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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 띄우는 편지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조은평.강지은 옮김 / 동녘 / 2012년 8월
평점 :
절판
흔히 인간의 삶을 한 편의 영화로 비유하곤 하는데, 그때 그 영화의 주인공은 배우인가 감독인가? 영화는 이야기를 구성하는 연출자의 예술인 동시에 이야기를 작동하는 연기자의 예술이다. 그런 의미에서 배우와 감독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아니,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인간의 삶도 이와 다르지 않다. 배우이기도 하고 감독이기도 한 인간은 세상이라는 망망대해를 유랑하면서 갖은 파도에 부딪힐 때면 스스로를 배우로 자각하고, 두 팔을 열심히 내저어 간혹 어느 섬에 당도할 때면 제 항해를 지배하는 감독으로 인식하는 법이다. 그러니까 인간을 이리저리 떠미는 파도는 그 배우의 운명이고, 거대한 세계 속에서 부단히 길을 찾는 것은 그 감독의 의지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우리는 끊임없이 수동적인 배우와 능동적인 감독 사이를 오가며 개인의 역사라는 단 한 번의 무대 위에서 자신만의 영화를 만든다. 이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이야기이지만, 기실 배우와 감독의 입장을 적절히 수용하는 삶을 살기가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그와 관련하여 폴란드 출신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 책에서 '아욱토르(auctor)‘라는 개념을 살며시 언급하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그것은 제 삶의 '디자이너이자 그 디자인을 집행하는 사람'을 의미하는데, 그만큼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배우와 감독의 역할을 조화롭게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야말로 모든 것이 빠르게 움직이는 이 어지러운 세계에서는 그 두 가지 역할을 잘 수행하는 게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특히 본인이 나아가는 길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감독의 자세 같은 것이 현저히 떨어진다. 말하자면 파도에 휩쓸리기 십상인 것이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역사라는 무대의 배우이자 결국에는 자신도 모르게 역사라는 무대를 구성하는 극작가”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우리 모두는 자기 자신을 주인공으로 하는 한 편의 영화를 어떤 식으로 만들어가야 하는지 사는 내내 고민해야만 한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그러한 고민들에 답할 요량으로 이렇게 44통의 편지를 띄웠다. (이 책은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일간 신문 ‘La Repubblica delle Donne’에 2008년부터 2009년까지 정기적으로 실린 기사를 편집하여 한데 엮은 것이다.) 그 편지들의 핵심은 ‘유동성’인데, 이는 저자가 세계를 이해하는 핵심적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마치 액체처럼 쉼 없이 움직이는 근대 세계가 인간에게 계속 변화를 요구한다고 주장한다. 한마디로 유동성이 유연성을 기대하는 셈이다. 그래서 저자는 그 요구와 기대에 부응하는 삶이 지금 이 세계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지 낱낱이 살핀다. 이를테면 트위터와 페이스북, 인스턴트 섹스, 신종 플루 공포 등 우리네 일상에 매우 밀접한 행위나 사건에 숨어 있는 이 세계의 양태를 분석한다.
그 범위가 워낙 다양해서 편지마다 종착지가 다른 것은 아닌지 처음 책을 집어들었을 때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이미 이 책의 제목이 밝히고 있는 것처럼 그것들은 모두 고독을 잃는 행위와 연결된다. 여기서 고독을 잃는다는 건 아주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이런 식이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페이스북에 접속한다. 밤사이 다른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살펴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또한 운동을 하든 식사를 하든 공부를 하든 늘 그들과 접속이 가능한 상태를 유지한다. 심지어 다른 사람을 만날 때조차 세상을 향한 자기만의 신호를 절대 끊지 않는다. 내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항시 누군가에게 일러바칠 준비를 한다. 이때 페이스북은 하나의 그물망이자 일종의 감시망이 된다. 저마다 공식적인 얼굴을 만드는 데 열을 올린다. 그렇게 세상과 접속하는 과정에서 타인의 눈에 비춰지는 이미지는 그 자신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된다. 그리하여 그것을 형성하는 조각들을 빠르게 업데이트할 필요가 생긴다. 요컨대 인간들은 잠시라도 고독할 겨를을 스스로 허락하지 않는다.
고독을 지우는 행위는 그것을 만끽하는 즐거움이 크건 작건 여러모로 참담한 결과를 낳는다. 무엇이든 즉각적으로 표현하고 자유롭게 발설하는 데 익숙해진 인간들은 점점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다. 조금이라도 내키지 않을 때는 세상과 나를 연결하는 창을 꺼버리면 그만인 것이다. 최근 사회적으로 끔찍한 사건이 많이 벌어지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왜냐하면 실제로 타인과 소통하는 행위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너도나도 스스로를 과시하는 데 소외감을 느끼는 이들은 실은 별 것 아닌 이유로 자신을 세상에서 동떨어진 존재라 여겨 생의 가치를 포기하기에 이른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부쩍 늘어난 것도 이러한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다. 이렇듯 세상과 직면하는 대신 세상과 접속하는 것을 택한 현대인들의 삶은 갈수록 고독을 견디지 못해 수시로 위태위태한 벼랑에 선다. 이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이 책에서는 문화적, 종교적, 정치적 맥락에서도 고독의 상실이 미치는 영향을 서술하고 있다. 기사 형식으로 쓰인 것들이라 날카롭게 분석하는 수준은 아니지만, 외려 유동하는 근대 세계의 특징을 더 적나라하게 드러낸다는 측면에서 시종일관 흥미를 잃지 않는다.
토마스 하디가 말한 대로 “인간의 운명은 바로 그의 성격”이다. “여러 우연한 사건들은 그 삶의 주인공이 직면해야만 하는 선택의 폭을 결정한다. 하지만 그 삶의 예술가들이 과연 어떤 선택들을 하게 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그들의 성격이다.” 고로 자신의 삶을 배우로서만 살 것인지 감독으로서도 살 것인지는 전적으로 개개인에 달려 있다.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배우와 감독을 오가는 삶이란 비유하자면 정원사의 그것과 닮았다. 정원사는 제 공간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가꾼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제 정원사의 태도에서 사냥꾼의 전략으로 모든 것을 바꾸고 있다. 지구 저편에 있는 사람이 바로 내 옆에 있는 사람보다 더 가까이 존재하는 게 가능한 시대에는 누구나 사냥꾼이 되기를 바라는 유혹에 빠지기 쉽고, 또 그렇게 되는 편이 경우에 따라서 더 큰 즐거움을 얻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사냥꾼은 영원히 쫓기는 신세라는 걸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띄운 이 편지 다발은 사냥꾼의 쾌락이 정원사의 고독보다 진정 더 아름다운 것인지 당신에게 묻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