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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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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책을 읽는 것'에 관한 책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고쳐 읽는다는 것이고, 고쳐 읽는다는 것은 고쳐 쓴다는 것이며, 책을 고쳐 쓴다는 것은 법을 고쳐 쓴다는 것이고, 법을 고쳐 쓴다는 것은 곧 혁명이다.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은 이렇게 요약된다. 나는 이 한마디를 듣고자 긴 강을 건너왔다. 자, 책을 읽는다는 것은 곧 혁명이다. 그런데 왜 책을 읽지 않을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 저자의 주장이 옳은 말이라 전제한다면, 우리에겐 혁명을 정면으로 마주할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책을 읽기는 하되 제대로 읽지 않으면 혁명의 씨앗은 싹트지 않는다. 그래서 갈수록 "문학은 죽었다."와 같은 소리를 내뱉는 이들이 늘고 있다. 오로지 자신이 걷고 있는 시간에 비추어 책을 '제대로' 읽는 행위에 대한 가능성을 포기한 셈이다.

 

현재를 좇는 자는 언젠가 현재에 따라잡힌다. / 비트켄슈타인

 

사사키 아타루는 문학은 죽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끝을 모르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문학은 텍스트 이상의 것이다. 그가 위대한 문학의 길을 걸어온 사람으로 일컫는 이는 루터, 무함마드, 니체, 도스토옙스키, 프로이트, 라캉 등이다. 그들은 식자율이 열에 하나 겨우 표기를 인식하는 수준에 불과했던 시대에도 문학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들의 생각은 당시로선 읽힐 수 없거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깊은 잠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날 문학의 종언을 고하는 이들은 책을 덮고 하늘만 쳐다본다. 스스로 접어버린 혁명을 가능성을 신에게서 찾는 것이다. 이를테면 멸망의 판타지에 사로잡히는 이상한 행위들. 죽음에 대한 공포와 죽음에 대한 선동이 난무한다. 죽음으로 모든 것을 성취하려 한다.

 

그러나 인간은 결코 죽음을 경험하지 못한다. 인간에게 죽음 이후의 세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종말이 두려운 것은 이 세계가 무너지고 다른 세계가 올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죽음을 전후로 무언가가 바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죽음은 언제나 미확정인 채로 끝이 난다.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나는 확인할 길이 없으니까. 단적으로 모리스 블랑쇼는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죽을 줄을 모른다." 제아무리 죽음에 가까이 다가서도 그 결말을 직접 지켜볼 방도는 없다. 오랜 세월 예술이 그토록 죽음을 무수히 모사한 이유도 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죽음에 안도하는 자세를 취해서는 안 된다. 신에 의지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옳지 못하다. 그래서 저자는 이렇게 외친다.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1883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는 자신의 철학적 사상을 담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출간했다. 그러나 이내 출판사의 버림을 받았고 자비로 찍은 40부 가운데 겨우 7부만 지인들에게 보내졌다. 그래서 니체가 패배했는가? 그럴 리 없다. 그 책이 지금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읽히고 있는지 굳이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문학은 혁명이다. 독서를 그저 고상한 취미쯤으로 여기거나 영화를 단지 단순한 오락거리로 취급하는 이들은 딱하다. 그러한 세태에 젖어 벌거벗은 문학을 하는 이들은 더 가련하다. 오해가 없기를. 쉽게 읽히는 것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가볍게 읽히는 것이 나쁘다는 말이다. 이 책은 툭하면 문학이 죽었다는 얘기로 시작해서 실없는 소리를 해대는 이들에게 문학이 배태하고 있는 혁명의 씨앗을 새삼 일깨운다.

 

자신이나 자신의 작품을 지루하다고 느끼게 할 용기를 가지지 못한 사람은

예술가든 학자든 하여튼 일류는 아니다. / 니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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