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알아요

 

 

엘르 코리아에서 배우 한예리의 인터뷰를 읽었다. 그중 일부를 옮긴다.

 

행복지수도 높아졌나요 : 빨리 서른이 되고 싶었어요. <청춘시대>만 봐도 20대는 많이 흔들리잖아요. 저도 그랬고, 서른이란 나이의 안정감을 기대했어요. 그 나이가 되면 안개가 낀 것처럼 불투명한 시간이 한결 선명해지고 생각도 성숙해지지 않을까 하고.

기대한 대로 됐나요 : 확실히 30대가 좋아요. 저란 사람에 대해 더 알게 된 만큼 재미있고 행복해요.

 

 자신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행복할 가능성이 높을 수밖에 없는데 이 특수한 지식은 전적으로 행복과 관련된다는 점에서 윤리학적 재료들이다. 자신에 대한 앎은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데 활용할 수 없는 것은 아니나 무엇보다도 자신이 행복해지는 데 필요한 결정적인 근거이다. 자신은 동적인 사람인데 이를 평생 인식하지 못하고 데스크 업무만 보고, 집에서만 여가시간을 보낸다면 억겁의 시간이 흐른다 해도 행복의 방정식은 풀리지 않은 상태로 남겨질 것이다.

 

 행복에 대한 정의가 제각각 다르겠으나 행복이 슬픔이 아닌 기쁨과 관련되어 있다는 데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줄로 안다. 감정, 정동에 대한 통찰을 보여준 스피노자에 따르면 기쁨은 자신의 역량을 온전히 발휘할 때 생성되는 감정이다. 들뢰즈는 어느 강연에서 길에서 사람을 마주쳤을 때 기쁨을 느낀다면 이는 자신이 강해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렇게 적어놓고 보니 <혼자를 기르는 법>의 김정연 작가의 인터뷰가 떠오른다. 자기 방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로만 채워져 있어서 좋다는 것, 그야말로 자기만의 방A room of one’s own’에서 살고 있는 이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30대가 되면 조금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 알게 된다는 말에 심심한 위로를 받으면서 한편으로 이십대의 격렬한 방황과 좌충우돌이 있었기에 가능한 게 아닐까 싶었다.

 

 그런 점에서 20대는 실험의 연속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다운 나를 찾기 위한, 또 만들어나가기 위한 연습과 연마의 시간. 연애를 통해 정확한 사랑의 실험을 시행하고, 소비와 문화적인 편력을 통해 자기만의 감수성과 취향을 실험하고, 독립을 통해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시공간의 디자인을 실험하고, 취업 및 도전을 통해 이상과 현실 사이 적절한 타협점을 실험한다. 사랑의 경험을 통해 자기 몸과 처음으로 내밀한 소통을 시작하게 되고, 진부한 비유이긴 하지만 상대방의 연주에 따라 자신이 어떤 음을 낼 때 가장 빛나는 악기인지 차차 알아가고,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독립함에 따라 자기만의 시공간을 확보하게 되고, 그 시공간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디자인하면서 멋을 찾아가기 시작하고, 욕망과 능력이 조화를 이루는 지점을 찾고 자신의 포지션을 받아들이고 나서야 에 대해 조금 알 것 같다고 노래 부를 수 있는게 아닐까.

 

