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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기 활동 마감 페이퍼를 작성해주세요!

덕분에 신간평가단이 아니면 만나지 못했을 책들을 만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다른 분들의 리뷰를 읽는 재미도 아주 쏠쏠했구요 ^^ 

다음 기에도 활동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14기 신간평가단 활동시 가장 기억에 남았던 책과 그 이유 


한강, 소년이 온다


할 말이 정말 많아서 리뷰를 3부로 나누기도 했던 한강의 소년이 온다. 

개인적으로 시민행성 낭독회에서 직접 들을 수 있었던 한강 소설가의 낭독과 

그때의 그 분위기, 조르조 아감벤의 저작들과 소설이 겹치면서 극대화됐던 파토스, 

아마 처음인 것 같습니다. 소설 읽다 눈물 흘린 건... 

특히 소년이 온다 5부 동호 어머니의 들어본 적 없는 음성은 제 안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인간임을 포기하지 않았던 광주의 맑고 용기 있는 영혼들의 노래도요. 


- 14기 신간평가단 도서 중 내맘대로 좋은 책 베스트 5


1. 한강, 소년이 온다 

2. 이승우, 신중한 사람 

3. 필립 로스, 미국의 목가 

4. 성석제, 투명인간 

5. 토마스 핀천, 느리게 배우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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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신간평가단 2014-10-28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한강님의 낭독을 들으셨군요.
저는 한강님의 목소리를 정말 정말 사랑한답니다. 너무 매력적이고, 들을수록 빠져들고!!

즐겁게 활동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다음 기수에도 지원해주세요~
좋은 계절 보내시고요

rendevous 2014-10-28 21:02   좋아요 0 | URL
저는 이 댓글을 읽다 보면 이동진 평론가가 빨간책방 시작하면서 느끼고 싶다 했던 느슨한 연대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생각하곤 하는데요. 얼굴도 이름도 모르고, 가벼운 마음으로 말 건네지만 또 오히려 그래서 소소한 기쁨이 있는 것 같습니다 ^^ 다음 기수도 꼭 함께 하고 싶습니다~
 
[제르미날]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제르미날 1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21
에밀 졸라 지음, 박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9월
평점 :
절판


 그간 이 리뷰는 신간평가단 활동하면서 쓴 리뷰 중에 가장 허접한 리뷰가 될 것이다. 제르미날, 에밀 졸라, 자연주의와 내가 궁합이 맞지 않아서 책을 애정 있게 읽지 못했다. 예전에는 책장을 펼치면 그 책을 다 읽을 때까지 책이 재밌듯, 재미없듯, 잘 읽히든, 잘 읽히지 않든 다른 책으로 외도하지 않았다. 그 당시 책을 읽다 어려운 부분이 있으면 번역상의 오류나 이런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내 지식이 빈곤하고 독서력이 빈약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꾸역꾸역 읽었다. 취향이 생길 만큼 다양한, 또 많은 작품들을 읽지 않은 상태였다. 


 에밀 졸라의 작품은 읽은 적 있다. 목로주점. 딱히 이해하기 힘든 어려운 부분이 없어 시간만 투자하면 읽어낼 수 있는 책이었다. 제르베즈의 핍진한 생존기와 삶의 눅진한 냄새가 베어나오는 노동자들의 삶 묘사를 흥미롭게 읽혔다. 


 약 4년 만에 제르미날로 다시 만난 에밀 졸라. 알고 보니 그는 내 취향이 아니었다. 문장과 문장 사이의 간격, 그러니까 서사의 리듬이 너무 촘촘해 지루하게 느껴졌다. 노동자들의 힘겨운 생애를 따라 읽고, 체험하고, 공감하는 작업들이 분명 의미 있을 거라는 생각을 들었지만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 흥이 일어나지 않았다. 최근 독서모임에서 다루게 될 보르헤스를 읽기 시작하면서 그의 '구라', 가짜 사실주의, 마술적 리얼리즘, 추리소설적 기법, 형이상학적-신비주의적 정신사적 편력에 완전히 심취했기 때문에 거의 정반대의 위치하고 있는 에밀 졸라의 소설이 시시하게 느껴졌을 지도 모르겠다. 


 한 가지 제르미날을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은 방안으로 맑스와 겹쳐읽기를 계획했다. 맑스가 봤을 풍경들을 에밀 졸라의 텍스트의 창을 통해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을 거라 예상했다. 소설 텍스트가 관념과 추상의 세계에 생생한 색과 냄새, 사람들의 표정을 부여해주리라. 최근 파주북소리축제에 갔다 창비를 구독하게 되었다. 주머니가 가벼워 고뇌하는 중생에게 직원 분이 자비를 베풀어 로베르트 쿠르츠의 <맑스를 읽다>와 표도르 쏠로구쁘의 <허접한 악마>를 선물로 받았다. 4.16 세월호 참사 이후로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 문제점, 심각성에 공감한 사람들의 요구에 힘입어 맑스 관련 책들이 몇 권 출간되었다. 김수행 교수의 <자본론 공부>-경향시민대학에서 강의를 하신다고 했다, 양자오의 <자본론을 읽다>. 개인적으로 알랭 바디우의 공산주의 개념을 비판했다고 하는 브루노 보스틸스의 <공산주의의 현실성>과 최근 방한했던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를 읽어볼까 한다. 그렇게 읽다 보면 소설과 시의 품으로 자연히 돌아오지 않을까 기대해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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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
천명관 지음 / 창비 / 2014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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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9.20 인문까페 창비 11:15 ~ 1:10 

 

 인문까페 창비에서 천명관 소설가를 만났습니다. 가장 먼저와 위치선정을 제대로 한 덕분에 바로 옆에서 그를 볼 수 있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저의 아버지와 동갑이셔서 왠지 모르게 더 정이 가더군요. 오, 아버지... 

나이도 나이지만 무엇보다 사람냄새-땀냄새 나는 글을 쓰는 이야기꾼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정이 갔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실 천명관 소설가에게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명색히 애독자를 모아 이런 자리를 마련했는데 신간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를 완독하지 못한 상태로 자리에 착석했거든요. <봄, 사자의 서><파충류의 밤><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까지 부랴부랴 읽었으나 다른 분들이 <우이동의 봄><동백꽃> 얘기를 많이 해주셔서 얘기하는 데 어려움이 겪기도 했습니다. 


