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알아요
엘르 코리아에서 배우 한예리의 인터뷰를 읽었다. 그중 일부를 옮긴다.
행복지수도 높아졌나요 : 빨리 서른이 되고 싶었어요. <청춘시대>만 봐도 20대는 많이 흔들리잖아요. 저도 그랬고, 서른이란 나이의 안정감을 기대했어요. 그 나이가 되면 안개가 낀 것처럼 불투명한 시간이 한결 선명해지고 생각도 성숙해지지 않을까 하고.
기대한 대로 됐나요 : 확실히 30대가 좋아요. 저란 사람에 대해 더 알게 된 만큼 재미있고 행복해요.
자신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행복할 가능성이 높을 수밖에 없는데 이 특수한 지식은 전적으로 행복과 관련된다는 점에서 윤리학적 재료들이다. 자신에 대한 앎은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데 활용할 수 없는 것은 아니나 무엇보다도 자신이 행복해지는 데 필요한 결정적인 근거이다. 자신은 동적인 사람인데 이를 평생 인식하지 못하고 데스크 업무만 보고, 집에서만 여가시간을 보낸다면 억겁의 시간이 흐른다 해도 행복의 방정식은 풀리지 않은 상태로 남겨질 것이다.
행복에 대한 정의가 제각각 다르겠으나 행복이 슬픔이 아닌 기쁨과 관련되어 있다는 데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줄로 안다. 감정, 정동에 대한 통찰을 보여준 스피노자에 따르면 기쁨은 자신의 역량을 온전히 발휘할 때 생성되는 감정이다. 들뢰즈는 어느 강연에서 길에서 사람을 마주쳤을 때 기쁨을 느낀다면 이는 자신이 강해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렇게 적어놓고 보니 <혼자를 기르는 법>의 김정연 작가의 인터뷰가 떠오른다. 자기 방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로만 채워져 있어서 좋다는 것, 그야말로 ‘자기만의 방A room of one’s own’에서 살고 있는 이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30대가 되면 조금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 알게 된다는 말에 심심한 위로를 받으면서 한편으로 이십대의 격렬한 방황과 좌충우돌이 있었기에 가능한 게 아닐까 싶었다.
그런 점에서 20대는 실험의 연속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다운 나를 찾기 위한, 또 만들어나가기 위한 연습과 연마의 시간. 연애를 통해 ‘정확한 사랑의 실험’을 시행하고, 소비와 문화적인 편력을 통해 자기만의 감수성과 취향을 실험하고, 독립을 통해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시공간의 디자인을 실험하고, 취업 및 도전을 통해 이상과 현실 사이 적절한 타협점을 실험한다. 사랑의 경험을 통해 자기 몸과 처음으로 내밀한 소통을 시작하게 되고, 진부한 비유이긴 하지만 상대방의 연주에 따라 자신이 어떤 음을 낼 때 가장 빛나는 악기인지 차차 알아가고,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독립함에 따라 자기만의 시공간을 확보하게 되고, 그 시공간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디자인하면서 멋을 찾아가기 시작하고, 욕망과 능력이 조화를 이루는 지점을 찾고 자신의 포지션을 받아들이고 나서야 ‘나’에 대해 조금 알 것 같다고 노래 부를 수 있는게 아닐까.