 이렇게 자신에 대한 앎을 정립하는 과정에서 타인의 호명 및 심문은 중대한 역할을 차지한다. ‘누구냐, 우리는 끊임없이 타인에게 자신을 설명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자기소개를 하고, 자소설이란 오명이 씌워지긴 했지만 자소서를 쓰는 등 사실은 나는 누구인가반복적으로 규정하게끔 유도·강제하는 규율을 통해 자아에 대한 특정한 이미지가 구축된다. ‘나는 누구인가라고 묻는 는 누구인가. 알튀쎄의 호명 메커니즘을 적용시킨다면 나는 누구인가묻는 는 대타자-이데올로기에 호명된 주체이기 때문에 실상 누구냐, 이란 질문의 뒤집힌 형태에 불과하다는 걸 알 수 있다. 나는 양동혁이다, 남자다, 한국인이다, 시스젠더 헤테로섹슈얼이다, 대학원생이다, 이런 식의 답변은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정보일지 모르지만 스스로에게 무의미한 기호일 뿐이다. 명사가 아닌 동사로 주술 구조를 갖춰 서술했을 때 내 본질을 조금이나마 담아낼 수 있다. ‘누구인가도 문제적이지만 라는 개념 자체도 그 못지 않다. 니체가 말했듯 가 문법적 환상에 불과하고, 행위가 주체를 구성한다는 수행적 관점을 받아들인다면 나는 내가 한 행동들의 총체 정도라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정희진처럼 읽기>에서 정희진이 데카르트 식 코기토에 대항하며 피력한 의견과도 동일한데 이와 더불어 나는 내가 맺고 있는 관계들의 총체라는 관계론적 관점이 탈근대 철학적 지평에서 바라보는 주체의 이미지인 것 같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까지 한 행동들과 내가 맺고 있는 관계들을 설명하면 나에 대해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는 걸까?

 

 가끔 그런 상상을 한 적이 있다. 브레인라이팅-생각하는 즉시 그대로 문자로 옮겨지는 기술-과 카메라로 전 생애 전체를 기록하고, 텍스트로 남긴다면 나중에 어떤 식으로든 인생을 복기하는 과정에서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만 볼 수 있게 해놓더라도 내 삶이 전부 기록되고 있다는 의식이 살아가는데 영향을 미칠 수 있겠으나 망각으로 인해 고초를 겪는 경우가 적지 않으니 인생을 기록하는 블랙박스의 존재를 생각하게 된 것이었다. , 자기 자신에 대한 평전을 쓸 수 없듯 객관적인 거리가 확보되지 않아 비평적 관점을 취하기 힘든 반성적인 내면 성찰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활용할 수 있겠다 싶었다. 예술가의 경우 작품을 통해 창작자의 심리와 세계를 해석하는 게 가능하지만 작품 및 기록물archive 자체가 양적으로 빈약한 경우가 일반적이다 보니 기술의 도움을 통해 스스로를 이해할 수 있는 지평이 확장될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좀 더 생각해보니 이 기록들이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할 공산이 농후해보였다. 이런 기록이 남아 있다면 남의 인생을 사후적으로 구성하고, 해석하는 데는 유용한 자료가 되겠지만 스스로를 이해하는 데는 큰 도움이 안 될 거라 예상되었다. 영상이든 문자든 이미지든 기호들은 해석을 통해 주체로 편입되는데 해석할 자료가 양적으로 많다고 해서 해석의 질적 깊이나 정확도가 높아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최신식의 심리테스트나 과학기술이 개발되었다 하더라도 자기 자신에 대한 가장 깊은 지식은 명상을 통해 얻어지는 걸 보면 자신에 대한 앎은 그 지식을 매개 삼아 지적 주체 자신이 변화할 수 있는가지식의 윤리성(윤여일은 <지식의 윤리성에 관한 다섯 편의 에세이>에서 지식을 정합성, 기능성, 윤리성의 측면으로 구분하여 논하면서 지식의 윤리성을 화두로 독자들에게 건넨다)이 가장 절실하게 요청되는 영역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 여기의 자신이 어떤 마음인지 알아차리고행동하면서 자아라는 허상, 집착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고 있다면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을뿐더러 스스로에게 진실한 사람이다. 스스로를 속이지 않아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은 사람,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2지금의 함춘수(정재영), 내면이 배배 꼬여 있지 않아 자기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아는 사람, 진실한 사람이 되려면 행동을 바꾸고 욕망을 바꿔야 했다. 다른 것을 욕망하는 게 아니라 다르게 욕망하는 도주선을 그리기 위해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삶. ‘그것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라캉)

