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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11기 신간평가단도 끝이 났다.  

늘 그렇듯 인문 분야에서는 내 관심 밖에 있는 책을 만나는 기쁨이 크다.

그동안 어떤 책을 접했는지 되돌아보며 오래 기억에 남을 내용을 다시 마음에 새긴다.

 

 

 

11기 신간평가단 도서 나만의 베스트 5 (베스트 오브 베스트 ♡)

 

 

갈수록 시장 논리는 닥치고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고 한다. 좋음 이전의 옳음이 사라지고 있다. 그 결과 전통적으로 비시장 규범이 지배하던 삶의 영역이 점차 시장 규범에 잠식되고 있다. 좋은 것을 좋게 하는 데 문제가 없다는 인식이 비시장 규범을 마구 밀어내고 있는 것이다. 과거에는 전혀 돈으로 거래하지 않았던 대상들이 하나둘 시장의 바다로 뛰어들고 있다. 이 책의 서두에 제시된 목록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없어진 세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제 사랑도 우정도 다 돈으로 살 판이다. 그것이 역효과를 내고 있는 사례가 나오건 말건 시장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돈은 돈을 상상하는 법. 마이클 샌델은 이 책에서 그것이 도덕과 정의의 관점에서 옳지 못하다고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대신 다양한 사례와 그것을 받아들이는 여러 관점을 상세히 열거하여 직접 판단해볼 것을 권한다.

 

 

 

 <노동의 배신>은 저임금 노동 현장에서 발버둥을 치고 있는 워킹 푸어의 현실을 조명하면서 자본주의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출간된 지 10년이나 지났는데 아무 것도 나아진 게 없다는 것이 그저 슬플 따름이다. 사실 상황은 더 심각하다. 이제는 일자리를 구하는 것조차 몹시 힘들어서 조건과 처우가 어떠하다고 불평할 수도 없는 분위기다. 몇 가지 문화적 차이를 제외하면, 이 책은 요즈음 한국 사회를 말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서 저자가 몸소 어렵게 얻은 사실들은 알면서도 모르는 내용이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산다는 것이 뭔지 모르는 저자와 같은 사람들은 물론이고, 책에 등장하는 노동자들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삶을 사는 사람들도 비슷한 처지에 놓인 다른 이들의 삶을 속속들이 알기란 어려운 법이니까.

 

 

 

 

인간은 결코 죽음을 경험하지 못한다. 인간에게 죽음 이후의 세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종말이 두려운 것은 이 세계가 무너지고 다른 세계가 올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죽음을 전후로 무언가가 바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죽음은 언제나 미확정인 채로 끝이 난다.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나는 확인할 길이 없으니까. 단적으로 모리스 블랑쇼는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죽을 줄을 모른다." 제아무리 죽음에 가까이 다가서도 그 결말을 직접 지켜볼 방도는 없다. 오랜 세월 예술이 그토록 죽음을 무수히 모사한 이유도 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죽음에 안도하는 자세를 취해서는 안 된다. 신에 의지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옳지 못하다. 그래서 저자는 이렇게 외친다.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저자가 김수영을 좋아한다고 고백한 이유가 까? 그것이 한 권의 책으로 설명되어 있는 셈이지만, 나는 사람들이 갈수록 시를 읽지 않는다는 데 주목하고 싶다. 이는 제2의 김수영이 등장하지 않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알다시피 오늘날 시인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해마다 신춘문예를 통해서 시인은 계속 탄생하고 있고, 달마다 따끈따끈시집이 서점에 새롭게 진열되고 있다. 그러나 시는 널리 읽히지 않는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람들은 점점 시()에서 시작(詩作)을 떠올리지 못한다. 시는 그저 시를 쓰는 것을 업으로 하는 사람의 전유물이라 여긴다. 김수영은 우리 모두가 시인이 되기를 바랐다. 따라서 그를 인문학의 자긍심으로 추앙하는 저자의 고백은 많은 이들에게 시의 가치를 일깨우는 일이 될 것이(♡)

 

 

 

토마스 하디가 말한 대로 “인간의 운명은 바로 그의 성격”이다. 고로 자신의 삶을 배우로서만 살 것인지 감독으로서도 살 것인지는 전적으로 개개인에 달려 있다.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배우와 감독을 오가는 삶이란 비유하자면 정원사의 그것과 닮았다. 정원사는 제 공간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가꾼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제 정원사의 태도에서 사냥꾼의 전략으로 모든 것을 바꾸고 있다. 지구 저편에 있는 사람이 바로 내 옆에 있는 사람보다 더 가까이 존재하는 게 가능한 시대에는 누구나 사냥꾼이 되기를 바라는 유혹에 빠지기 쉽고, 또 그렇게 되는 편이 경우에 따라서 더 큰 즐거움을 얻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사냥꾼은 영원히 쫓기는 신세라는 걸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띄운 이 편지 다발은 사냥꾼의 쾌락이 정원사의 고독보다 진정 더 아름다운 것인지 당신에게 묻고 있다.

