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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한 사람
이승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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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쓸 것인가. 고민고민하다 리뷰를 쓸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나도 신중한 사람인 걸까? 섬세함과는 별개의 신중하기만 한, 신중함의 자의식이 빚어내는 무게에 짓눌려 아둔하게 움직이고, 신중함의 무의식이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생각을 하게 만드는, 그런 자기진단을 다 해놓고 확실한 대안을 찾지 못해 현상을 유지하는, 그런 사람. 


 신중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자신의 선택에 대한 믿음/자신감의 부족과 올바르지 못한 선택을 했을 때에 예감하게 되는 불편함에 대한 불안이 신중함의 핵을 이루고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신중한 사람은 현재에 신중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아직 발생하지 않았지만 도래할 가까운 미래를 걱정하고, 그 미래에 대한 치열한 염려와 계산으로 인해 현재의 자신을 소외시킨다. 이렇게 표현하면 어떨가. 그는 지나치게 미래지향적이기 때문에 '지금'을 놓친 사람이라고. 가능태에 온갖 심혈을 기울인 바람에 존재를 희미하게 만들어 불가능한 밀도를 앓는 사람이라고. 


 그렇다면 이 소설은 신중한 사람들에게 행동을 촉구하는 계몽소설인가? 이것은 이 소설을 읽는 가장 나쁜 독법 중 하나일 것이다. 나는 오히려 <하지 않은 일>을 읽으며 신중함의 부재가 일으킬 수 있는 재앙을 아프게 느낀다. 신형철 평론가는 팟캐스트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이것이 폭력이 아니라는 생각보다 이것이 폭력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 낫다. 우리는 예기치 못한 기습에 더 큰 아픔을 호소한다. 무심한 얼굴에서 나오는 말 한 마디의 모서리에 배여 간결하게 흐르는 피. 무심히 고통을 견디는 편이 가장 고통스럽지 않은 고통이 있다고 한다면 어떨까? 신중한 사람은 이런 고통조차 피하려 들까? 고통에 대한 키치적 태도, 고통과의 인위적 거리두기가 삶은 곧 고통의 연속이라 하는 존재론적 현실을 외면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존재와 고통 사이의 거리가 사라져버리는 것은 아닐까? 


 '신중하다'의 사전적 정의를 찾아보았다. '매우 조심스러움'. 조심스러움은 위험이란 부정을 전제한다. 섬세한 사람은 신중하다고 할 수 있지만 신중한 사람이 섬세한 건 아니다. 신중함은 오히려 섬세하게 불안의 원인은 정확하게 포착하지 못했기 때문에 취하게 되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신중한 사람은 어떤 기미를 포착해 위험/고통을 피해갈 수 있을진 몰라도 정답을 골라내진 못한다. 더 나쁜 것을 피할 순 있을지언정 더 좋은 것을 선택하진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판단력의 문제가 아니라 사건/사물을 대하는 태도, 마음의 운동방향의 문제이다. 낙관주의자에게 신중함은 자신의 감각으로 감지해내지 못하는 위험을 포착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지만 긍정하거나 선택(행동)하지 않고 회의하고 부정하기만 하는 신중함은 결국 재귀를 통해 자기를 복제하게 되고, 이 폐쇄적 닫힌계는 결국 퇴화적 보수가 되면서 구더기 무서워 평생 동안 장 못 담그는 비극적 코미디로 귀결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소한 고통, 실패가 아닌 <하지 않은 일>에서처럼 '돌이킬 수 없는' 재앙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도망칠 수 없으면 즐겨라, 라는 말은 도망칠 수 없는 절망적 상황을 관점의 전환을 통해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지혜의 잠언 같지만 실은 이 초월에는 굉장히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 만약 삶을 지탱할 수 없는 만큼의 절망적 고통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이 상황에서 그 사람이 즐길 수 있는 건 고통이 아닌 자살일 지도 모른다. 도저히 초월/해탈할 수 없는-즐길 수 없는 것에 대해서 도망칠 수 없다는, 그래서 너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즐기라'는 명령을 하는 건 굉장한 폭력을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을 보통 어떤 상황에서 누가 했는지 회상해보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내게 이 말을 많이 했던 건 고등학교 선생님들이었다. 이 길이 아닌 다른 길을 선택하는 것을 (정언적 텔로스로부터 벗어난) '도망'으로 만들어 열패감, 죄의식의 메커니즘을 형성하고, 그렇게 그 어떤 부조리도 '현실'이란 생뚱 맞은 개념으로 고정시켜버림으로써 다른 가능성을 사유하지 못하게끔 만들었다. 진창에서 구르면서도 웃을 수 있는 해탈정신은 인정받아 마땅하지만, 이 해탈의 전제조건인 고통/폭력이 구조적으로 상재하는 상태에서 해탈을 강요하는 건 구조적 부조리를 은페하면서 고통을 강요하는 야만적 폭력일 것이다. 힘이 없는 학생들은 해탈도 풍자도 아닌 자살을 선택한다.(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9/05/2014090501264.html) 


 <하지 않은 일>을 읽으면서 답답하고 많이 아팠다. 잊고 있었던 타블로 사건. 최근에 독서모임을 위해 다시 읽는 '소송'과 연결되면서 소송적 사건의 짙은 그림자가 나를 드리웠다. 존재론적 고독과 존재론적 소외. 하지 않은 일에 대해 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피고. 여기에는 이미 '행위'가 잠재적으로 기입되어 있다. 행위의 존재를 전제하지 않았다면 행위의 부재를 확인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잘못된 의심/믿음이 대중의 광기란 조잡한 접착제에 의해 확신으로 굳어졌을 때 한 개인의 벌레보다 못한 존재로 한순간에 '변신'할 수 있다는 것, 누구나 스마트폰으로 초고화질 동영상을 찍어 몇 초만에 전 세계로 공유시킬 수 있는 과잉연결 미디어 시대에 '신중함'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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