p.s 난 알아요. 무엇을? 난 날 알아요. 어떻게? 난 날 잘 알아요. ? 왜 난 날 잘 알아요? 왜 난 알아요(김승일). 왜 무가 아니라 존재인지 물었던 것처럼 왜 무지가 아니라 앎인지 물어보자. 이렇게 많이 알고 있는데 그만큼 잘 알고 있는지, 나아가 윤리적인지 따져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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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립도서관에 꽂혀 있는 녹색평론 1-2월호를 읽었다. 작년 9월 29일 시민행성에서 강의하신 나희덕 시인의 <대화적 스승 무지한 스승> 강의록을 읽을 수 있어 반가웠다. 필립 퍼키스의 <사진강의노트>에서 제안한 예술적 인간을 길러내는 교육, 아니 길러낸다기보다 학생 내면에 잠재된 가능성을 스스로 끄집어낼 수 있게 도와주는 교육. 출처가 불분명해진 기억 하나가 떠오른다. 필자가 루브르박물관 앞에서 청소부와 예술에 대한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고 프랑스의 문화적 수준에 대해 부러워했다는 내용.

2. 스마트폰의 유해성을 중점적으로 논의한 대담도 재밌게 읽었다. 대담자로 나오신 시민운동가 분들이 참여한 EBS토론도 봤던 터라 생각을 연장해볼 수 있었다. 중, 고등학생들이 직접 참여했던 토론회에서 '전문가' 어른들이 스마트폰이 신체에 미치는 악영향 등등의 자료를 제시하면서 아이들을 의식화하려는 계몽적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 접근으로는 학부모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켜 아이들의 스마트폰 사용을 감시하고 억압하고 규제하는 걸 부추길 수 있겠지만 아이 스스로 자제력을 키우고 조절하는 힘을 길러주는 '교육적' 방식은 아니라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이미 중독된 아이를 대화와 교육적 접근만으로 회유하는데 한계가 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스마트폰이 없으면 생활 자체가 불가능해보이는 동생을 말로 설득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는 결론이 나온 상태였다. 대화를 '잘' 하지 못한 내 잘못이 크겠지만 '가장 가까운 타자'인 가족 간 소통불능성이랄까... 외부의 도움을 청해볼 생각이다.

3. 사색/사유/고독 불능의 사태로 몰아가는 '스마트'폰은 학생들을 가장 광범위하게 침해하고 있지만 정부는 스마트 교육이라는 명목 아래 이를 권장하고 있다고 한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영유아. 엄마들이 우는 아기를 달래기 위해 스마트폰을 쥐어준단다. 부모는 죄를 짓기 가장 쉬운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아닌가 싶다. 시민들의 무지를 탓하기 이전에 아무런 법적 규제나 공론화에 관심이 없는 정부와 핸드폰 파는 데 눈 먼 대기업을 비판해야 겠지만 시민사회에 스마트폰의 악영향에 대한 인식이 뿌리내리기 전까지 스마트폰이 뿌리내릴 몸들을 생각하면 무서운 이미지들이 육박해들어온다. 피해는 낮은 곳에서 발생한다. 스마트폰 랜덤채팅을 통한 여중생/여고생 성매매. 특목고나 자사고, 강남 지역의 아이들의 경우 스마트폰이 없거나 2G폰을 쓰는 비율이 높다는 내용이 대담에 나온다. 법의 자리에 대해 생각해본다. 드러난 법을 통해 드러나지 않은 정의로 이끄는 법-폭력.

4. 작년 시민행성에서 들었던 도정일 선생님의 말씀. 세월호에 있던 아이들도 스마트폰하느라 탈출하지 못했다는 내용. 지나가던 말씀으로 가볍게 던지셨는데 그땐 아마 평소에 대학강단 내지 청소년들의 스마트폰 사용에 대한 부정적 효과에 대한 걱정이 크셔서 그렇게 말씀하신 거라고 이해했다. 만약 스마트폰이 문제라 치더라도 누구/무엇에 책임을 물어야 할까. 스마트폰에 중독된 당사자? 스마트폰을 사준 부모? 이렇게 중독성이 높은 유해상품을 개발한 스티브 잡스? 그 스마트폰을 각종 혜택으로 치장해 팔아먹은 핸드폰 장사꾼들? 자본주의 사회에선 피해자/가해자 구별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든다. 자본주의의 대기권 내에선 우리 모두 피해자이자 가해자이고 세월호이지 않을까.