 

 

 

 

11기 인문/사회/과학/예술 분야에서 같이 활동한 분들과 파트장 가연님 모두 수고 많으셨어요.

12기 신간평가단에서도 좋은 책을 많이 만날 수 있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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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개미 2012-12-04 0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표시가 참으로 긔요미네요ㅋ 잘 읽었습니다.

트리플 2012-12-05 10:51   좋아요 0 | URL
긔엽게 봐주시는 분이 있다니! ㅎㅎㅎ 고맙습니다 :)
 
[얽힘의 시대]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얽힘의 시대 - 대화로 재구성한 20세기 양자 물리학의 역사
루이자 길더 지음, 노태복 옮김 / 부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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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과학자의 말에 따르면, 우주는 양자 시스템이며 그 속에 포함된 거의 모든 요소들은 서로 얽혀 있다. 만약 우주가 컴퓨터라면 양자 컴퓨터인 셈이다. 부모가 자식을 마음대로 제어할 수 없듯 프로그래머가 프로그램을 자유로이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원치 않는 얽힘이 계속되면 그 원인 혹은 결과가 아니라 얽힘 현상 자체가 매우 중요해지는데, 이것이 바로 현대 세계의 가장 큰 특징으로 대두되는 불확정성이다. (베르너 하이젠베르크가 말한 '불확정성의 원리'가 이 개념의 시초이며, 이 책 또한 그 이야기로 시작된다.) 이는 모든 현상을 이전과는 전혀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이러한 얽힘은 양자 분야를 연구하는 이들에게 축복인 동시에 골칫거리다. 양자물리학은 상대성이론이 수많은 결론을 이어나가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대상을 관찰하는 데 밑바탕이 되는 원리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말인즉슨 물리학의 법칙이 모든 관찰자들에게 똑같이 작용한다는 사실 자체가 전제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양자물리학을 연구하는 이들에겐 더 많은 구조, 더 많은 정의가 아니라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태도와 방식이 필요하다.

 

이 책은 양자물리학의 발전 과정을 연대순으로 정리하면서 이 분야에 그다지 관심 없는 이들조차 비교적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는데, 내용의 상당 부분이 여러 물리학자가 주고받은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말하자면 ‘얽힘의 시대’를 ‘얽힘의 방식’으로 묘사하는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대화는 실제에 가까운 느낌을 살리고자 약간의 각색만 더했을 뿐 과학자들의 편지, 논문, 회고록 등에 기록된 것을 최대한 그대로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자료를 찾기가 어려워서 과학의 역사적 사실에 접근하기 어려웠던 과거와 달리, 20세기의 학문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가까이 다가설 수 있다는 것을 새삼 실감한다. 이 같은 구성이 물리학과를 졸업하긴 했으나 농장에서 일을 하며 다른 분야로 발을 넓힌 이가 외따로 엮은 결과물이라는 게 실로 놀랍다. <침묵의 봄>처럼 과학과 인문의 경계를 허문 글쓰기가 돋보인다. 대화를 읽다 보면 이야기가 어디로 흐를지 알 수 없는 영화를 보는 느낌이 드는데, 그건 마지막 책장을 덮을 때도 마찬가지다. 양자물리학의 역사가 현재진행형인 것처럼 그것을 다룬 이 책 또한 무수한 어제를 통해 새로운 내일을 내다보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주의 역사가 이제 걸음마 단계에 들어선 건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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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광기
대리언 리더 지음, 배성민 옮김 / 까치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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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우리는 이상한 생각을 하는 사람을 이상하게 생각한다. 그런데 이 이상(異常)이라는 게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라서 위험한 수준인지 아닌지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흔히 현대인들은 누구나 한 가지 이상의 정신병을 앓고 있다고 말할 때의 그 정신병이 꼭 치료를 받아야 하는 수준이 아니듯 이상한 생각은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갈수록 평범한 사고방식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것 같으면 정신이상으로 여긴다. 생명을 해하거나 법규를 어기는 것과 같이 잘못된 행위가 겉으로 드러나는 경우라면 응당 의학적인 도움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남이 이해할 수 없는 생각과 행동을 하는 이들이 갖고 있는 근본적인 이상을 덮어놓고 무서운 광기로 몰아붙이는 것은 끊임없이 환자와 병원만 늘리는 일이다.