가장 재밌게 읽은 작품을 뽑는 시간을 가졌는데 <우이동의 봄>이 1위로 뽑혔습니다. 천명관 소설가는 이 작품과 <유쾌한 하녀 마리사>에 실린 <二十歲>와 같이 자전적인 이야기라고 소개해주시면서 사람들은 '진전성'이 담긴 이야기를 좋아하는구나, 덧붙여주셨습니다. 저는 '진정성'이란 단어를 맞닥뜨렸을 때 미학적 보수, 휴머니즘 같은 낡은 서정의 권위에 기댄 개념 어쩌구저쩌구 비판적인 생각들이 휘몰아쳤지만 이윽고 문학동네 팟캐스트에서 들었던 신형철 평론가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요즘 진정성이란 개념이 잘못 사용되는 경우가 많은데 진정성의 참뜻에 대해 생각해보자고. 진정성. 저는 진정성이 작가라면 당연히 갖춰야하는 기본 중의 기본이라 생각해서 되려 진정성을 강조하는 모습이 이상하게 여겨졌는데 이내 기본에 충실하기가 어렵다는 생각까지하지 못한 제 자신을 책망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나쁜 의미에서 제가 평론가들의 프레임에 많이 갇혀있는 건 아닌가 하는 자각이 들었습니다. 예술/문학작품을 감상-감각의 대상이 아닌 평가의 대상으로 먼저 바라보진 않았는가. 이런 반성들을 하면서 꿋꿋이 하고자 했던 질문을 꺼내들었습니다. 

 

 배수아 작가가 지향하는 에세이와 소설의 경계가 지워진 소설, 물 흐르듯 결말을 향해 돌진하는 근대소설이 아니라 서사의 흐름을 일부러 타지 않음으로써 '사유'의 공간을 창출하는 현대소설, 영상과 문학이 은밀하게 몸을 섞고 있는 시대에 소설만이 할 수 있는 '소설적인 것'에 대한 천명관 소설가의 생각을 듣고 싶었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 천명관 소설가가 거의 정반대의 소설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재밌는 답변을 들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고, 서로 다른 소설을 지향하는 작가들의 소설관을 비교해봄으로써 '소설이란 무엇인가/무엇이어야 하는가'의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엿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천명관 소설가의 답변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구절은 '기질'이었습니다. 배수아 소설가는 제발트, 로베르트 무질 같은 소설가와 기질이 맞기 때문에 그 작가들의 작품을 번역하고, 에세이와 소설의 경계를 지우는 소설실험을 하는 것이고, 자신은 자신의 기질에 맞는 작품을 창작하고, 자신과 기질이 맞는 독자들이 작품을 읽는 것이라고. 이 얘기를 들으면서 하나 생각난 이야기는 푸코였나 사르트르가 했던 이야기인데 책은 저마다 자신에게 맞는 독자수를 갖고 태어난다는 말. <말과 사물>이란 어려운 책이 바게트 땅 팔리듯 베스트셀러가 되는 모습을 보면서 푸코가 이런 말을 했다고... 또 그러면서 재작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중국소설가 모옌의 노벨문학상 수상소감을 인용해주셨는데 내용은 이랬습니다. 모옌이 윌리엄 포크너와 헤밍웨이 같이 서사가 강한 작품들을 즐겨 있었는데 그것은 자신과 그 작가들의 영혼이 닮아 있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그 말을 받아서 박민규 소설가와 천명관 소설가의 영혼이 닮았기 때문에 잘 통하는 게 아닐까요? 물었는데 오히려 박민규 소설가와 자신은 거의 정반대에 가깝다고, 오히려 다르기 때문에 좋은 우정을 나누고 있는 것 같다고 대답했습니다. ... 다음 책 읽는당 모임 때는 박민규 소설가를 초청해주셨으면 ㅜㅜ 가을에 신간 출간된다는 기사를 본 것 같은데 창비에서 출판하시길 ㅜㅜ 


 시간이 좀 더 있었다면 단편 쓰는 몸과 장편 쓰는 몸이 어떻게 다른지, <핑크>를 쓰실 때 마감에 쫓겨 3일 만에 쓴 소설이라는데 당신의 친구 분 중에 대리운전하는 친구가 해준 이야기 '몸무게가 많이 나오는 여자아이가 태어났다'에서 시작한 소설이라고 말씀해주셨는데 평소 단편을 쓰실 때 그런 식으로 상상력을 마음대로 뻗어나갈 수 있는 씨앗 같은 한 문장에서 시작하시는지,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에서처럼 칠면조로 싸움을 패는 인상적인 이미지에서 착상해서 작품을 쓰시는지, 초반과 결말을 먼저 쓰시고 작품을 쓰시는지, 작품을 써나가면서 결말을 만드시는지, 정영문 소설가처럼 (김중혁 소설가의 빨간책방 방송에 의하면) 침대에서 구상을 다 하시고 집필에 들어가시는지, 김연수 소설가처럼 (문학동네 팟캐스트 방송에 따르면) 서사와 서사가 충돌시킴으로써 서사가 다른 층위로 점프되는 식으로 끝에 가셔야 결말이 정해지시는지, 아침에 쓰는지 밤에 쓰는지 등등 궁금한 것이 너무 많았지만 사실은 천명관 소설가의 작품을 다 읽어본 다음에 스스로 생각해볼 때 더 의미 있는 질문/답변이 나올 것 같아서 아껴두기로 했습니다, (라고 쓰고 시간이 없었다고 읽는다)


