행위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그 반대가 되는 셈이다.

 

그렇게 관심을 배제하는 행위, 그러니까 관심을 괄호 안에 넣는 행위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괄호를 다시 푸는 행위다. 쉽게 말해서 영화가 끝나고 나면 그 문제를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만약 영화에 등장한 폭력적 행위가 단순한 오락에 그칠 뿐 충분한 설득력을 갖추지 못했다면 과연 그 영화를 좋은 영화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을 스스로 던져야 한다는 뜻이다. 근데 이것은 갈수록 무시되고 있다. 영화가 끝나면, 소설을 읽고 나면 사유를 멈추기 일쑤다. 그런데 영화나 소설을 통해 자꾸만 그런 식으로 폭력에 길들여지면 인간의 윤리 체계는 흔들릴 수밖에 없다. 사람이 뭔가를 저질렀다면 그것이 아무리 불가피한 것이라 하더라도 윤리적으로 책임이 있다. 그것은 '자유로워지라'는 당위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인간에게 자유가 없었다 할지라도 자유로웠던 것으로 봐야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가 먼저 위협하는 상황에서 정당한 방어 행위로써 내가 상대를 해쳤을 때조차 내게 책임이 있고, 운전을 하는 도중에 갑자기 누가 도로로 뛰어들어 사고가 났더라도 보행자가 사망을 했다면 운전자에게 일말의 책임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칸트의 이야기다. 칸트는 도덕성을 자유라는 관점에서 봤다. 그에 따르면 도덕은 선악이 아니라 자유의 문제다. '자유'는 상황에 따라 주체에게 주어지지 않기도 하지만, '자유로워지라'는 명령만큼은 언제나 인간의 행위와 함께 작동한다.

 

윤리를 선악의 문제로 바라볼 경우엔 모든 문제가 결정론적 인과성을 띤다. 악하면 죄를 짓는다는 식의 논리가 성립하는 것이다. 이것은 정신분석학의 기본 개념과도 맥락이 같은데, 어떤 결과를 야기한 원인이 반드시 있다고 가정하는 식이다. 사회적 범죄가 발생하면 바로 그 원인을 진단하려고 애쓰는 태도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윤리를 자유의 문제로 생각한다면, 의무가 그것을 좌우한다. 이때 의무 또는 지상명령은 국가나 공동체가 강요하는 규범이 아니고 '타자를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라'는 명령이다. 그런 의미에서 형이상학적인 개념이다. 이 경우엔 어떤 원인이 반드시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다. 'A이면 B이다'에서 A는 B를 규정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어떤 증상이 있을 때 A라는 원인을 발견했다 하더라도 결코 A라면 B가 된다는 식의 논리는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 (알튀세르는 이것을 구조론적 인과성이라고 불렀다.) 따라서 원인이 발견되어도 책임은 물을 수 없다. 윤리가 선악의 문제라면 결국 A이면 모두 B가 되어야만 하는데, 알다시피 실제로 그렇지 않다. 가령, 아버지가 폭력적이라고 해서 그 아들도 반드시 폭력적인 것은 아니듯. 따라서 저자는 칸트의 말처럼 윤리는 자유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한국 범죄 영화에서 인물이 저지른 행위마다 그 원인을 딱 규정하는 식의 연출은 문제가 있다. 원인을 구태여 제시할 이유가 없는 상황에서도 짧은 플래시백으로 과거를 파헤치면서 결정론적 인과성에 목을 매는 건 되려 영화를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된다.

 

이토록 윤리가 자유의 문제라는 게 명쾌하다면, 왜 우리는 21세기에 들어서도 그것을 새롭게 인식하지 못하는 걸까? 저자는 그것을 가로막는 요소로 종교, 자본주의, 정치를 꼽았다. 인간은 악한 존재이므로 '종교'로 구원을 받아야 하고, 이익을 취하는 건 곧 행복을 도모하는 일이므로 사람 위에 '자본'이 있고, 전쟁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는 것과 같은 '정치'가 멈추지 않는다. 죽은 자가 산 자의 방편으로 이용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저 세 가지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앞서 말했듯 도덕적 영역은 '자유로워지라'는 명령에서 나오는데, 그 명령은 죽은 자에서 비롯된다. 개인과 국가의 자유가 지상의 것으로만 이해될 때 윤리적인 문제는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칸트가 말한 대로 우리의 자유는 현전하는 타자만이 아니라 부재하는 타자에 대한 책임을 함의해야만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하버마스의 공공적 합의 혹은 간주관성은 칸트의 윤리학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래서 인간성을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동시에 항상 목적으로 사용하라는 도덕 법칙이 역사적으로 실현되는 것은 중요하다. 이와 같이 가라타니 고진은 칸트의 윤리학을 전면에 내세워 일본 사회를 비롯한 전 세계가 어떻게 21세기를 윤리적으로 살아 나갈 수 있을지 깊이 고찰한다. 그가 밝히고 있는 것처럼 이 책은 칸트론을 알기 쉽게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외려 그 반대에 가깝다. 칸트의 '윤리'가 오해되는 대목을 찾아 참된 의미를 밝히면서 현대 사회에서 그것이 지닌 가치가 얼마나 큰지 역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저자의 담론은 식민주의에 대한 책임을 묻는 일이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현재 매우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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