5. 중독. 작년 6월 7일 시민행성에서 진행한 세월호 시민 집담회에서 진은영 시인은 우리 모두 뭔가에 중독되어 있는 상태라는 진단을 내렸다. 녹색평론 대담에서 김종철 선생님도 인터넷 서핑을 하다 보면 쓸데 없이 이것저것하게 된다고 했다. 나도 평소에 책이 잘 안 읽힐 때 인터넷 사이트를 돌며 글을 봤던 습관이 있어 격하게 공감했다. 포털사이트에 걸린 기사들, 씨네21, 웹진 문장, 예스24 칼럼들, 페이스북, 대산문화, 민연, 블로그 등등... 하지만 그렇게 '발동'이 걸려 게걸스럽게 조각글을 읽을 때는 긴 글을 소화하기 무척 힘들었고, 읽고 나서도 남는 게 거의 없었다. 모니터를 1시간 이상 보고 있으면 머리가 조금 띵해지고, 열받는 느낌이 드는데 전자파에 맷집이 약한 것 같다. 운 좋게 노트북이 고장났고 3달 가까이 노트북 없이 살고 있는 중이다. 필요할 땐 시립도서관 정보자료실을 이용하는 데 한 번에 이용할 수 있는 최대시간이 3시간이라 쓸데없이 서핑하는 시간을 줄이게 된다. 무엇보다 노트북으로 흘렀던 리비도로 인한 희미한 공허감, 권태감으로부터 해방된 게 최대의 수확이다. 도서관에 올 일이 많아지니 종이신문도 읽게 되고, 인터넷으로 딴짓(?)도 안 하게 되니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데도 좀 더 집중력이 붙은 것 같다. 문제는 이제 노트북이 돌아온다는 것이다. 한 번 중독되면 끊기는 어렵지만 재개하는 건 전혀 어렵지 않다는 중독의 위력을 상기하며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 지 생각해보게 된다. 조금 거창하게 이런 생각도 덧붙여보기도 한다. 중독된, 오염된 몸을 어떻게 정화할 것인지, 해방할 것인가.

6. 술, 담배 말고 한국형 중독 금은동을 어떻게 뽑을 수 있을까? 스마트폰/SNS/야동/치킨(육식)/성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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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51

홍대 칼국수집 두리반은 작은 용산이었다

용산에서 5명이 망루에 올라가 불타 죽었지만두리반에서는 뮤지션-예술가들이 공연을 하면서 1년여가 넘는 장기간 동안의 투쟁을 통해 시민의 정당한 권리를 지켜내는데 성공했다.

홍대의 땅값이 비싸지는 바람에 공연할 공간을 잃어버린 뮤지션들과 재개발을 이유로 적당한 보상금을 '먹고 떨어지라'는 식으로 주며 자본의 폭력을 행사하려는 대기업에 저항한 두리반 사장님들의 연대가 만들어낸 작은 기적이었다. 이렇게 표현해보면 어떨까. '집'을 잃어버린 이들의 '우리 집 지키기 프로젝트',의 성공

야마가타 트윅스터의 한받과 객원댄서 이랑, 하헌진, 강정 jam docu에서도 본 적 있는 밤섬해적단, 회기동단편선 등의 뮤지션이 파티51에 동참했고, 씨네토크에 출연해주신 심보선 시인을 비롯해 1월 11일 동인이 낭독회를 적극적으로 열었다고 했다. 이 얘기를 듣고 한 가지 재밌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문예중앙에 연재 중인 '가사 울림통'에 나온 4명이 모두 두리반-파티51에 연관되어 있었던 것이다. 야마가타 트윅스터, 회기동 단편선, 이랑, 1월 11일 동인인 밴드 MOT의 이이언까지.

아마 용산 이후로 '예술/문학과 정치'가 다시 화두로 떠오른 것으로 알고 있다.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다는 전통적인 리얼리즘의 허구성을 비판하며, 예술의 정치성, 미적인 것의 정치성, 예술과 정치의 접점을 찾으려는 다각적 시도가 이뤄져 왔다. 대산문학상 수상 당시 이광호 평론가가 예술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만남을 자신의 비평적 화두로 삼는다는 식의 소회를 밝혔고, 이는 문학과 정치를 탐구하는 다른 평론가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현장'의 중심에 있었던 진은영 시인의 <문학의 아토포스>는 그런 의미에서 문학과 정치에 관심을 갖고 있는 독자라면 읽지 않을 수 없는 책일 것이다. 문득 진은영 시인은 두리반 투쟁에 참여하셨을지 궁금해졌다. '베프' 심보선 시인과 함께 참여했을 거란 예상 ^^

용산 사건은 한국 문단에서 큰 파장을 일으켰다.