 마지막으로 책 추천을 부탁드렸는데 중국소설들을 추천해주셨습니다. 우리가 일본문학에 느끼는 양가적 감정. 우리보다 더 잘 사는 나라로 일본을 동경하고 문화적 영향을 많이 받았음에도 일제감정기의 기억, 콤플렉스 때문에 그 사실을 부정하는... 그래서 오히려 자신은 작품에 한국에서 일반적으로 쓰는 일본어 표현을 그대로 쓴다고 설명해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루키에 대한 이야기. 한국이 일본/문화를 동경하는 것처럼, 일본은 미국/문화를 동경하는 경향이 있는데 하루키는 미국인보다 더 미국적인 '일본인'이라고. 하루키의 작품을 하나도 안 읽어봐서 잘 와닿지는 않았지만 주변 지인들이 하루키에 대해 말했던 내용들이 생각나면서(대부분 부정적 내용) 어떤 맥락인지 감은 잡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이런 컴플렉스가 거의 없고, '우아하고 고상한' 맛은 없지만 사람냄새 나는 글을 쓴다고. 허삼관매혈기의 위화, 개구리-붉은 수수밭의 모옌, 쑤퉁... (그러면서 중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활동하는 하진 소설가가 생각나기도 했습니다. <자유로운 삶>이 좋아서 김연수 소설가가 번역한 <기다림>을 읽어보기로 했는데 미루고 미루고 미루고 있네요 ㅜㅜ)최근 황현산 평론가의 <말과 시간의 깊이>에 수록된 <르네의 바다-김현 론>을 읽으면서 '컴플렉스'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한 적 있는데 이렇게 또 만나게 되는... 그러면서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박민규 작가의 말이 생각나기도 했다. 창비 팟캐스트 마지막 부분에 했던 말로 기억나는데 침략당하는 피지배자, 약소국의 국민으로서가 아니라 지배자, 강대국의 국민으로서 문학을 해보고 싶다고(정확한 인용은 아님). 콤플렉스와 박민규 작가의 말이 만나면서 빚어내는 오묘한 물결무늬를 찬찬히 바라보면서 여기서 그만 글을 줄이고자 합니다.  


...


리뷰 :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를 통틀어 몇 번의 밭은기침이 나왔을까? 아마 이동진 영화평론가라면 필히 그 숫자를 세워봤을 것이다. 밭은기침. 병이나 버릇으로 소리도 크지 아니하고 힘도 그다지 들이지 않으며 자주 하는 기침. 나는 밭은기침의 사전적 정의를 보고 '병든 닭처럼'이란 직유를 떠올렸다. 어딘가 아픈 사람들. 병원에 가서 진찰받아야할 정도로 큰 병은 아니지만 기침을 습관적으로 해야 할 정도로 아픈 느낌을 주는 사람들. 어쩌면 이성복 시인의 시구처럼 모두 병에 걸렸기 때문에 아프지 않을, 아픈 줄도 모를 사람들. 천명관 작가는 그런 이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창비 책읽는당에서도 추천해줬던 중국문학처럼, 이를 테면 피를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허심관 같은 인물이 나오는 이야기. 잘난 사람들이 더 높은 곳으로 오르려다 추락하는 비극이 아니라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어 보이는 부족한 사람들이 아둥바둥 버티는 희극적인 이야기. 라면국물을 담은 냄비바닥에 종양처럼 남아 있는 검은 조미료 같은, 바닥에 밀착된, 까맣게 타들어간 속내를 가지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런 이야기. 


 무엇보다 이야기꾼이란 별명에 걸맞게 책장이 술술 넘어가서 좋았다. 아마 신간평가단하면서 가독성으로만 따지면 하진의 자유로운 삶과 동급이거나 그 이상일듯 싶었다. 개인적으로 배수아 소설가의 반서사적 소설관 같이 소설만이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고, 쭉쭉 읽히는 소설보다 멈칫하게 만들고, 주저하게 만들고, 몸을 차분하게 만들고, 리듬을 한 템포 혹은 두 템포 낮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읽고 싶게 만드는 소설은 어떤 모습일까 상상하고 있지만 김승옥 소설가가 소설의 abc라고 정의한 바 있는 '재밌는 이야기'로서의 소설을 읽는 일은 거의 언제나 즐겁다. "봄, 사자의 서"를 제외하곤 막힘 없이 한 번에 내려갈 수 있었다. 김연수 소설가의 "산책하는 자의 다섯 가지 즐거움"이 떠오르기도 했던 "파충류의 밤", 자전적 이야기라고 밝혀주신 "우이동의 봄", 특유의 입담과 고래의 향기를 느껴볼 수 있었던 "동백꽃", 박민규 소설가의 "루디"가 떠오르기도 했던 장르소설 "핑크", 봄, 사자의서-파충류의 밤-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만 읽은 상태에서 파충류의 밤을 최고의 단편으로 뽑았지만 다 읽고 난 뒤에 책읽는당에 참석한 다른 분들처럼 "우이동의 봄"에 마음이 더 갔다. 진정성. 신형철 평론가가 어디선가 보수적 미학관을 정당화하는 의미로 악용되는 진정성의 용례에 대해 비판적 발언을 했었는데 "우이동의 봄"은 좋은 의미에서 진정성이 있는 작품이라 느꼈다. 할아버지와 손자와의 관계, 아버지와 아들도 어려운 관계인데 할아버지와 손자는 오죽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발이 하얗게 날리는 할아버지의 주름 깊은 얼굴 뒤로 꽃비가 우수수 쏟아져내렸다' 마지막 문장이 보여주듯 서정적 분위기가 깨끗한 물을 마시는 기분을 느끼게 해줬다. 


 책읽는당 행사 이후 김미월 소설가와 진행한 인터뷰를 찾아봤는데 스테이크를 아주 좋아하신다고 했다. 그리고 영화작업 중이라고. 영화도 기대되지만 <고래>, <나의 삼촌 브루스리>에 애정이 깊은 독자로서 천명관 소설가의 장편소설이 기다려진다. 천명관 소설가 당신은 밭은기침을 하지 않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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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한 사람]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신중한 사람
이승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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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쓸 것인가. 고민고민하다 리뷰를 쓸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나도 신중한 사람인 걸까? 섬세함과는 별개의 신중하기만 한, 신중함의 자의식이 빚어내는 무게에 짓눌려 아둔하게 움직이고, 신중함의 무의식이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생각을 하게 만드는, 그런 자기진단을 다 해놓고 확실한 대안을 찾지 못해 현상을 유지하는, 그런 사람. 