 

프로이트 분석연구 센터에서 활동하고 있는 저자 대리언 리더는 이러한 사태의 원인을 정신의학의 관심이 20세기에 들어 "의미를 탐구하지 않고 현상만 연구하는" 쪽으로 기울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겉보기 증상을 기반으로 하는 진단 패러다임이 세워지면서 정신병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이 점점 사소한 취급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그 원인은 크게 세 가지 - 편집증이라는 진단범주의 운명, 약리학이 정신보건계에 끼친 영향, 진단절차의 급격한 변화로 언급된다. 망상은 정신병의 1차 증상이 아님을 설명하기 위해 그는 프로이트의 말을 빌린다. “자아가 바깥세상과 교류할 때 처음부터 비어 있는 곳과 찢겨진 곳이 나타나는데, 망상은 이런 곳을 가리고 메우는 천 조각처럼 사용된다.” 그러니까 망상은 환자가 스스로 정신병을 치료하려는 시도다. 정신병자는 상징적 욕망에 확실히 이름을 붙이지 못하지만 편집증자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정확히 명명한다는 점에서 망상의 유무가 중요한 건 아니라는 얘기다. 생각의 내용보다 주체가 그것과 관계를 맺는 방식이 더욱 중요하다.

 

인간은 의미의 세계에 거주한다. 그 의미를 형성하는 사건들은 상징적으로 매개된다. 다르게 말하면, 한 사람을 구성하는 역사는 끊임없이 타자의 욕망과 거리를 재는 행위를 거듭하면서 나아간다. 그런데 그 체계가 어떤 원인에 의해 흔들리거나 무너지면 때로 정신병이 촉발될 수 있다. 어제까지 멀쩡한 사람도 갑자기 광기를 드러낼 수 있다. 다만 인간은 그 과정에서 망상을 구축함으로써 스스로 해결책을 찾고자 하는 경우가 많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이상할지 몰라도 개인의 내면 속에서 그것은 구멍을 메우는 일이고 단추를 잠그는 일이다. 모든 정신병자에게 적용할 수 있는 획기적인 치료법을 찾는 이들에겐 듣고 싶지 않은 말이겠지만, 저자는 "평범한 삶이란 우리가 실재를 감당할 수 있도록 실재를 길들이는 하나의 방법일 뿐"이라고 말한다. 고로 우리는 개인의 체험 안에서 의미가 구축되는 양상에 주목해야 한다. 사람에 따라 서로 다른 내러티브를 연구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상(異常)한 나라의 이상(理想)적 깃발을 무작정 뽑으려고만 한다면, 세상은 점점 더 광기에 사로잡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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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그 두려움의 역사]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음식 그 두려움의 역사
하비 리벤스테인 지음, 김지향 옮김 / 지식트리(조선북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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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최근 식품의약품안전청은 농심을 비롯한 9개 업체를 상대로 시중에 판매되고 있는 일부 제품을 전량 회수하라고 조치했다. 발암물질이라고 알려진 벤조피렌의 기준치가 초과된 가쓰오부시(훈제건조어육)로 분말 스프를 만든 것이 문제가 됐다. 이 소식은 그 성분이 들어간 유명 제품을 즐겨 먹은 소비자들 사이에서 일파만파 퍼져나갔다. 주요 시간대 뉴스에서 집중적으로 보도된 이후 그와 관련된 소식들은 각종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로 도배되었고 회사의 주가도 어김없이 하락했다. 농심에서는 문제가 되고 있는 분말 스프를 평생 먹는다고 해도 인체에 거의 무해한 수준이라며 그 주장에 반박하는 답변을 바로 내놓았지만, 그것이 과학적으로 어떠하건 당분간 대중의 따가운 시선을 피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렇듯 먹거리에 대한 두려움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이들 업체에 대한 강력한 행정처분 또한 소비자들의 반응을 다분히 의식한 결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농심에서 말한 대로 이게 그다지 위험한 수준이 아니라면 왜 심각한 문제인 것처럼 대대적으로 보도된 것일까? 혹시 그것이 누군가에게 이익을 가져다주기라도 하는 것일까? 이러한 의심을 좀처럼 거둘 수 없는 것은 그동안 음식에 대한 공포를 조장하는 사례가 더러 존재했기 때문이다. 식품업계와 의약업계는 우리의 안전을 위협할 수 있는 존재로서 사람들에게 꽤 직접적으로 타격을 주는 편이다. 그래서 그들 사이의 첨예한 이해관계는 알게 모르게 전쟁을 벌인다. 당연히도 그 배후에는 이익을 취하는 자가 있기 마련이다. 하비 리벤스테인은 이 책을 통해 먹거리에 대한 공포를 유발하고 이를 활용해 짭짤한 수익을 챙긴 사례를 적나라하게 까발린다. 그 과정에서 일반적 상식에 가까웠던 몇몇 건강 정보마저 자본과 과학의 비밀스러운 거짓말이 빚어낸 결과임을 밝힌다. 소고기, 달걀, 우유, 요구르트 등 우리네 식탁에 자주 오르는 제품들이 보편적인 먹거리로 자리 잡게 된 이상한 경위와 카페인, 나트륨, 비타민, 콜레스테롤과 같은 요소들이 일상에서 이토록 중요해진 엉뚱한 까닭을 역사적 사실에 입각하여 서술한다. 또한 가공식품과 순수식품의 경쟁에서 비롯된 각종 식습관과 공포증을 구체적으로 다룬다.