문학인들은 <작가선언 6.9>을 발표하고 <지금 내리실 역은 용산참사역입니다> 문집을 냈다. 뿐만 아니라 이시영 시인의 <경찰은 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를 비롯해 많은 작가들이 용산을 문학화하고, 증언하고자 했다. 세월호 사건 이후의 반응도 비슷한 것 같다. 문학인들의 시국선언과 <우리 모두가 세월호였다> 문집 발간.

 

파티51 관람 후 내게 남은 이미지는 이랬다. 자본보다 무서운 법. 법보다 더 무서운 자본과 유착한 법. <법의 힘>. 현재 법이 자본으로부터 얼마나 독립적이고 자유로운지 잘 모르겠고, 법이 자본으로부터 독립적이고 자유로울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모르겠다. 정의 - 옳은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힘이 약하고, 힘이 강한 사람들은 정의롭지 않기 때문에 권력/폭력과 정의 사이의 괴리가 있다는 문장을 읽은 기억이 나는데 '힘이 곧 정의'가 되는 약육강식의 논리를 멈추고 정의실현이라고 하는 법의 텔로스를 실현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정치. 정치의 올바른 작동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다면 정치의 올바른 작동이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아니 거기까지 갈 필요도 없이 정치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로선 역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지만 벤야민이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앞으로는 정치가 역사에 대해 우위를 차지하도록 해야 한다.'(k[1,2])고 말했을 때 정치는 자본주의 시대니까 ~~ 해야 한다 같은 식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내면화된 주체들의 자기복제적 중얼거림이 아니라 이 이데올로기의 꿈으로부터 각성해 이전부터 존재했으나 현실화되지 못한 '오래된 미래'를 지금-여기에 도래시키는 언어, '문자의 사슬을 끊고 나오는 해방된 산문', 임재하는 진리의 언어로 말해지는 그 무엇이 아닐까 어렴풋이 추측할 뿐이다.

 

파티51은 유쾌한 영화였다. 무엇보다 두리반 현장에서 미친 듯이 소리지르고 춤추고 열광하며 즐긴 청중들이 부러웠다. 고2나 고3였을 텐데 그때 두리반-파티51을 경험했다면 지금의 나와는 조금, 혹은 많이 다른 모습이 되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마지막으로 회기동 단편선의 라이브 무대 정말 좋았고, 언젠가 꼭 한 번 한받 님과 '돈만아는저질' 댄스를 같이 추고 싶다는 소망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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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h21.hani.co.kr/arti/cover/cover_general/38657.html

 

초등학교 다닐 때 ~~살아남기 시리즈를 즐겨 읽었다.

화산에서 살아남기, 무인도에서 살아남기, 아마존에서 살아남기 등등

중간중간에 껴있는 과학설명도 빼놓지 않고 읽었지만 만화서사를 따라가는 몸으로 읽어낸 과학설명은 순간적으로 지적 쾌락을 채워주는 고급 디저트였을 뿐이었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밥은 아니지만 혀를 즐겁게 해주는 디-저트.

 

이 시리즈의 새로운 버전을 생각해본다. 한국에서 살아남기, 북한에서 살아남기, 일본에서 살아남기, ~~ 살아남기... 오히려 이전의 살아남기 시리즈에서 다뤄졌던 오지가 '문명'사회보다 살아남는 데 더 수월해보이기도 한다. 오지에서 인간은 자연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면 되지만 문명사회에서 인간은 자연이 된 자본주의 사회의 무한경쟁 논리로부터, 그 논리를 내면화한 인간들로부터, 자신을 법에 기입된 시민이 아닌 '벌거벗은 생명'으로 탈바꿈시킬 지도 모르는 법으로부터, 자신이 먹는 음식에 들어 있을 지도 모르는 방사능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한다. 극한의 난이도이다.

 

이렇듯 최근 몇 년 사이 재난은 하나의 장르가 되었다.