이렇게 자신에 대한 앎을 정립하는 과정에서 타인의 호명 및 심문은 중대한 역할을 차지한다. ‘누구냐, 넌’ 우리는 끊임없이 타인에게 자신을 설명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자기소개를 하고, 자소설이란 오명이 씌워지긴 했지만 자소서를 쓰는 등 사실은 ‘나는 누구인가’ 반복적으로 규정하게끔 유도·강제하는 규율을 통해 자아에 대한 특정한 이미지가 구축된다. ‘나는 누구인가’라고 묻는 ‘나’는 누구인가. 알튀쎄의 호명 메커니즘을 적용시킨다면 ‘나는 누구인가’ 묻는 ‘나’는 대타자-이데올로기에 호명된 주체이기 때문에 실상 ‘누구냐, 넌’이란 질문의 뒤집힌 형태에 불과하다는 걸 알 수 있다. 나는 양동혁이다, 남자다, 한국인이다, 시스젠더 헤테로섹슈얼이다, 대학원생이다, 이런 식의 답변은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정보일지 모르지만 스스로에게 무의미한 기호일 뿐이다. 명사가 아닌 동사로 주술 구조를 갖춰 서술했을 때 내 본질을 조금이나마 담아낼 수 있다. ‘누구’인가도 문제적이지만 ‘나’라는 개념 자체도 그 못지 않다. 니체가 말했듯 ‘나’가 문법적 환상에 불과하고, 행위가 주체를 구성한다는 수행적 관점을 받아들인다면 나는 내가 한 행동들의 총체 정도라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정희진처럼 읽기>에서 정희진이 데카르트 식 코기토에 대항하며 피력한 의견과도 동일한데 이와 더불어 나는 내가 맺고 있는 관계들의 총체라는 관계론적 관점이 탈근대 철학적 지평에서 바라보는 주체의 이미지인 것 같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까지 한 행동들과 내가 맺고 있는 관계들을 설명하면 나에 대해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는 걸까?
가끔 그런 상상을 한 적이 있다. 브레인라이팅-생각하는 즉시 그대로 문자로 옮겨지는 기술-과 카메라로 전 생애 전체를 기록하고, 텍스트로 남긴다면 나중에 어떤 식으로든 인생을 복기하는 과정에서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만 볼 수 있게 해놓더라도 내 삶이 전부 기록되고 있다는 의식이 살아가는데 영향을 미칠 수 있겠으나 망각으로 인해 고초를 겪는 경우가 적지 않으니 인생을 기록하는 ‘블랙박스’의 존재를 생각하게 된 것이었다. 또, 자기 자신에 대한 평전을 쓸 수 없듯 객관적인 거리가 확보되지 않아 비평적 관점을 취하기 힘든 반성적인 내면 성찰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활용할 수 있겠다 싶었다. 예술가의 경우 작품을 통해 창작자의 심리와 세계를 해석하는 게 가능하지만 작품 및 기록물archive 자체가 양적으로 빈약한 경우가 일반적이다 보니 기술의 도움을 통해 스스로를 이해할 수 있는 지평이 확장될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좀 더 생각해보니 이 기록들이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할 공산이 농후해보였다. 이런 기록이 남아 있다면 남의 인생을 사후적으로 구성하고, 해석하는 데는 유용한 자료가 되겠지만 스스로를 이해하는 데는 큰 도움이 안 될 거라 예상되었다. 영상이든 문자든 이미지든 기호들은 해석을 통해 주체로 편입되는데 해석할 자료가 양적으로 많다고 해서 해석의 질적 깊이나 정확도가 높아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최신식의 심리테스트나 과학기술이 개발되었다 하더라도 자기 자신에 대한 가장 깊은 지식은 명상을 통해 얻어지는 걸 보면 자신에 대한 앎은 ‘그 지식을 매개 삼아 지적 주체 자신이 변화할 수 있는가’ 지식의 윤리성(윤여일은 <지식의 윤리성에 관한 다섯 편의 에세이>에서 지식을 정합성, 기능성, 윤리성의 측면으로 구분하여 논하면서 지식의 윤리성을 화두로 독자들에게 건넨다)이 가장 절실하게 요청되는 영역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 여기’의 자신이 어떤 마음인지 ‘알아차리고’ 행동하면서 자아라는 허상, 집착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고 있다면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을뿐더러 스스로에게 진실한 사람이다. 스스로를 속이지 않아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은 사람,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의 2부 ‘지금’의 함춘수(정재영), 내면이 배배 꼬여 있지 않아 자기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아는 사람, 진실한 사람이 되려면 행동을 바꾸고 욕망을 바꿔야 했다. 다른 것을 욕망하는 게 아니라 다르게 욕망하는 도주선을 그리기 위해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삶. ‘그것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라캉)
p.s 난 알아요. 무엇을? 난 날 알아요. 어떻게? 난 날 잘 알아요. 왜? 왜 난 날 잘 알아요? 왜 난 알아요(김승일). 왜 무無가 아니라 존재인지 물었던 것처럼 왜 무지가 아니라 앎인지 물어보자. 이렇게 많이 알고 있는데 그만큼 잘 알고 있는지, 나아가 윤리적인지 따져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