 신중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자신의 선택에 대한 믿음/자신감의 부족과 올바르지 못한 선택을 했을 때에 예감하게 되는 불편함에 대한 불안이 신중함의 핵을 이루고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신중한 사람은 현재에 신중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아직 발생하지 않았지만 도래할 가까운 미래를 걱정하고, 그 미래에 대한 치열한 염려와 계산으로 인해 현재의 자신을 소외시킨다. 이렇게 표현하면 어떨가. 그는 지나치게 미래지향적이기 때문에 '지금'을 놓친 사람이라고. 가능태에 온갖 심혈을 기울인 바람에 존재를 희미하게 만들어 불가능한 밀도를 앓는 사람이라고. 


 그렇다면 이 소설은 신중한 사람들에게 행동을 촉구하는 계몽소설인가? 이것은 이 소설을 읽는 가장 나쁜 독법 중 하나일 것이다. 나는 오히려 <하지 않은 일>을 읽으며 신중함의 부재가 일으킬 수 있는 재앙을 아프게 느낀다. 신형철 평론가는 팟캐스트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이것이 폭력이 아니라는 생각보다 이것이 폭력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 낫다. 우리는 예기치 못한 기습에 더 큰 아픔을 호소한다. 무심한 얼굴에서 나오는 말 한 마디의 모서리에 배여 간결하게 흐르는 피. 무심히 고통을 견디는 편이 가장 고통스럽지 않은 고통이 있다고 한다면 어떨까? 신중한 사람은 이런 고통조차 피하려 들까? 고통에 대한 키치적 태도, 고통과의 인위적 거리두기가 삶은 곧 고통의 연속이라 하는 존재론적 현실을 외면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존재와 고통 사이의 거리가 사라져버리는 것은 아닐까? 


 '신중하다'의 사전적 정의를 찾아보았다. '매우 조심스러움'. 조심스러움은 위험이란 부정을 전제한다. 섬세한 사람은 신중하다고 할 수 있지만 신중한 사람이 섬세한 건 아니다. 신중함은 오히려 섬세하게 불안의 원인은 정확하게 포착하지 못했기 때문에 취하게 되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신중한 사람은 어떤 기미를 포착해 위험/고통을 피해갈 수 있을진 몰라도 정답을 골라내진 못한다. 더 나쁜 것을 피할 순 있을지언정 더 좋은 것을 선택하진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판단력의 문제가 아니라 사건/사물을 대하는 태도, 마음의 운동방향의 문제이다. 낙관주의자에게 신중함은 자신의 감각으로 감지해내지 못하는 위험을 포착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지만 긍정하거나 선택(행동)하지 않고 회의하고 부정하기만 하는 신중함은 결국 재귀를 통해 자기를 복제하게 되고, 이 폐쇄적 닫힌계는 결국 퇴화적 보수가 되면서 구더기 무서워 평생 동안 장 못 담그는 비극적 코미디로 귀결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소한 고통, 실패가 아닌 <하지 않은 일>에서처럼 '돌이킬 수 없는' 재앙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도망칠 수 없으면 즐겨라, 라는 말은 도망칠 수 없는 절망적 상황을 관점의 전환을 통해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지혜의 잠언 같지만 실은 이 초월에는 굉장히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 만약 삶을 지탱할 수 없는 만큼의 절망적 고통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이 상황에서 그 사람이 즐길 수 있는 건 고통이 아닌 자살일 지도 모른다. 도저히 초월/해탈할 수 없는-즐길 수 없는 것에 대해서 도망칠 수 없다는, 그래서 너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즐기라'는 명령을 하는 건 굉장한 폭력을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을 보통 어떤 상황에서 누가 했는지 회상해보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내게 이 말을 많이 했던 건 고등학교 선생님들이었다. 이 길이 아닌 다른 길을 선택하는 것을 (정언적 텔로스로부터 벗어난) '도망'으로 만들어 열패감, 죄의식의 메커니즘을 형성하고, 그렇게 그 어떤 부조리도 '현실'이란 생뚱 맞은 개념으로 고정시켜버림으로써 다른 가능성을 사유하지 못하게끔 만들었다. 진창에서 구르면서도 웃을 수 있는 해탈정신은 인정받아 마땅하지만, 이 해탈의 전제조건인 고통/폭력이 구조적으로 상재하는 상태에서 해탈을 강요하는 건 구조적 부조리를 은페하면서 고통을 강요하는 야만적 폭력일 것이다. 힘이 없는 학생들은 해탈도 풍자도 아닌 자살을 선택한다.(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9/05/2014090501264.html) 


 <하지 않은 일>을 읽으면서 답답하고 많이 아팠다. 잊고 있었던 타블로 사건. 최근에 독서모임을 위해 다시 읽는 '소송'과 연결되면서 소송적 사건의 짙은 그림자가 나를 드리웠다. 존재론적 고독과 존재론적 소외. 하지 않은 일에 대해 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피고. 여기에는 이미 '행위'가 잠재적으로 기입되어 있다. 행위의 존재를 전제하지 않았다면 행위의 부재를 확인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잘못된 의심/믿음이 대중의 광기란 조잡한 접착제에 의해 확신으로 굳어졌을 때 한 개인의 벌레보다 못한 존재로 한순간에 '변신'할 수 있다는 것, 누구나 스마트폰으로 초고화질 동영상을 찍어 몇 초만에 전 세계로 공유시킬 수 있는 과잉연결 미디어 시대에 '신중함'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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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미의 축제]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무의미의 축제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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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들어가며 


 최근 yes24에서 한국인이 좋아하는 외국작가 투표를 했는데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1위를 차지했다. 자국 프랑스보다 한국에서 인기가 더 많은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 그 이유가 묻자 이 대머리 아저씨는 '한국인의 미래지향성'을 치켜 세웠다. 은혜로운 찬사이지만 우리는 이것이 진실이 아님을 알고 있다.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개미라는 소설의 탁월함이란 내재적 요인을 제외하고 외재적 요인으로 꼽는 것이 87년 민주화가 이뤄지고, 거대담론, 대문자 정치/사회를 다루는 '무거운' 소설들이 퇴조했는데, 이후 90년대 인기를 끈 외국작품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와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었다고 한다(쿤데라를 검색하던 도중 도움이 될 만한 정보가 많이 담긴 기사 일부를 인용한다. 