재난이 현 사회/세계를 읽는 콘텍스트가 되었다고 봐도 무리 없을 듯 싶다.

직장인들 사이에서 '폭풍공감'을 이끌어내며 하나의 트렌드가 된 미생은 이렇게 한국사회를 요약하고 있지 않은가. 직장 안은 전쟁터고, 직장 바깥은 지옥이라고.

세상은 살기 더 좋아졌을지 모르나 바로 그 살기 좋아진 '삶'이라는 것을 살 수 있는 사람은 오히려 적어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문자 그대로 미생. 이 미생의 문제성은 '새는 껍질을 깨고 나와야 한다'는 식의 '진정한' 자아의 발견, 자아의 완정성 추구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 아니라 먹고 사는 생존 자체가 위협당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젊은작가 수상집에 금정연 평론가가 적은대로 스펙과 자기계발의 시대에 윤대녕 소설에 나오는 진정한 자아를 찾는 이야기는 이제 철 지난 유행가처럼 들릴 뿐이다. 혹자는 이렇게 반문할 지도 모른다. 청년실업률이 높다고 하는데 그게 다 대기업이나 공기업 같이 좋은 직장에 들어가려고 하니까 그런 거 아니냐, 힘든 일을 기피해서 그런 거 아니냐, 단순육체노동해도 먹고 살 수 있을 만큼은 벌 수 있다.

 

 먹고 살 수 있을 만큼은 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먹고 사는 게 인생의 지상목표가 되는 삶이라면, 사회라면, 우리가 낭만적으로 '꿈'이라 부르는 미래에 대한 긍정적 전망이 불가능한 삶이라면 삶은 삶이지만 더 이상 삶이 아닌 그 무엇이 된다. 이를 테면 삶-기계.

 미래는 현재와 구별되는 시간이 아니라 과거와 마찬가지로 현재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시간이다. 우리는 편의상 시간을 공간화해 과거/현재/미래를 도식적으로 분류하고 있지만 베르그손이 예전에 보여줬듯 시간은 '지속'하며, 서로 끊임없이 삼투하는 시간의 운동은 예술가들에게 중요한 모티프로 다뤄졌고, 다뤄지고 있으며, 앞으로도 끊임없이 다뤄질 것이다. 살아온 날들의 총합이 지금의 나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내용과 형식, 실재와 실존, 이 이항대립적 도식으로 시간들을 설명할 수 없는 건 삶이 변증법적 도식에 갇히지 않는 잠재성의 보고이기 때문일 것이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생명의 존재론. 우리가 절망을 느끼는 지점은 재난이 일어난 현재일 때도 있지만 더 이상 재난이 일어나지 않는, 일상 자체가 재난이 되어버린 전망없음/미래없음의 현재일 때가 더 많다. 생명이 진화/변화할 수 없도록 스스로를 현재에 가둬두게 만드는 것은 변화의 가능성이 표백된 무색의 미래다. 미래를 색이 없는, 어떤 생명/변화의 징조도 발견할 수 없는 죽음의 지대로 바라보게끔 하는 현재의 사회이다. 그런 사회에서 먹고 살 수 있을 만큼의 삶은 고도성장을 이룩하며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비전을 갖도록 장려한 시대의 삶과 다르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에서 살아남기. 사사키 아타루를 읽으면서 현 시대에 대한 파국의 진단(그것이 얼마나 정확한 진단인지를 떠나서)이 얼마나 유효한지 회의를 갖게 되었다. 과연 우리는 이 사회가 이대로 가다간 끝날 수밖에 없다는 시한부 선고를 받고 그 공포를 현실개혁의 에너지로 역전시킬 수 있을까. 알랭 바디우가 <사도 바울>에 적었듯 우리는 부정/지양의 정치학이 아닌, 그렇다고 실재를 외면하는 맹목적 긍정론도 아닌 긍정의 정치학을 발명해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애초의 문제설정, 명제를 이렇게 바꿔야 할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살아남기가 아니라 (내가 살고 싶은) 대한민국에서 살기. 파국과 종말론이 횡행하는 시대에 현실을 해석하는 철학이 아닌 현실을 변혁하는 철학을 말한 맑스를 되새겨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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