의학과 과학이 음식의 역사에 침투하면서부터 우리는 먹거리와 관련하여 크게 두 가지 고민을 한다. 하나는 몸에 좋은 음식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먹을 것이 없어서 그저 배를 채우는 데 만족했지만 이제는 음식을 선택하는 시대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오히려 ‘풍요의 역설’을 경험한다. 텔레비전에서는 끊임없이 좋은 먹거리를 소개하는데, 거기에 충실하자면 오로지 먹는 데 온 힘을 쏟아야 할 것만 같다. 어제는 토마토, 오늘은 마늘, 내일은 당근. 실제로 건강 관련 프로그램을 몇 달 보고 나면 거의 모든 먹거리가 몸에 좋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다른 하나는 이와 정반대로 몸에 나쁜 음식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제 텃밭에서 먹거리를 손수 재배하던 때와는 달리 요즘은 음식 재료를 얻으려면 다른 사람의 손을 거쳐야 하는 터라 안심할 수가 없다. 더군다나 가공식품이 발달함에 따라 갈수록 눈에 보이지 않는 성분들이 문제를 일으킨다. 고등어도 말썽이고, 삼겹살도 말썽이고, 만두도 말썽이다. 뭘 먹어야 좋을지 모르겠다. 현대인들은 늘 ‘식탁의 위협’을 안고 사는 셈이다. 이 책이 적시하고 있는 것과 같은 은밀한 거짓말을 앞으로 잘 살핀다고 한들 두 고민이 쉽게 사그라질 리 만무하다. 그러나 정확한 검증 없이 우리에게 먹거리에 대한 추천과 위협을 일삼는 존재들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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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 띄우는 편지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조은평.강지은 옮김 / 동녘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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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인간의 삶을 한 편의 영화로 비유하곤 하는데, 그때 그 영화의 주인공은 배우인가 감독인가? 영화는 이야기를 구성하는 연출자의 예술인 동시에 이야기를 작동하는 연기자의 예술이다. 그런 의미에서 배우와 감독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아니,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인간의 삶도 이와 다르지 않다. 배우이기도 하고 감독이기도 한 인간은 세상이라는 망망대해를 유랑하면서 갖은 파도에 부딪힐 때면 스스로를 배우로 자각하고, 두 팔을 열심히 내저어 간혹 어느 섬에 당도할 때면 제 항해를 지배하는 감독으로 인식하는 법이다. 그러니까 인간을 이리저리 떠미는 파도는 그 배우의 운명이고, 거대한 세계 속에서 부단히 길을 찾는 것은 그 감독의 의지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우리는 끊임없이 수동적인 배우와 능동적인 감독 사이를 오가며 개인의 역사라는 단 한 번의 무대 위에서 자신만의 영화를 만든다. 이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이야기이지만, 기실 배우와 감독의 입장을 적절히 수용하는 삶을 살기가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그와 관련하여 폴란드 출신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 책에서 '아욱토르(auctor)‘라는 개념을 살며시 언급하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그것은 제 삶의 '디자이너이자 그 디자인을 집행하는 사람'을 의미하는데, 그만큼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배우와 감독의 역할을 조화롭게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야말로 모든 것이 빠르게 움직이는 이 어지러운 세계에서는 그 두 가지 역할을 잘 수행하는 게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특히 본인이 나아가는 길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감독의 자세 같은 것이 현저히 떨어진다. 말하자면 파도에 휩쓸리기 십상인 것이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역사라는 무대의 배우이자 결국에는 자신도 모르게 역사라는 무대를 구성하는 극작가”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우리 모두는 자기 자신을 주인공으로 하는 한 편의 영화를 어떤 식으로 만들어가야 하는지 사는 내내 고민해야만 한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그러한 고민들에 답할 요량으로 이렇게 44통의 편지를 띄웠다. (이 책은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일간 신문 ‘La Repubblica delle Donne’에 2008년부터 2009년까지 정기적으로 실린 기사를 편집하여 한데 엮은 것이다.) 그 편지들의 핵심은 ‘유동성’인데, 이는 저자가 세계를 이해하는 핵심적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마치 액체처럼 쉼 없이 움직이는 근대 세계가 인간에게 계속 변화를 요구한다고 주장한다. 한마디로 유동성이 유연성을 기대하는 셈이다. 그래서 저자는 그 요구와 기대에 부응하는 삶이 지금 이 세계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지 낱낱이 살핀다. 이를테면 트위터와 페이스북, 인스턴트 섹스, 신종 플루 공포 등 우리네 일상에 매우 밀접한 행위나 사건에 숨어 있는 이 세계의 양태를 분석한다.