"우리가 쿤데라라는 이름을 입에 올릴 때 우선적으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1990년대라는 정치 사회적·문화적 변환기(주지하다시피 국외적으로는 사회주의권이 몰락하고, 국내적으로는 정치 투쟁의 장이 소멸되어 갔던)에 무라카미 하루키와 더불어 한국의 문학인들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작가였다는 점이다. 즉, 결과론적으로 볼 때, 이 두 작가는 당시 문학인들에게 참여 문학(민중·민족 문학)과 깨끗이 결별할 수 있는 훌륭한 알리바이를 제공했다 하겠다." -출처 :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67573 프레시안. 작성자 : 조영일 문학평론가.


그리고 과학소설, 그러니까 말하자면 '순수'문학이 아닌 장르문학 작품 <개미>가 한반도 남쪽을 강타했다. 복잡하면서도 정교한 플롯과 추리소설의 구조를 갖추고 있어 흡입력이 뛰어나고, 백과사전식 지식을 겸비하고 있어 소소하게 지적 욕구를 충족시켜준다. 이후 발표한 작품 모두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오늘날까지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베르베르(한 기사에서 열린책들 사옥을 베르베르 덕분에 지을 수 있었다고 할 정도니 말 다 했지).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개미 이후로 창조의 샘이 말랐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나무까지 좋았다, 그래도 파피용까지는 괜찮았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열심히 베르베르의 신간을 사 모은 덕분에 15권 가량 컬렉션을 갖추고 있으면서 공급이 너무 많아 중고책방에 팔지도 못하고 있는 나 같은 사람도 있다. 읽을 땐 재밌지만 막상 다 읽고 나면 별로 남는 게 없는... 중학교 정도에 베르베르를 만나고, 고등학교 땐 실존주의에 빠졌어야 했는데... 이런 표현이 적당할 지 모르겠으나 배부른 푸념이다. 

 

1. 밀란 쿤데라, 그의 리스트와 그가 사랑한 리스트


 밀란 쿤데라. 한국인이 얼마나 사랑하는지 짐작이 되지 않지만 한때 작가들 사이에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는 게 유행이던 시절도 있었다고 하고(빨간책방에 따르면 김중혁 소설가는 군대에서 이 책을 탐독했다고 한다. 군대에서 읽었으면 더 쫄깃했을 것 같은 '연애'소설 ^^), 최근 밀란 쿤데라 전집(잠깐 자랑을 하면 이번 민음사 패밀리 세일을 통해 밀란 쿤데라 전집을 장만했다~ 오픈한 지 3시간 정도밖에 안 지난 상태에서 생은 다른 곳에와 소설의 기술이 동나는 바람에 구멍이 조금 뚫려 있긴 하지만 ㅜ)이 출간된 것까지 보면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작가, 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무엇보다도 절대 잊을 수 없는 바로 그 제목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작가도 이 절묘한 제목이 아까웠는지 다른 작품 <불멸>에 이렇게 적고 있다. 

 "지금 자네가 쓰는 게 정확히 어떤 건가?"

 "소설 속의 소설이요, 내가 써 본 것 중에서 가장 슬픈 사랑 이야기가 될 거야. 자네 역시 그 이야기를 읽고 슬퍼할 걸세."

 "그 소설의 제목은 뭔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아니, 그 제목은 이미 써먹지 않았는가."

 "그래, 써먹었지! 하지만 그때 난 제목을 잘못 달았어. 그 제목은 지금 쓰는 소설에 붙여야 했어." 


 이 구절이 말해주는 시사하는 바는 쿤데라의 소설작업이 일정한 문제의식 아래 꾸준히 이뤄졌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쓴 작품의 제목들을 열거해보면 좀 더 이런 경향이 좀 더 뚜렷하게 드러난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불멸, 느림, 농담, 우스운 사랑들, 이별의 왈츠, 정체성, 향수, (소설의 기술), (배신당한 유언들), (커튼), (만남), 무의미의 축제까지. 이 제목들이 밀란 쿤데라의 개성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철학적 냄새가 물씬 풍기는 <불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느림>, <생은 다른 곳에>, 연애소설의 냄새가 풍기는 <이별의 왈츠>, <우스운 사랑들>, 정치소설의 냄새를 희미하게 짐작해볼 수 있는 <정체성>, <향수>까지. 

 그리고 우리는 이 체코 출신의 프랑스어권 작가의 개인적 소설사에 대해 아주 상세히 꿰뚫고 있다. 프랑수와 라블레, 세르반테스, 스턴, 레프 톨스토이,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토마스 만, 하세크, 프란츠 카프카, 헤르만 블로흐, 로베르트 무질, 사무엘 베케트, 비톨트 곰브로비치... 계획 - 체계 - 소설사 3無 독서를 해온 나에겐 꽤 큰 충격이었다. 불멸의 고전부터 현대의 고전, 동시대의 뛰어난 작품들까지... 좋은 작품들을 너무 많고, 읽을 시간은 부족하기 때문에 책의 명성을 뒤쫓다 보면 꽁무니만 따라다니다 지칠 수밖에 없다. 쾌락형 독서를 지향하거나 넓이를 추구하는 독서를 지향하는 사람이라면 크게 상관없을 지도 모르겠지만 '깊이'를 추구하는 사람에겐 심각할 수 있는 문제였다. 나만의 소설사 만들기. 이는 자기문제 의식에 천착하지 않고, 자기 세계를 구축하지 못한 사람은 해내기 힘든 과제이다. 위의 기사에서 조영일 문학평론가가 역설하는 리스트의 중요성도 이와 맥을 함께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 리스트가 어떻게 구축될 지 잘 모르겠지만 밀란 쿤데라는 이미 한 자리 차지하고 있는 중이다.


 2. 쿤데라와 나. 


 밀란 쿤데라 에피소드 1 : 친구의 소개로 참석하게 된 모임에서 매력적인 여성과 귀갓길을 동행한 일이 있다. 지하철 역에서 방향이 달라 헤어지기 직전의 나눈 대화이다.(기억과 망각 사이에서 상상의 힘을 빌려 재구성한 대화임을 밝혀둔다)


나 : 처음 만나는 사람한테 던지는 질문이 있어요.

여인 : 뭔데요?

나 :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누구인가요? 

여인 :  왜 그 질문을 하는데요?

나 : 무슨 작가/작품을 좋아하는지 알면 그 사람이 누구인지 어느 정도 짐작해볼 수 있잖아요. 

여인 : 그래서 ~~씨가 제일 좋아하는 작가는 누구인데요?

나 : 사실 이 질문을 생각하고 나서 스스로에게 물어봤는데 답이 잘 안 나오더라고요. 그래도 꼽자면 카프카, 카뮈, 밀란 쿤데라 정도. 

여인 : 한국 작가 중엔 없어요?

나 : 소설은 박민규(이 시점에서 아직 김연수를 다 안 읽은 걸로 기억), 시는 황지우, 김경주 좋아해요. 

여인 : 이 작가들을 좋아하는 ~~씨는 어떤 사람이죠?

나 :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 문학하는 사람들을 좋아하는 사람, 문학하는 사람들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좋아하는 사람, 사랑을 사랑하는 사람이요. 마지막은 라깡이 한 말 베꼈어요. 혹시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읽어보셨어요? 

여인 : 아뇨. 

나 : 거기서 제가 제일로 좋아하는 구절 중에 하나가 있는데 뭔지 아세요? 아, 안 읽어보셨다고 했지.

여인 : 얘기해줘요.

나 : 남자 주인공 집에 여자 주인공이 처음 가는데 거기서 책장에 수많은 책들이 꽂힌 걸 보고 이 남자는 믿어도 되겠다 생각하는 장면이 나와요. 책을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에게 함부로 행동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안심한 거죠.

여인 : 책 소장량과 책에 대한 사랑이 비례한다고 볼 수 있을까요? 

나 : 음... 비례할 확률이 높다 정도로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여인 : 그쵸. 확률적으로. 

나 : 책을 사랑하고 마음에는 한 번뿐인 삶에서 한 번밖에 살지는 않겠다는 의지가 깃들어 있는 것 같아요.  

여인 : 한 번밖에 살지는 않겠다는 게 무슨 말이에요?

나 : 사르트르는 탄생과 죽음 사이에 선택이 있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우리는 살면서 무수히 선택의 순간에 직면하잖아요. 뭔가를 선택하는 동시에 다른 뭔가를 선택하지 않죠. 한 권의 책을 읽기로 선택하는 순간 그 책을 읽는 동안 만큼은 그 한 권을 제외한 모든 책을 읽지 않는다는 걸 의미하죠. 사랑도 마찬가지예요. 누군가를 사랑하는 동안에는 그 사람을 제외한 전 인류를 사랑하지 않게 되는 거죠.

여인 : 하지만 전 남자친구를 사랑하면서 부모님을 동시에 사랑하는 데요.

나 : 정말이요? 

여인 : 네, 그럼요. 

나 :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고요? 잘 생각해보면 실제로 사랑의 느낌은 한 곳에서 올 것 같은데요. 

여인 : 듣고 보니 그럴 지도 모르겠네요. 

나 : 마음의 방이 두개인 사람도 동시에 두 사람을 사랑하진 못할 거예요.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옮기는 시간이 필요할 테니. 

여인 : 그 시간이 눈 깜짝할 새라면 동시에 사랑한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요? 

나 : 뭐, 어쨌든 제가 얘기하고 싶었던 건 우리는 책을 읽으면서 인생을 연습한다는 거예요. 실전에서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선택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를 최소화시키기 위해 남의 인생을 계속 훔쳐보려는 거죠. 

여인 : 오늘 얘기 즐거웠어요. 

나 : 저도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에피소드 2 : 밀란 쿤데라 혹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대한 한 마디들. 

남자 1 : 나는 요즘 소설은 잘 안 읽게 되더라고. 읽을 땐 재밌는데 별로 남는 게 없는 느낌이랄까. 

남자 2 : 밀란 쿤데라라는 작가는 읽을 만해. 문체가 철학적이야. 

남자 3 : 남자들이 여자들 앞에서 잘난 척하기 좋은 책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잖아. 


나 : 혹시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봤어?

친구 : nope! 허나 하도 이야기를 많이 들어 다 읽은 것 같은 기분. 


에피소드 3 : 애정하는 지인과의 대화(역시 재구성) 


지인 : 저는 연애는 별로인 것 같아요? 

나 : 아니, 왜요???

지인 : 연애하면 좋긴 좋은데, 남는 게 없는 것 같아서 허무해요. 

나 : 그럼 사랑은요? 

지인 : 사랑은 연애랑 좀 다른 것 같아요. 

나 : 어떻게 다른데요? 

지인 : 사랑은... 음... 논리적으로 설명하긴 힘든데 느낌상으로 상대방을 위하고 희생하는 측면이 강한 것 같아요. 

나 : 사랑은 이타적이고, 연애는 이기적이고 이런 건가? 

지인 : 꼭 그렇다고 볼 순 없는데 그런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요즘엔 사랑은 그냥 호르몬 작용 아닌가? 이런 생각도 많이 들고. 

나 : 저도 스무 살 즈음에 그런 생각에 빠져서 허무주의 같은 거에 엄청 시달렸었는데 나중에 보니까 그게 아니더라고요. 

지인 : 왜요? 

나 : 음... 말로 설명하긴 힘드니까 나중에 거기에 대해 글쓴 거 보내드릴게요. 아 그리고 연애 말인데. 연애가 밥 먹고, 영화 보고, 여관 가고 틀에 박혀서 관습화되면 소모적인 측면이 있긴 한데 그 가벼움 안에서도 진실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좋은 의미의 '즐김'으로 연애를 본다면 현재를 충실하게 보내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지인 : 연애가 나쁘다는 건 아닌데 전 그냥 지금은 별로 연애하고 싶은 마음이 안 들어요. 

나 : 그러면 한 번 밀란 쿤데라라는 작가가 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읽어보세요. 그 작품이 사랑에 있어 가벼움과 무거움의 문제에 천착한 소설인데... 읽어보면 알 수 있을 거예요. 

지인 : 이름은 들어보긴 했는데. 

나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 중의 하나기도 하고요. 


3. 축제의 서막 : 대문자 정치와 오줌. 