 

그 범위가 워낙 다양해서 편지마다 종착지가 다른 것은 아닌지 처음 책을 집어들었을 때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이미 이 책의 제목이 밝히고 있는 것처럼 그것들은 모두 고독을 잃는 행위와 연결된다. 여기서 고독을 잃는다는 건 아주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이런 식이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페이스북에 접속한다. 밤사이 다른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살펴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또한 운동을 하든 식사를 하든 공부를 하든 늘 그들과 접속이 가능한 상태를 유지한다. 심지어 다른 사람을 만날 때조차 세상을 향한 자기만의 신호를 절대 끊지 않는다. 내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항시 누군가에게 일러바칠 준비를 한다. 이때 페이스북은 하나의 그물망이자 일종의 감시망이 된다. 저마다 공식적인 얼굴을 만드는 데 열을 올린다. 그렇게 세상과 접속하는 과정에서 타인의 눈에 비춰지는 이미지는 그 자신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된다. 그리하여 그것을 형성하는 조각들을 빠르게 업데이트할 필요가 생긴다. 요컨대 인간들은 잠시라도 고독할 겨를을 스스로 허락하지 않는다.

 

고독을 지우는 행위는 그것을 만끽하는 즐거움이 크건 작건 여러모로 참담한 결과를 낳는다. 무엇이든 즉각적으로 표현하고 자유롭게 발설하는 데 익숙해진 인간들은 점점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다. 조금이라도 내키지 않을 때는 세상과 나를 연결하는 창을 꺼버리면 그만인 것이다. 최근 사회적으로 끔찍한 사건이 많이 벌어지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왜냐하면 실제로 타인과 소통하는 행위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너도나도 스스로를 과시하는 데 소외감을 느끼는 이들은 실은 별 것 아닌 이유로 자신을 세상에서 동떨어진 존재라 여겨 생의 가치를 포기하기에 이른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부쩍 늘어난 것도 이러한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다. 이렇듯 세상과 직면하는 대신 세상과 접속하는 것을 택한 현대인들의 삶은 갈수록 고독을 견디지 못해 수시로 위태위태한 벼랑에 선다. 이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이 책에서는 문화적, 종교적, 정치적 맥락에서도 고독의 상실이 미치는 영향을 서술하고 있다. 기사 형식으로 쓰인 것들이라 날카롭게 분석하는 수준은 아니지만, 외려 유동하는 근대 세계의 특징을 더 적나라하게 드러낸다는 측면에서 시종일관 흥미를 잃지 않는다.

 

토마스 하디가 말한 대로 “인간의 운명은 바로 그의 성격”이다. “여러 우연한 사건들은 그 삶의 주인공이 직면해야만 하는 선택의 폭을 결정한다. 하지만 그 삶의 예술가들이 과연 어떤 선택들을 하게 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그들의 성격이다.” 고로 자신의 삶을 배우로서만 살 것인지 감독으로서도 살 것인지는 전적으로 개개인에 달려 있다.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배우와 감독을 오가는 삶이란 비유하자면 정원사의 그것과 닮았다. 정원사는 제 공간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가꾼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제 정원사의 태도에서 사냥꾼의 전략으로 모든 것을 바꾸고 있다. 지구 저편에 있는 사람이 바로 내 옆에 있는 사람보다 더 가까이 존재하는 게 가능한 시대에는 누구나 사냥꾼이 되기를 바라는 유혹에 빠지기 쉽고, 또 그렇게 되는 편이 경우에 따라서 더 큰 즐거움을 얻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사냥꾼은 영원히 쫓기는 신세라는 걸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띄운 이 편지 다발은 사냥꾼의 쾌락이 정원사의 고독보다 진정 더 아름다운 것인지 당신에게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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