 무의미의 축제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칼리닌그라드의 칼리닌과 요제프 스탈린이었다. 그 중에서도 한 명만 꼽자면 칼리닌이었는데, 그 이유는 차이콥스키, 톨스토이, 푸시킨 등 쟁쟁한 러시아를 빛낸 위인들을 제치고 별 다른 이유 없이 자기 이름을 딴 도시를 갖게 된 기구한 운명 때문이었다. 레닌그라드, 스탈린그라드와 달리 아직까지 그 이름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겉보기에 이런 명성과 어울리지 않는 속좁은 방광, 불협화음을 내는 전립선의 U(rine) 코드가 감성을 웃음과 연민을 자아냈다. 비슷한 체험을 한 경험이 있는데 바로 김영하 작가가 극찬한 바르가스 요사의 정치소설 <염소의 축제>에서 나신의 소녀 혹은 여인을 앞에 두고, 도미니카를 지배하고도 자신의 방광/전립선만큼은 지배하지 못한 독재자 트루히요가 떠올랐다. 독재자와 오줌보. 기형도 시인이 '질투는 나의 힘'이라 말했던 것처럼 정치적 지도자에 오른 사람 중에 심한 결핍/컴플렉스를 갖고 있는 사람을 심심치 않게 만나볼 수 있었는데 '무의미의 축제'를 통해 오줌형 캐릭터의 체계를 정립할 수 있게 됐다. 칼리닌이 아닌 스탈린이 그랬다면 더 의미?가 있었겠지만 대문자 정치의 서사에서 오줌이 등장함으로써 역사/정치적 배경이 소설의 무대에 매끄럽게 안착할 수 있었으리라. 보잘것없는 것 - 핍진성의 사물 - 사랑의 소재 - 소설의 질료.


4. 무의미의 축제 : 배꼽의 시대의 개막 


 알랭은 배꼽에 대해 곰곰히 생각한다...?! 배꼽은 참 묘하다. 신체 기관이 대부분 바깥으로 돌출돼 있는데 배꼽은 참호를 파고 숨은 군인처럼 배 안 쪽에 웅크리고 있다. 완만한 배의 곡선에서 갑자기 나타나는 벙커bunker. 긁으면 때가 나오는  기분이 묘해지는 부위. 섬세하게 쓰다듬으면 또 다른 묘함을 느끼게 하는 부위. 항문과 성기 다음으로, 아니 어쩌면 항문 다음으로, 경우에 따라선 항문보다 더 보기 귀한 신체 부위. 숨어 있는, 태초의 신비를 간직하고 있는 탄생의 징표, 원초적 상처의 흔적, 에로티시즘의 처녀지. 쿤데라는 알랭의 입을 빌어 이렇게 말한다. 


 허벅지, 가슴, 엉덩이는 여자들마다 다 형태가 달라. 그러니까 이 황금 지점 세 개는 단지 흥분만 불러일으키는 게 아니고, 그와 동시에 한 여자의 개체성을 나타내 준다고. 사랑하는 여자의 엉덩이를 못 맞힐 수는 없잖아. 수없이 많은 엉덩이 중에서도 자기가 사랑한 엉덩이는 알아볼 것 같아. 그렇지만 배꼽을 가지고 이 여자가 내가 사랑하는 여자라고 말할 수는 없어. 배꼽은 다 똑같거든.(p138)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천 만 분의 1의 차이를 탐색하고자 수없이 여자들과 몸을 섞었던 토마시가 연상되는 대목이다. 한 글에서 철학자 양운덕은 토마시를 '차이의 철학자'라고 설명했다. 차이가 사라진다면, 차이가 부정되면 대체불가능이란 사랑의 근본적 속성도 부정된다. 한동안 재밌게 봤던 <마녀사냥>에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 여성이 보낸 사연이었는데 자신이 외국으로 6개월 정도 체류하고 있는 동안 한국에 남아 있는 남자가 바람을 폈다는 것이다. 재밌는 점은 남자가 자신과 똑 닮은 여성을 사귀었고, 그것 때문에 남자에 대한 분노/배신감이 많이 중화되었다는 것이다. 여성은 남자가 자신이 너무 보고 싶은 나머지 자신과 똑 닮은 '아바타'를 통해 자신에 대한 외로움을 달랬으리라 추측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 사고방식의 기저에는 외모를 자신의 본질적 정체성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기술복제시대를 넘어 가히 외모복제시대에 진입했고, 점점 더 진입하고 있는 시점에서 외모의 아우라... 지켜지길 바라지만 미래전망이 어두워 보인다. 그런데 한 가지 더 생각해볼 만한 것은 여성의 사고방식에 따르면 남성은 여성의 인격, 내면보다 외모를 중시하고 사랑했다는 결론에 이르는데 그걸 무의식적으로 자연스럽게 용인하고 있는 여성의 태도가 내겐 조금 문제적이다. 대체가능과 대체불가능의 영역이 모호하게 섞여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시대의 사랑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작동하는가, 그리고 완성되는가. 

 알랭의 이야기를 계속 들어보자. 


"이 네 가지 황금 지점은 각각 하나의 에로틱한 메시지를 나타내. 그러면 배꼽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에로틱한 메시지는 뭘까? 그는 잠시 멈추었다가 말했다. "한 가지는 분명해. 허벅지나 엉덩이, 가슴하고는 다르게 배꼽은 그 배꼽을 지닌 여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고, 그 여자가 아닌 어떤 것에 대해 말한다는 거야."

"뭐에 대해서?"

"태아."

"태아라, 그렇지." 라몽이 인정했다. 

 그리고 알랭이 말했다. "예전에 사랑은 개인적인 것, 모방할 수 없는 것의 축제였고, 유일한 것, 그 어떤 반복도 허용하지 않는 것의 영예였어. 그런데 배꼽은 단지 반복을 거부하지 않는 데서 그치지 않고, 반복을 불러. 이제 우리는, 우리의 천년 안에서, 배꼽의 징후 아래 살아갈 거야. 이 징후 아래에서 우리 모두는 하나같이, 사랑하는 여자가 아니라 배 가운데, 단 하나의 의미, 단 하나의 목표, 모든 에로틱한 욕망의 유일한 미래만을 나타내는 배 가운데 조그맣게 난 똑같은 구멍만 뚫어져라 쳐다보는 섹스의 전사들인 거라고."  (p138~139)

 

   이쯤 되면 우리는 소설 뒤표지에 적힌 문장이 어떤 의미인지 감을 잡을 수 있게 된다. "보잘것없는 것을 사랑해야 해요.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해요." 사랑은 사랑스러운 것에서 오지 않는다. 보잘것없는 것, 그것을 향해 기울이지 않으면 볼 수 없는 사각에 핀 꽃, 그러니까 사랑은 무의미의 축제. 밀란 쿤데라는 문학에 평생을 걸어 거장의 반열에 올랐고, 아마 몇몇 작품들은 불멸의 고전의 지위를 누릴 테지만 그가 죽으면 그 명성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삶의 모든 빛들은 죽음의 가정 앞에 빛이 바래고 만다. 하지만 죽음을 가정하지 않는다면, 그러니까 삶 다음에 죽음이 있고, 삶과 죽음을 구분해서 생각하지 않고, 삶과 죽음이 서로 대립되지 않는 한 쌍이라는 것을, 이 모순을 받아들인다면 삶/죽음은 의미/무의미의 틀에 갇히지 않는 선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원치 않은 임신으로 인해 서로 떨어져야 했던 알랭과 어머니의 화해처럼. 생은 다른 곳에서 와서 다른 곳으로 가지만 생이 있는 곳은 오직 지금 여기 내 앞이다. 아니 지금 여기의 나 (0,0,0,0)자체에 있다. 다른 곳으로 떠나는 생에게 '잘 놀다 갔다'고 천진한 웃음의 작별인사를 건넸던 천상병 시인처럼 삶/죽음과 화해한 이는 무의미의 축제를 즐길 수 있는 것이다.


말이 나온 김에 천상병 시인의 귀천을 함께 읽어보자.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5. 축제가 끝나고 난 뒤 : 배꼽에게 


 배꼽과의 눈맞춤. 최근의 일이다. 지하철에서 한 자리 차지하고 책을 읽고 있던 내 앞에서 한 여인이 옷매무새를 정리하려는 듯 상체를 뒤로 젖혔고 불현듯 배꼽과 눈이 마주쳤다. 여인은 부끄러운 듯 성급하게 배꼽을 가렸고, 나와 배꼽의 해후는 순식간에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배꼽은 참 여성적인 신체기관이란 생각이 든다. 바깥으로 공격적으로 돌출되어 있지 않고 안으로 둥글게 무언가를 품고 있는 듯한 배꼽. 사전을 찾아보니 배꼽에 이런 뜻도 있었다. 열매의 꽃받침이 붙었던 자리. 배꼽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배꼽은 어머니-자궁이란 태초의 세계와의 이별/부재를 현시하면서 무엇보다 삶에 대해 말한다. 그러니까 배꼽은 심보선 시인이 '인중을 긁적거리며'에서 그렸던 인중처럼 카오스에서 존재를 출현하게 하는 최초의 사랑의 입맞춤의 자국일 지도 모른다. 그저 있음(Il y a). 배꼽을 보며 존재자 이전의 존재의 세계를 상상해본다. 존재자 없는 존재, 어쩌면 존재 없는 존재. 진화의 단계상 너무나 익숙해져버린 기관화된 신체의 성장을 거치지 않고 태초의 박테리아, 무성생식, 자신을 둘로 나누기 위해, 찢어버리기 위해, 자신을 죽임으로써 더 큰 자신을 살리기 위해 몸부림치는 그때로 돌아가본다. 아니 어쩌면 그 이전, 빅뱅... 혹은 빅뱅 이전...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그녀의 배꼽에 살포시 손가락을 올려놓아보고 싶다. 그렇게 배꼽과 배꼽이 맞닿을 수 없다는 근원적 한계/그리움을 달래보고 싶다.


  



p.s 2002년 즈음 배꼽티가 유행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약 12년 만에 배꼽의 시대가 돌아왔다. 배꼽의 특성상 이 시대가 오래가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꼽이여 거기 오래 남아 있거라.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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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04 10: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rendevous 2014-09-04 16:15   좋아요 0 | URL
글씨색 바꿨습니다 ~ 알라딘은 다 좋은데 배경이 지 맘대로 바뀌어서 ㅜ

CREBBP 2014-09-05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배송오던 날 휘리릭 읽었는데... 리뷰 쓰려면 다시 읽어야겠어요.
150쪽에 공백 다 제거하고 나면 한 80쪽 정도 되는데, 가격과 글자의 양과의 차이가 너무 심하다 라는 생각이 치켜 올라왔었다는

rendevous 2014-09-05 17:10   좋아요 0 | URL
제가 그래서 무의미의축제 신청 안한 거였어요... 요즘 대형출판사들이 두꺼운 책 잘 안 읽으니까 경장본에 좀 비싸게 파는 출판경향이 있더라고요 인문서가에 꽂힌작가들 문학동네 시리즈도 그렇고 닥터슬립 감정수업 중에 됐어야했는데 신간평가단 분들이 밀란쿤데라 이름만보고 그냥 신청한듯...

봄밤 2014-09-14 0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저 스크롤 내리면서 다 읽었어요. 흰색 바탕에 흰색 글자라니!
하지만 고생, 충분히 값져요.

rendevous 2014-09-15 13:41   좋아요 0 | URL
이 스킨이 지맘대로 바뀌네요 ㅜㅜ 좋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ㅎ

2014-09-21 12: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rendevous 2014-09-21 22:37   좋아요 0 | URL
저번에 스킨이 검은 색으로 자동으로 바뀌었는데 제가 바꾸는 법을 몰라서요 ㅜㅜ 읽는 입장에선 불편하긴 할 것 같은데 뭔가 한 겹의 비밀외투를 두르고 있는 느낌이 연출되는 것 같기도 해서 오묘하네요 ^^ 쿤데라 전집 읽기 도전하다가 멈춘 상태인데 아껴서 읽으려고요 ㅎㅎ 어떻게 보면 한없이 가벼워보이는데(작가란 무엇인가 쿤데라 인터뷰 부분을 보니 이 가벼움이 그의 소설론에 의해 철저히 의도된 결과물이란 걸 보고 예전에 휘리릭 넘겼던 걸 다시 보게 되더라고요 ㅎㅎ)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생각할 여지가 많은 것 같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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